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회 - 괴물
‘전설의 주먹이 프로 파이터를 실신 시키다…!’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대박이었고, 놀라운 일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반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무래도 방송 자체가 공중파가 아니라 케이블 방송이었고, 남성들을 위한 채널이다 보니 일부 팬 사이트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대체로 대중들은 무관심했다.
더불어 먹고 살기 바쁜 현성에게는 실질적으로 체감하기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던 일이었다. 그도 그런 것이 아직까지 격투기는 비인기 종목이었고, 그것을 즐기는 매니아 층에서도 케이블 방송을 굳이 꼬박꼬박 챙겨보는 사람들은 없었기에 큰 이슈가 되진 않았다.
다만… 그나마 수 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의 방송을 보고, 그의 사연을 알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응원의 목소리를 높이거나 돕고 싶다는 이야기들을 하며… 그들끼리의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인터넷과는 거리가 먼 현성이다 보니 방송 이후에도 그렇게 크게 달라진 것들을 느낄 수 없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것이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다른 말로는 우려했던 만큼 별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누리며 안도하는 현성이었다. 물론 내심 서운한 감도 있긴 했지만.
허나 만약에 그것이 정말로 큰 이슈가 되어서 모든 것을 다시 뒤집어 낸다면 억울함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나 그 다음에 두려워지는 게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장에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테니까.
사람이란 무릇 뭔가를 기대하고, 바라게 되면… 그 결과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기도 했다. 이렇게 뭔가가 크게 뒤바뀔 수 있는 선택에서 기대란 당연히 큰 몫을 가지기 마련이었고, 그 기대가 빗겨나가게 될 경우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실망감과 좌절감이 뒤따르기도 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바로 그 헛된 기대가 스스로를 망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무력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런 탓인지 별 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던 현성이 되려 안도하며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아주 현명한 선택인지도 몰랐다. 물론 아주 기대하지 않았다 부인할 수는 없기에 씁쓸한 맛이 맴돌긴 했지만 쓰디 쓴 블랙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같이… 그 역시도 인생의 쓴 맛이라면 입에 물릴 정도로 경험하다 보니 그게 그렇게 입맛에 거슬리는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후우…”
익숙한 일인 마냥 현성이 달라진 것 없는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 눈을 뜬다.
“아우…”
그 와중에 그가 실질적으로 달라졌다 느끼는 일이 있다면 바로 그것일 것이다. 기지개를 쭉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현성이 오른다리가 아직도 시큰한지 인상을 찌푸린다. 민욱에게 당했던 로 킥이란 것이 얼마나 아프던지 시일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의 다리는 완벽하게 회복이 되지 않았다. 보라색 피멍은 빠졌지만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절름발이 마냥 걸음을 옮기며 현성이 쓴웃음을 짓는다.
“…이기 언제까지 이캐야 되노…”
금방 나을 줄 알았던 것과 달리 로 킥을 통해 입은 데미지가 잘 풀리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일 특성 상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전히 생업이 달려 있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고, 결국 그 당일 하루를 쉬고 다음날부터 출근을 강행한 현성이었다.
견디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다 보니 그게 못내 걸리는 듯 ‘다리야, 좀 나사라…’ 하고 그 날 이후부터 습관이 된 듯 세면대에 다리를 올리고 현성이 허벅지를 마사지 한다.
꾹꾹 누를 때 마다 아직도 다리가 아파와 절로 인상이 구겨지곤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풀어주는 것이 뭉쳐 있는 근육이나 상처를 풀어주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허벅지를 주물러 주던 그가 조금 힘에 겹단 생각에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바라본다. 딱히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아진 것은 없단 생각에 눈을 뜨면 항상 막막하단 생각이 먼저다.
“…내는 언제 잘 되노…?”
