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33화 (33/281)

- 33 회 - 괴물

“…뭔데…? 와 왔는데.”

그 날 이후로 다시 보는 건 처음이라만, 다시 만날 것이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 민욱이 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반가움보다는 경계심을 가지고 현성이 물음을 던지자 그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렇게 긴장 하지 마. 누굴 쌍팔년도 악당으로 아냐…?”

복수나 보복 따위는 별 생각이 없다는 듯 경계하지 말란 식으로 민욱이 이야기 하자 현성이 정곡을 찔린 듯 흠칫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복수라 할 게 뭐가 있을까? 더구나 이런 상태로 말이다. 다만… 그가 왜 그를 찾아왔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현성이 경계 대신 궁금증을 담아 그를 바라보자 민욱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다 아야… 하고 인상을 구긴다.

“너 때문에 내가 말은 길게… 못하거든.”

붕대를 감은 턱으로 어눌하게 말을 잇는 그의 모습에 현성이 움찔한다. 소식이야 들었다만 이렇게 직접 마주보니 뭔가 기분이 오묘했다. 맞기는 아마 몇 배는 더 많이 맞았을 텐데 막상 결과물을 이렇게 보니 굉장히 머쓱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시간 되냐?”

그런 그를 바라보며 민욱이 물음을 던지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오픈까지는 시간이 있었고… 이야기가 그렇게 길어질 것도 같지 않았다.

“방송… 봤다.”

흠흠 하고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민욱이 이야기를 꺼내자 현성이 ‘글서… 뭐…?’ 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린다. 그 방송의 두 주인공이자, 피 터지게 싸운 사이인지라 어색한 맘이 가시질 않는지 불편한 모양의 그를 보며 민욱이 다시 피식 웃음을 터뜨리다 아야야 하고 소리를 낸다.

“너 때문에 나 완전 나쁜 놈 됐더라. 거기다 거품설까지…. 아… 덕분에 쪽 팔려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다.”

그리고 꺼낸 그의 말에 현성이 힐끔 민욱을 바라본다. 옅은 미소를 띤 채 이야기를 꺼내는 동갑내기의 말은 다소 원망이 섞여 있는 듯 했지만… 그렇게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진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그의 말에 현성이 참 이상하단 생각을 하며 ‘맞나…’ 하고 걸음을 옮겨 길모퉁이 벽에 등을 기대선다. 별 말이 없는 현성의 모습에 민욱이 ‘재미없긴 여전하네.’ 하고 불만스럽게 툴툴 거리며 덩달아 벽에 등을 기대곤 ‘아고…’ 하고 하늘을 바라본다.

“…막말 한 거 미안했다.”

그리고 연이어 나온 그의 사과에 현성이 의외라는 듯 다시 힐끔 그를 바라보자 민욱이 그를 돌아본다.

“그 말… 할라고 온기가?”

현성의 물음에 민욱이 이런 이야기는 해본 적도 없고, 또 해놓고도 무척 쑥스럽던지 어색하게 웃으며 소리친다.

“아니! 내가 뭐 너랑 로맨스 찍으러 온 줄 아냐?”

이내 다시 그가 고개를 돌려, 어둠이 막 깔리기 시작하는 2월의 회색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그냥… 이기든 지든 얘기는 하려고 했었어. 승자로써… 배드보이 캐릭터에 욕심이 있었거든. 아… 지금은 배드보이는 커녕… 위크보이가 됐지.”

턱을 어루만지며 씁쓸하게 이야기 하는 민욱의 모습에 현성이 ‘맞나…’ 하고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같이 하늘을 바라본다. 뭐라고 이야기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그 지독스럽게 얄밉던 녀석이 한 번 거하게 싸우고 나서 그런지 그렇게 밉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던 만큼 악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말끔히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애시당초 뭔가 꼬인 녀석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난 내가 질거라곤 절대로 상상 못했거든.”

이내 아픈 턱을 붙잡고 민욱이 푸핫 웃음을 터뜨리자 현성이 다시 ‘맞나…’ 하고 그를 따라 어색하게 미소 짓는다. 불현듯 갑자기 나타난 ‘그 사람’의 딸 때문에 뒤숭숭하던, 바짝 긴장했던 마음이 별 다른 일 없이 풀려가는 느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이다.

“무슨 문제 또 있냐…?”

그런 그에게 민욱이 다시 물음을 던지자 현성이 ‘별 일 아이다.’ 하고 고개를 흔든다. 별 일은 아니라곤 하지만 얼굴에 가득한 수심은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법 하다. 그 모습에 민욱이 ‘나도 나지만, 너도 참 너다!’ 하고 품에서 담배를 꺼낸다.

“니 담배 펴도 되나…?”

그런 그를 보며 현성이 다쳤는데 담배는 안 되지 않나 싶은 생각에 이야기를 건네자 민욱이 씁쓸하게 그를 바라보며 ‘아니.’ 하고 고개를 흔든다.

