- 35 회 - 괴물
“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것들이 달라져 간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설레는 한 편 부담스럽기도 했다. 지선이 대구로 내려왔다는 소식에 평소보다 일찍 눈을 뜨고 약속 장소로 나갈 준비를 하는 현성이 숨을 고르고 거울 앞에서 옷 매무새를 단정히 해본다.
“…귀찮노.”
그리 하겠다 이야기는 했지만 막상 나서려고 하니 귀찮은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 채우는지 그가 쓴웃음을 띤 채 머리를 긁적인다.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까? 사람이란 게 그렇다. 끄 당시에는 그렇게 해야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가도 시간이 지나선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은연중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지선도 언급한 바 있고, 민욱에게서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들었던 다른 사람의 존재가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던지… 단순히 지선을 만나는 것보다 심적으로 많이 부담이 되는 듯 현성이 괜히 한숨을 내쉬며 나가기를 머뭇거린다.
하지만 해야 한다. 그리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 자리가 부담스럽고, 그렇게 내키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마음과 위장을 현재 뒤집어 놓고 있는 그 소녀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 고맙다는 말의 정체를 알아낸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다른 의미로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 그녀는 그로 인해서 아버지를 잃은 셈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받은 피해가 있다면 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생각하며 현성이 무거운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긴다.
살아가는 방식이 참 영특하지 못하다고 스스로도 몇 번이나 생각해보지만 천성이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그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남겨진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쉽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입버릇처럼 하던 ‘빙시가 아니다’라는 말이 결국은 그 자체가 그런 사람이란 것을 인정하는 말처럼 느껴져 더욱 더 씁쓸하고 텁텁한 맛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딱히 그런들 뭐가 나아지겠는가? 피하는 것보다는 부딪쳐서 뭐든 결착을 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민욱과 그랬던 것처럼.
“총각, 오늘 일찍 나가네! 어디가나?”
모텔을 나서며 열쇠를 맡기는 그에게 이제는 친숙해진 듯 모텔 카운터의 아주머니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원래는 아는 채도 하지 않았지만 방송을 보게 된 것인지, 뭔지는 몰라도 요즘 부쩍 친절하게 응대하고 그에게 기운을 내라는 위로를 해주는 둥… 변화한 그 모습에 현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아… 약속이 있어서요…’ 하고 꾸벅 고개 숙여 인사 한다.
영화나 소설처럼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 하나… 주변에서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 마치 날씨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거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험악한 외모의 나쁜 사람, 피하고 싶은 사람이라 여길 것이며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모텔을 나서며 헛된 기대를 품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그친 채 현성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꽃샘추위가 유난스러운 날씨도 오늘만큼은 꽤나 화사한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는데, 조만간 봄이 다가올 것만 같았다. 물론 그 봄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겐 여전히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어두운 터널 속, 혼자만의 겨울이겠지만. 허나 그 겨울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긴 여름이 무척이나 뜨겁고 끈적해서 화상자국이 지끈 거릴 정도로 아팠다면 겨울은 오히려 차가워 화상의 고통은 느끼지 못하도록 만든다. 얼굴에 새겨진 화상만큼이나 가슴에 깊게 새겨진 낙인을 식혀주는 듯 한 겨울이 그렇게 춥지만은 않다 생각하며 현성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그가 살고 있는 동네로 직접 찾아왔기 때문에 굳이 버스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그 하나로도 기쁜 듯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현성이 문득 이 시간에 혜주는 무얼하고 있나 싶은 생각에 핸드폰을 꺼내본다. 그렇지만 아마도 밤 생활을 7년째 하고 있는 그녀이니 지금쯤 깊이 잠들어 있지 않을까…?
연락을 해볼까 망설이다 현성이 괜히 잠을 방해한다는 기분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든다. 가끔씩은 새벽이나 밤이 아니라 이렇게 날 좋은 날 같이 나서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물론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그가 밖으로 나설 자신이 없을 테니 결국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화사한 날씨나, 웃고 즐기는 사람들 속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모이다 보니… 아마 같이 나가게 된다면… 괜시리 그 생각만으로도 움츠러든 듯 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은 핸드폰을 바라본다.