쓴웃음과 함께 거울을 바라보던 현성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그 언제를 참 기약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내심… 아직은 또 아닌 것 같다는 그 생각이 그 발목을 붙잡기도 했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던 그가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서 조금 덥수룩해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이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진다. 이내 길러서 얼굴을 가리고 다닐까 생각하다 오히려 그 꼴이 더 우스울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던지 현성이 다시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이내 그가 다시 웃음 짓는다. 그래도… 요즘은 다른 날들보다는 훨씬 더 지내기가 편하고 좋았다. 방송 때문도 있겠지만 그 사정을 알게 된 가게 식구들만큼은 그를 대함에 있어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아마 방송의 힘이란 것이 크진 않아도 그 일상 면에서의 것들을 조금씩 다르게 해줌으로써 충분히 그 효력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일을 하러 가는 것도 처음엔 너무 힘들고 외로웠지만 이젠 그런 것이 사라지다 보니 기분만은 개운한 듯 그가 일찍 나가서 머리나 자르고 출근해야겠다 생각하며 세수를 시작한다. 간단히 얼굴과 머리를 씻고 나온 현성이 수건으로 차가운 물을 닦아내는 동안…
-부르르…
월급을 타자마자 장만한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그 소리에 머리를 닦던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조금 설레는 기분으로 걸음을 옮긴다. 딱히 연락 올 곳이라고 해봐야 몇 사람 안 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준단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것도 시간이 지나서 무던해질 테지만 최소한 지금은.
“아…”
이내 핸드폰을 보던 그가 머리를 닦던 수건을 목에 걸친 채 휴 하고 한숨을 내쉰다.
“…이 아저씨 참…”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매번 그때 보았던 김관수란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딱히 그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지만 매번 좋은 하루 보내라 안부 문자를 넣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고 신경이 쓰이는지 현성이 한숨과 함께 그 문자 메시지를 바라본다.
좋은 하루 보내란 문자 메시지에 현성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하고 머뭇거리다 이내 메시지를 끄고 만다. 나쁜 사람이 아닌 것은 알겠고… 또 이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만 연락이 오는 것이 부담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또 뭐라 나무랄 수도 없고, 매번 연락이 성가실만도 하다만 대체 자기가 뭐라고 이렇게 챙겨 주는 게 은근히 고맙기도 하다. 굉장히 난처한 듯 그가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쓴웃음을 짓고 만다.
“…깡패보단 이기 나을 수도 있을낀데…”
당장에 불러주는 곳이 김관수 관장 아니면… 박재운과 창호가 있는 조직 밖에 없다 생각하니 다시 또 갑갑해진 모양이다. 방송이 이틀 전에 나갔기 때문에 따로 연락이 오진 않았지만 그 방송을 창호나 재운이 보았다면 조만간 가게로 찾아올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던지 현성이 ‘그런 일은 없어야 할 텐데…’ 하고 초조한 얼굴로 핸드폰을 바라본다.
극적인 변화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만… 그래도 뭔가 상황이 나아지면 좋을 텐데. 현실이란 게 항상 그렇다. 드라마나 영화 같을 수는 없겠지… 고개를 흔들며 다시 현성이 핸드폰을 든다.
“…한 번 가보기나 해볼까…”
선원이 되는 것도 아무래도 쉽지가 않은지 혹시나 해서 한 번쯤… 하는 생각이 동한 듯 그가 물끄러미 핸드폰을 다시 보다 취소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메시지가 왔다는 표시가 다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방금 온 것 말고 그가 잠이 들었을 때 온 메시지가 따로 있는가보다 하는 생각에 현성이 핸드폰 화면을 터치해본다. 아직도 이게 신기한 듯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가 화면을 눌러 보다가 또 다른 메시지가 ‘지선’에게서 온 것이란 걸 알고 화면을 터치 해본다.
“…출연료 입금…”
아마도 방송이 나갔기 때문에 그 이후에나 출연료가 입금될 것이라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었는데 그 이야길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 생긴 것에 현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금액이야 얼마 되지 않겠지만 그 부족한 생활로는 단 돈 만원이라 하더라도 감지덕지할 판이었다. 하지만 좋은 소식 뒤엔 또 안 좋은 소식이 뒤따른다고 했던가?