“아… 그냥 필라 그랬더니 진짜.”

쓴웃음과 함께 다시 품에 담배를 집어넣고는 그가 ‘아무튼!’ 하고 이야기 한다.

“내가 진짜… 너무 방심해서 너한테 깨진 건 진짜 인정한다. 그런 주먹은 맞아본 적이 없거든.”

아직도 얼얼하다는 듯 혀를 내두르는 민욱의 말에 현성이 주머니 손의 두 주먹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짓는다. 아직도 그 날의 찝찝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은 두 주먹. 그 표정을 바라보던 민욱이 그로써는 이해 할 수 없는… 그리고 그가 말했던 그 차이가 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에 ‘그건 니 잘못 아니잖아.’ 하고 한 마디를 던진다.

“…잘못이건 아니건… 죽은 건 내 때문이다.”

현성이 그 말에 수십, 수백번을 생각했지만 결론은 하나라는 듯 무거운 얼굴로 대답한다. 특히나… 오늘 그의 딸을 만나고 나서는 더욱 커진 생각으로 말이다. 묵직한 주먹만큼이나 묵직한 녀석. 참 재미도 없고, 답답한 녀석. 하지만 이상하게 정이 간다. 그 생각에 민욱이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본다.

“넌 참 인생 재미없게 산다. 그런 거… 그냥 편안하게 생각하면 되잖아. 어련히 죽을 놈, 죽은 건데…!”

사정을 알기 전엔 마구 물어뜯은 부분이지만 사정을 알고 나니 올바른 일을 했다고밖엔 볼 수 없었던지 민욱이 턱의 고통을 감내하며 열변을 토하자 현성이 기분이 이상한 듯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싸우기 전에 그렇게 아픈 곳을 뒤집어 놓더니… 깔끔하게 사과하고 나서 이렇게 또 편을 들어주니 기분이 정말 이상했던 모양이다. 아마 지선이 말했던 방송의 힘이란 것일까…? 그런 걸 떠나서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그 싸움에 모든 감정을 쏟아 부은 탓인지 민욱에 대한 감정이 그렇게 크게 남아 있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빙신갑지…”

쉽게 떨쳐 내지 못하는 자신이, 자신도 갑갑한 듯 내 뱉은 한 마디에 민욱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나는 잘 모르겠다. 오늘… 그 양반 딸래미 만났다.”

그리고 그가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망설이고 망설이다 민욱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자 민욱이 ‘뭐?’ 하고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뭐라고 그러던데…?”

아무리 거침없는 민욱이라도 이 순간만큼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방송 이후에 그런 건 아마 그도, 지선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 물음에 현성이 쓴웃음과 함께 한숨을 내쉰며 대답한다.

“…고맙다 카드라.”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물음을 던지는 민욱을 보며 현성이 자신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흔든다.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덕분에 벗어났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이런 이야기 니한테 하는 것도 좀 웃긴데… 암튼 그랬다. 너무 놀래가 나도 모르게 도망칬다가… 뒤늦게 다시 온기다.”

그 말에 민욱이 흐음… 하고 생각하다 ‘그거 아주 개자식이었던거네!’ 하고 단순 명쾌하게 결론을 내린다.

“그럼… 진짜 죽어도 될 만한 인간을…”

“그래가 내 궁금한 게 생깄는데… 나는 머리 나빠서 잘 모르겠고… 니는 머리 좋잖아.”

죽어도 될 만한 인간. 그 말을 내뱉으려던 민욱이 아직도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성의 앞에 그 말을 던지긴 뭣하다 싶었던지 말을 삼키는 동안 현성이 그에게 물음을 던진다.

“…죽어도 되는 사람이 있는기가…?”

그 물음에 민욱이 무어라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끄응… 하고 그를 바라본다. 그저 이야기 몇 마디 하러 왔다가 그런 물음을 받을 줄은 몰랐기에 그가 ‘그거… 난 말이지…’ 하고 생각을 정리하다 힐끔 다시 현성을 바라본다.

“그런 거면… 우리 아빠, 엄마도 죽어도 되는 사람이었나… 그 생각 때문에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진짜 우에 해야 되는지.”

동갑내기. 하지만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온 그의 한숨에 민욱이 쓴웃음을 짓는다. 현성을 무척이나 답답하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답답한 것은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훈수 두는 일이라고, 그 입장이 되어보질 못했기 때문에 그리 쉽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답답한 와중에 이렇게 버티고 서있는 그 모습이… 그런 와중에도 엇나가지 않고 바른 모습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그 날 이길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고.

“그거랑은 다르잖아… 너희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신지 몰라도 그건 니 책임…”

방송에는 나오지 않은 부분. 문득 민욱이 그를 위로하려다 그가 살며시 고개를 흔들자 순간 할 말을 잃고서 ‘아…’ 하고 멈칫 한다. 위협적으로 보이는 화상 자국이 4살 때인가, 5살 때인가 입은 상처라던 인터뷰가 기억이 나자 혹시 그때가 아닌가 유추할 뿐이다.