오늘은 김관수 관장도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 며칠이나 답장 없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다 지친 모양이다. 달리 들어와 있는 메시지가 없는 것을 보고 현성이 왠지 모르게 서운한 기분이 들자 쓴웃음을 띤 채 고개를 흔든다. 습관적이란 게 참 무서운 것인지 익숙하던 메시지가 오지 않으니 괜시리 마음이 불편하고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 먼저 연락을 해볼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또 그러자니 너무 속이 빤히 보이는 것 같아 망설여지고. 결국은 그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집어넣으려는 찰나 ‘부르르.’ 하고 진동이 울린다.
-현성 씨, 지금 그 동네 들어 왔어요. 어디쯤이에요?
지선에게서 온 연락에 그가 ‘벌써 다 왔나…?’ 하고 조금 놀란 얼굴로 답장을 누른다. 아직도 이 핸드폰 모니터 터치나 문자 보내는 것이 어색한 듯 그가 걸음을 멈춰 서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동안…
“현성씨!”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에 현성이 ‘누구…’ 하고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김관수 관장과 조금 마른 체구에 짧은 머리를 한 젊은 남자가 함께 서있다.
“아…”
순간 현성이 김관수 관장의 등장에 당황한 듯 멈칫한 사이에 김관수가 관장이 ‘아… 얘길 못 들었나 보네…!’ 하고 웃으며 이야기를 건넨다.
“오늘 지선씨랑 오형석 대표랑 내랑 이렇게 같이 보기로 했는데 얘기 못 들었어요…?”
여전히 그에게 존대를 사용하는 그의 모습에 현성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아…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오늘은 연락이 오지 않았구나.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을 품은 것이 억울해진 기분에 그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김관수 관장이 ‘안 그래도 마침 연락을 좀 해볼 생각이었는데!’ 하고 덩달아 웃음을 터뜨린다. 그 너털웃음에 곁에 있던 젊은 남자가 ‘요즘 관장님 연애 하는 줄 알았더니 아이네요.’ 하고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자 현성이 ‘아…’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는다.
“와… 나도 팔 길다는 소리 많이 듣는데 팔 진짜로 기시네요! 주먹도 크고…!”
쾌활한 성격의 주인공인 듯 그가 와 하고 감탄을 하며 악수를 하지 않은 반대 손으로 엄지를 치켜들자 현성이 ‘아…’ 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사람과 달리 그의 외모나 용모에 움츠러들지 않고 밝고 싹싹하게 말을 거는 모습이 조금 신기하던지 현성이 어색하게 웃음 짓는 동안 그가 인사를 건넨다.
“송기철이라고 합니다! 김관수 관장님이랑 같이 운동하고 있구요.”
기철의 인사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송기철…?’ 하고 어디서 이름을 많이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는 동안 김관수 관장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기철의 어깨를 두드리며 대신 대답한다.
“야가 지금 일본에 딥(DEEP)이라는 데서 라이트급(-70Kg) 챔피언 하고 있는 압니다! 우리 체육관서 제일 잘 나가는 아지요! 나이는 아마… 장군이라 캐도 되나요…? 장군보다 한 5살 많을거구요!”
“아… 말 편안하게 하셔도 됩니더.”
김관장의 대답에 현성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아… 그래도 되겠어요? 그라믄 지금부터 말 좀 편안하게 할 테니까 괜찮제…? 현성아.”
김관수 관장이 후후 웃으며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이야기 하자 현성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가 김관수 관장의 옆에서 왠지 모를 아우라를 내뿜고 있는 기철을 바라보자 기철이 ‘그냥 그거는 관장님이 비행기 태우는 깁니다.’ 하고 고개를 흔든다.