-…방송 이후에 반응이 엄청났어요! 아마 현성 씨는 잘 못 느끼겠지만 우리 프로그램 게시판에도 많은 응원의 글들이 올라왔고, 여기저기로 인터넷을 통해서 빠르게 확산 되고 있어요. 그래서 그 일에 대해서 조금 더 상세하게 이야길 나누고 싶어요…. 음, 다른 게 아니라 정말, 현성 씨에게 더 도움이 되고 싶어서…!
출연료를 빨리 입금하겠다는 이야기 이후에 추가 촬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현성이 휴 하고 다시 한숨을 내쉰다.
반응이 어땠는지는 도통 알 수 없지만… 추가 촬영을 이야기 하는 것을 보니 그의 생각보단 또 괜찮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로써는 딱히 그런 걸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당사자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민욱과의 싸움이 끝난 이상 더 이상은 방송에 나올 이유도, 그래야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듯 현성이 답장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망설이다 그가 이내 다시 한숨과 함께 취소키를 누르고 만다. 어차피 문자 메시지는 익숙하지도 않고 조금 더 생각을 해보고 전화를 해야겠다 마음을 먹은 듯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 수건으로 마저 머리를 말리고는 옷을 갈아입는다. 어쩐지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는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여기저기서 왠지 모르게 그를 찾고 있단 생각이 드니 기분이 묘한 모양이다.
하지만…
“추가…”
뭘 더 추가 할 게 있나…? 썩 내키지 않은 듯 그가 고개를 갸웃해보지만 딱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선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그녀는 충분히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 서빙 때문에 제대로 방송을 보진 못했지만 다운 받아 본 덕기의 말로는 보면서 울었다 이야기를 할 정도 였으니… 이전의 기자처럼 최소한 그 뒤통수를 치진 않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녀가 뭔가 더 사람들에게 그 대신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지 않을까? 대신 이번엔 이민욱 같이 누군가가 그를 도발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라 그의 선택 그 자체여야만 했다. 하지만… 다시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는 것 자체가 그로썬 그렇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단순한 콤플렉스라고 해야 할 지 마냥 쉽지만은 않은지라 그게 무척 걸리던지 현성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천천히 방을 나선다.
우선은 머리를 자르고,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만 할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혜주’나 다른 사람들과도 상의를 해보고도 싶었고. 물론 그 결정은 그 스스로가 내려야 할 문제일테지만 말이다. 머리가 복잡해지니 절로 담배생각이 났던지 현성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 든다. 편의점은 그 날 이후로 가본 적이 없었고, 딱히 ‘그 애’를 마주할 일도 없었다. 최진희라는 이름의 알바생이 아직도 야간 일을 하고 있단 것 외에는 말이다.
그 들쑤셔봐야 그 애나 자기나 별로 득 될 것이 없단 생각이 들었던지 현성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다. 물론 그의 억울함은 덜어낼 수 있겠지만… 그만큼 그 애가 가진 죄책감도 쌓일 것이다. 물론 그 역시 그녀를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로 인해서 그 사람이 죽었단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건 그녀를 탓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그가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 듯 복잡한 머리를 흔들며 모텔을 나선다. 절룩이는 다리가 거슬리던지 쓴웃음을 머금은 채 그가 모텔을 나설 때… 그 앞을 서성이던 여자 하나가 움찔하며 그를 바라본다.
“…아…”
그리고 그 여자가 그를 알아본 듯 눈빛을 던지자 담배를 막 입에 물려던 현성이 순간 움찔하며 그녀를 바라본다. 도대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마치 그를 기다린 마냥, 그를 알아본 여자는 무척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밖에 서있었던지 얼굴이 벌겋게 얼어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어쩐지 낯이 익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본 적은 없는 여자. 그게 이상하다 생각하며 현성이 그녀를 지나치려는 찰나 그녀가 그를 부른다.
“…저기요.”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심하게 떨린단 생각에 현성이 ‘예…?’ 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그녀가 말한다.
“장현성…씨 맞죠…?”
그 말에 현성이 ‘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도대체 누구지?’ 하고 의문을 품은 채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그 앳된 얼굴의 소녀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마치 뭔가에 홀린 듯 한… 그 이상한 눈빛에 현성이 왜 이러나 주춤하는 동안 그녀가 말을 잇는다.
“우리 아빠… 죽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