턱 골절도 막지 못한 그의 말을 막아버린 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짓는다. 혜주와 이야기 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들었던지 그가 참 이상하다… 생각하며 이내 쓴웃음을 옅은 미소로 바꾸어 나간다.

“답답하제…? 나도 그렇다. 당장에 막막한 게 너무 많은데… 차라리 내 아무도 모르는 데 어느 날인가 뚝 떨어져가 숨어서 살고 싶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와중에 책임져야 할 일들. 그 갑갑한 마음을 민욱에게 털어놓자 민욱이 굉장히 어색한 얼굴로 ‘그, 그래…’ 하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한 동안 말 없이 두 사람이 벽에 기대어 있다가 민욱이 ‘야…’ 하고 그를 부른다.

“와…?”

어색한 정적 때문인지 현성이 다시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자 민욱이 ‘그냥, 새꺄.’ 하고 픽 웃음을 터뜨린다. 이내 아야야 하고 턱을 붙잡는 그의 모습에 현성이 ‘와 카노… 이거…’ 하고 옅은 웃음을 짓는다. 뭔지는 몰라도 지금 이게… 친구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괜시리 마음만은 편안해진 듯 말이다.

“근데… 니 여까진 와 왔는데…?”

그리고 현성이 그를 향해 물음을 던진다. 아직까지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 물음에 민욱이 ‘별 거 아니야.’ 하고 어깨를 으쓱한다.

“나 학교 휴학했다.”

“…의대…?”

“어.”

의대생 파이터 타이틀을 포기한 듯 그의 말에 현성이 혹시 자기 때문인가 하고 주춤하며 그를 바라본다. 물론 싸움에… 응당 민욱이 져야 할 책임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현성의 눈빛에 그가 ‘넌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냐?’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여기선 쪽 팔려서 학교 못 다니겠고… 미국 가려고.”

추운 듯 코를 훌쩍이며 그가 이야기 하자 현성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한 1년 공부해서 SAT 시험치고 미국에 있는 대학 들어가서 졸업장 딸 거야. 뭐… 니 말대로 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는 거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반인에게 실신 KO를 당했단 것은 격투가로써의 커리어가 산산조각 났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그 말에 현성이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신경이 쓰이는 듯 ‘맞나…’ 하고 고개를 숙이자 민욱이 ‘미안하냐?’ 하고 물음을 던진다.

“…그 정돈 아니고.”

가식 없는 그 대답에 민욱이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턱을 붙잡는다.

“미안하면… 야. 나중에 정말 진지하게 우리 한 번만 더 싸워 보자.”

그리고 그가 턱을 바로 하고 한결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왜?”

익히 말했다 시피 싸움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현성이 그럴 이유가 없다는 듯 물음 아닌 물음을 던진다. 싫은 기색 가득한 그 모습에 민욱이 ‘내 존심 때문에.’ 하고 웃음 짓는다.

“싫으면 안 그래도 상관없고. 근데 왠만하면… 다시 한 번만 더 붙었으면 좋겠다. 그땐 제대로.”

전처럼 굳이 억지로 권하진 않는다는 그의 말에 현성이 대답 대신 한숨과 함께 다시 하늘을 바라본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 지 몰랐다. 그저 다시 또 갑갑하고 답답한 기분에 현성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민욱이 됐다는 듯 그의 팔을 툭 친다.

“누가 당장 답하랬냐. 그냥 그렇다고.”

그 말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이에 내리 깔린 어둠이 더 깊어지자 민욱이 할 말은 다했다는 듯 그를 바라본다.

“아마… 이번에 지선이 누나랑 만나면 엠파이트 오형석 대표랑 같이 나올 거야. 한 번 잘 생각 해봐라. 정말로.”

아마… 그 역시도 현성이 그 세계로 뛰어들기를 원하는 눈치다. 그 말에 현성이 아직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든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지만… 결국 그를 원하는 곳은 ‘주먹’과 관련된 곳 밖에는 없다.

“그럼 간다. 출근 잘 해라.”

얼얼한 턱을 어루만지며 민욱이 작별 인사를 한다.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에 현성이 이전에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악의는 느낄 수 없는 게 참… 신기하다 생각하며 ‘그래…’ 하고 대답을 하곤 작은 한숨을 내쉰다.

“…격투기…”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마음이 한 결 편안해진 만남이었다. 어쩌면 그 생각만큼… 이 세계가 나쁜 것만은 아닐지 모르겠단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 정도로 말이다. 아마 민욱과의 만남이 그러했다면 다시 만난 그 아이와의 만남도 나쁘지만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옅게 가지고는 현성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민욱과는 반대로… 가게로 걸음을 돌린다. 한 번쯤은 김관수 관장의 체육관을 가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 작품 후기 ============================

대리만족물 아닙니다. 그냥 이야기 입니다. 재미 있으면 보면 되고, 재미 없으면 안 보면 되는 그냥 이야기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