본인은 아니라곤 하지만 분위기 자체가 보통 사람과는 달라 보이는 것이… 옷을 입고 있어 날렵한 체구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다부진 느낌이 들었다. 같은 주먹질을 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확실히 재운이나 창호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두 사람의 모습에 현성이 괜시리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던지 힐끔 힐끔 그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여전히 주먹질을 하고, 사람들이 그를 동물원 원숭이처럼 지켜보는 자리에서 돈을 번다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던지 이내 ‘잠시만…’ 하고 고개를 돌려 지선에게 보내던 문자를 마무리 하고 보낸다. 그 모습을 살피던 김관장이 ‘지선 씨…?’ 하고 물음을 던지자 현성이 ‘아,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까 내한테도 벌써 들어왔다 연락 하던데 평일이라가 더 빨리 왔나 보네! 자, 같이 먼저 드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네…!”
편하게 한다고 해서 막 말하는 게 아니지만 무척이나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의 말에 현성이 저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린 듯 어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혹시 뭐 운동은 따로 해본 적 있어요?”
그러는 동안 현성이 기철을 궁금해 한만큼 기철도 현성에게 궁금한 게 많은지 같이 걸으며 물음을 던진다.
“아니요… 한 번도…”
전혀 예상치 못한 김관수 관장과 그의 제자 기철을 만난 것이 당황스러운 듯 현성이 어색한 웃음을 띤 채 고개를 흔든다. 그 말에 기철이 와 하고 다시 감탄을 터뜨린다.
“그 방송 봤는데 운동 안하고도 진짜 그래 짜세 나오는 사람 첨 봤어요! 몸도… 뭐 안 해도 원래 근육 좀 잘 붙는 편이에요?”
“그냥 남들보다 좀… 힘 좋단 소리는 많이 들었는데… 잘 모르겠심다.”
혜주와는 다른 의미로 그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사람은 또 처음인지 현성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낯가림 많고 수줍음 많아 보이는 덩치 큰 청년의 모습에 기철과 김관장이 허허 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현성이 조금 불편한 듯 휴 한숨을 내쉰다.
“참, 혹시 그거는 생각 해봤어요? 관장님이 우리 체육관 한 번 놀러 오라 그런 거.”
그런 현성을 보며 기철이 빠르게 화제를 돌리자 현성이 ‘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일이 좀 힘들어가…”
“그렇죠? 밤 일 하면 낮에 계속 다 자야 되잖아. 그러면 시간 내기도 좀 힘들고 확실히 그렇죠.”
자기도 경험이 있다는 듯 기철이 웃으며 맞장구 치자 현성이 ‘예… 그런 편이죠…’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왠지 모르게 김관장이 이 사람을 데려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만 느낌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굉장히 스스럼없이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자신감이 보이는 사람. 민욱과 비슷한 듯 하면서도 그에겐 찾아보기 힘들었던 배려심이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현성이 ‘격투기…’ 하고 다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자 기철도 더 이상 옆에서 떠들어 대지 않는다.
무척이나 말수 적은 그 친구가 조금 어려운 듯 그가 김관장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내자 김관장이 음… 하고 생각하다 ‘그 예쁜 아가씨랑은 잘 지내나?’ 하고 또 다시 화제를 전환한다.
“아… 혜주 누나요?”
“오…! 여자 친구 맞죠? 여자 친구 진짜 이쁘던데!”
계속 권유 하느니 차라리 돌아가자 김관장과 기철이 방향을 전환해 이야기를 건네자 현성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어색한 얼굴을 한다. 하지만 전과 다르게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것이…
“아직 그런 건 아니고요…”
“에이, 분위기 보니까 잘 어울리던데!”
허허 웃으며 관록의 김관장이 한 마디를 던지자 현성이 ‘예?’ 하고 그를 바라본다. 이내 그가 고개를 흔들며 ‘잘… 어울리진 않아요.’ 하고 대답한다.
“누나는 진짜 이쁜데… 저는 아니잖아요.”
그 대답에 김관장과 기철이 ‘남자가 키 크고, 등 빨 있고 생긴 것도 그만하면 됐지! 에이 아이다! 잘 어울린다!’ 하고 미소와 함께 그의 어깨를 툭툭 치자 현성이 이 밝은 분위기를 감당하기 힘든 듯 그저 어색하게 웃음 짓는다.
하지만 정말로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김관장이나 기철이 말이다. 더불어 혜주 이야기만 나오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정말로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자… 그라면 우리 먼저 주문 좀 하까? 아침은 먹고 왔어요?”
약속 장소인 카페로 들어왔지만 이런 자리가 김관장이나 기철 둘 다 익숙하진 않은지 밥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에 현성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것을 꾹 참는다. 물론 카페에서 식사 대용은 할 수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순박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는 생각에 그가 ‘저는 괜찮심다.’ 하고 대답하자 김관장과 기철이 힐끔 서로를 살피다 ‘아, 우리도 괜찮다!’ 하고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주문 도와드릴게요…!”
그 사이에 수상한 남자 셋을 향해 종업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자 조금 긴장한 듯 한 김관장이 기철을 바라보며 옆구리를 툭 친다.
“시키라. 그때 그거.”
그 말에 기철이 ‘아메리카노 하나랑 저는 물 마시면 되고… 현성 씨는요?’ 하고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에 현성이 ‘저도 물…’ 하고 대답하자 김관장이 괜히 무안한 듯 ‘아…’ 하고 종업원을 바라보다 어색한 얼굴로 이야기 한다.
“그, 그래 가져다 주이소.”
굉장히 어색하고 뻘쭘한 분위기에 종업원이 웃음이 픽 터진 듯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지자 기철이 큭 하고 김관장 옆에서 웃음을 꾹 참는다. 어금니를 꽉 물고 김관장이 ‘기철아.’ 하고 그를 바라보자 기철이 ‘아, 아입니다. 관장님.’ 하고 기합이 빡 들어간 군인처럼 그와는 다른 연유로 어금니를 꽉 깨문다. 하지만 웃긴 걸 어떻게 할까? 현성도 그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친근해 보이고 괜시리 입가가 간질간질 거리자 고개를 푹 숙여 웃음을 참는다. 그런 그를 보며 기철이 기회라는 듯 재빨리 입을 연다.
“우리 관장님이 평생 운동 밖에 몰라가지고 이런 거 진짜 못하세요! 그래가 주문도 맨날 내가 다 하는데… 또 관장님이 남들이랑 똑같은 거 안 시키면 불안해 하시거든요.”
“불안은 누가 불안해 하노!”
어험 하고 헛기침을 하며 김관장이 ‘나는 커피 좋아한다.’ 하고 오해라는 듯 손을 흔들자 현성이 아랫입술을 깨문다.
“두 분이… 되게 친하신가보네예.”
지서이 오기 전에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무척이나 어색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입가가 간질간질 웃음이 살살 새어나와 현성이 한결 부담이 누그러든 얼굴로 이야기를 건네자 기철이 ‘그렇지요’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벌써 몇 년째 같이 운동하고 있는데 친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한 5년 됐죠, 관장님…? 내가 딱… 현성씨 나이즘에 도장 들어왔던 거 같은데.”
“그래, 그쯤이었을거라. 그때는 기철이 임마 이거 아가 비쩍 꼴아가 팔 다리만 길다랗게 해서 그 원숭이 같이 생겼었거든. 근데 지금은 내 덕분에 사람 됐다, 사람.”
아까의 무안함을 감추려는 김관장의 일격에 기철이 ‘관장님, 원숭이가 뭡니까!’ 하고 억울하다는 듯 따지고 들자 김관장이 니 별명이 ‘긴 팔 원숭이 였다 안 그랬나?’ 하고 팔짱을 낀 채 느긋한 얼굴로 대답한다.
그들의 정겨운 모습에 현성이 옅은 웃음을 띤 채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반대쪽 입구에서 딸랑이는 소리가 들린다. 곧…
“현성씨! 잘 지냈어요?!”
단발머리에 오늘은 굽이 있는 신발을 신고 왔던지 지선이 또각이는 소리를 내며 그 곁에 정장을 차려 입은 덩치 좋은 남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한다. 덩달아 김관장과 기철도 일어나 인사를 하자 그녀 뿐 아니라 그 뒤의 남자가 ‘오랜만입니다, 김관장님!’ 하고 미소와 답인사를 건넨다.
드디어 올 사람들이 다 왔다는 생각이 드니 사라졌던 부담감이 다시 고개를 드는지 현성이 조금 굳은 얼굴로 꿀꺽 침을 삼킨다. 김관장이나 기철이 온 건 왜인지 알 것 같아도 저 사람이 온 이유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가 그를 조금 경계하는 빛을 담아 바라보자 정장을 입은 남자가 그를 향해 미소와 함께 악수를 건넨다.
“방송 정말 잘 봤습니다! 대단하십니다! 팬 됐습니다!”
그 남자의 말에 현성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 아입니다…’ 하고 그의 손을 붙잡는다.
“저는 엠파이트 매거진 대표 맡고 있는 오형석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형석… 민욱이 말했던 그 사람이 분명했다. 그 말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장현성입니다…’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자 어느 샌가 그의 옆자리에 앉은 지선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잘 지냈어요?’ 하고 다시 인사를 건넨다. 그 인사에 현성이 전과 달리 화장도 한 것 같고 조금 느낌이 다르단 생각에 머뭇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그냥…”
잘 지내고 있기만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 필요 없는지 어색하게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지선이 ‘일단은 주문부터…?’ 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간단한 인사와 이야기를 나누려는지 이야기를 꺼낸다.
“아, 우리는 벌써 주문 했어요. 관장님만 아메리카노 드세요. 관장님 아메리칸 스타일이거든요.”
그 말에 지선과 오형석 대표가 푸핫 웃음을 터뜨리자 김관장이 기철을 힐끗 바라보며 ‘쓰읍… 니 그카면 안 될 낀데.’ 하고 눈을 부라린다.
“…현성씨, 도와줘요.”
유쾌한 성격의 기철이 현성을 바라보며 애절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자 현성이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와는 다르게 분위기 메이커 기질이 있어 보이는 기철이 있어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 속에서 지선이 ‘현성씨는 왜 주문 안 했어요?’ 물음을 던진다.
“아… 저는 그냥 별로… 이런 거 안 좋아해서…”
그 대답에 지선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 그러면요 하고 오형석 대표를 바라본다.
“그러면 간단하게 이야기 끝내고 같이 식사나 하러 갈까요? 오 대표님도 시장하시죠?”
“아, 그렇네요. 서울서 대구까지 밟는다고 배가 출출 합니다!”
오 대표의 웃음 섞인 대답에 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현성을 바라본다. 딱히 식사까지 함께 할 생각은 아니었는지 그가 우물쭈물 하는 모습에 그녀가 ‘오랜만에 봤는데 그러기에요?’ 하고 서울 말씨로 그를 나무라자 현성이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라몬 내 혼자 뭐 시킨기가…?”
김관수 관장이 괜히 뻘쭘한지 기철을 돌아보며 한 마디 하자 현성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돌리고 만다. 왠지 모르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기분이 좋은 만남이 되고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예상 외로 가볍고 즐거운 분위기. 그 분위기 속에서… 그래도 그것에 취해버리면 나중이 또 힘들어 질 것이라 생각한 듯 현성이 자신의 ‘목적’을 상기해내고는 지선을 바라보며 이야기 한다.
“근데… 그거는 알아 보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지선이 ‘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녀가 가방을 열자 순간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 된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봤는지… 물어 봐도 돼요?”
그녀의 물음에 현성이 그녀가 꺼낸 파일을 보며 ‘그냥… 그런 일이 좀 있었심다.’ 하고 다시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유쾌한 기철이나 김관장, 그리고 오대표가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지켜보는 동안 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파일을 내민다. 그 파일을 받은 현성이 조심스럽게 안을 열자 현성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이상한 기분이 느껴지던지 현성이 휴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는 동안…
“추가 촬영…이랑도 관련이 있더라구요. 그 사람… 성폭력 전과자였던 것. 개인 정보 보호 때문에 자세한 내역은 알아보진 못했어요. 그런데 형사님들이랑 이야길 나눠 보니까 그 성폭력 전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