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회 - 괴물
“갑자기… 생각을 바꾼 이유가 뭐에요?”
실수를 인정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활로를 찾아보던 지선에게 다시 만나잔 현성의 말은 무엇보다도 반갑고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형범을 통해서 그가 ‘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된 그녀로써는 더더욱 말이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큰 덩치에 험상궂은 얼굴을 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현성이 별 이유는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흔든다.
“때려주고 싶은 놈이 있어서예.”
심플하기 그지없는 그의 말에 지선이 의외라는 듯 조금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본다. 그 눈빛에 현성이 천천히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도 이 여자 PD와는 관계가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던지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PD 선생님?’ 하고 그녀를 부른다. 그의 목소리에 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 하세요.’ 하고 미소 짓자 현성이 이건 정말 모르는 사람이나 지을 수 있는 표정이란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는다.
“…이민욱인가 뭔가 하는 놈. PD 선생님이 보냈심니까?”
그 물음에 지선이 ‘네?’ 하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뜬다. 그 놀란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뜬 현성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갈피도 잡지 못한 그녀의 얼굴이 비친다.
조금 차가워 보이기도 하고, 중성적인 느낌도 드는… 커리어 우먼의 느낌. 의욕이 앞서는 신임 PD는 연기라던가, 거짓말이라던가 하는 술수와는 거리가 먼 듯 싶었다. 이내 현성이 이민욱이 그리 행동한 것은 지선의 탓이 아니라 순전히 그 놈이 미친놈이란 생각이 들었던지 ‘아무 것도 아닙니더.’ 하고 고개를 흔든다. 갑자기 현성이 왜 그런 물음을 던지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듯 지선이 고개를 갸웃한다.
“…이민욱 씨를 만나 봤어요? 예전에 뭐… 서로 그런…”
“모릅니다. 함 물어 보이소. 대답은 가가 해줄낍니다.”
더 이상 그 이야기는 하기 싫다는 듯 그가 말을 딱 잘라 끊는다. 민욱의 이야기를 할 때 묘하게 찌푸려지는 얼굴이 무척이나 화가 난 듯 한 그의 모습에 지선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의 기분을 망쳐서 다시 촬영이 물거품이 되도록 할 순 없다 생각하곤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튼… 현성 씨가… 출연을 결정 지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땐 정말 무례했었었는데… 이렇게 다시 이야기 할 기회를 줘서요!”
살짝 미소를 띤 채 지선이 의욕을 가득 담아 대답하자 현성이 그녀는 또한 새로운 유형의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던지 어색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카면… 이제 뭐 우에 하실 겁니까. 그냥… 얘기하면 잘 알아서 해주시겠지예…? 그냥 그 놈이랑 언제 붙을 수 있는지만 알면 됩니다.”
과거 방송의 형태가 그러했기 때문에 그리 이야기 하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그의 부정적인, 그리고 어떤 의미로는 체념한 듯 한 음성에 지선이 ‘그렇겐 안 할 거에요!’ 하고 고개를 흔든다.
“여지껏 이 방송이… 단순히 권선징악이라는, 그리고 더러는 출연자들을 싸그리 무시하고 그냥 선수 띄우기 용으로 전락했다… 그런 평들이 있단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전임자 방송이구요. 지금부터는 내가 맡은 방송이니까 난 그렇게 안 할 거에요.”
후 하고 의욕을 다지는 듯 굳은 다짐을 꺼내는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예…’ 하고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한다. 김형범 대리가 아마 언론은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이란 말이 생각났던지 그녀가 필요하다면 지금부터라도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다 생각한 듯 6mm 카메라를 켠다.
그 모습을 어색한 얼굴로 바라보는 현성의 모습에 지선이 괜찮다는 듯 눈빛으로 그를 안심 시키며 ‘앞으로 며칠 간은 계속 봐야 하니까 익숙해져요.’ 하고 부탁한다는 듯 이야기 한다. 그 말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한숨을 내쉰다.
“언론을… 안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처음에 거절한 이유가 뭐에요?”
조심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현성이 당연한 것이라는 듯 그녀를 바라본다. 때마침 촬영을 하고 있는 그의 모텔 방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
누구인가 하고 고개를 돌린 지선의 모습에 현성이 ‘잠깐만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연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혜주가 ‘촬영 하나…?’ 하고 그를 보자마자 조금 발그레한 얼굴로 물음을 던진다. 이내 지선이 어색한 얼굴로 카메라를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한 그녀가 힐끔 현성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에 혜주가 ‘여자가…?’ 하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를 째려보자 현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아… 그러니까… 저는 X채널에 이지선 PD라고 하구요.”
혹시 오해 할까 지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자 혜주가 ‘예, 압니다.’ 하고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의자를 하나 끌고 와서 지선을 바라보는 방면에 의자를 두고 앉자 지선이 ‘어…’ 하고 조금 당황한 듯 현성을 바라본다.
“혹시라도 거기서 대답하기 곤란한 거 요구하거나 하면 내가 한 소리할라꼬 왔어요. 야는 바보 같아서 여자한테는 싫은 소리 잘 못하니까.”
도도한 혜주의 모습에 지선이 어색하게 웃음 짓는다. 딱히 그럴 생각이야 없다만 왠지 모르게 나쁜 년 취급을 당하고 있단 게 조금 기분은 좋지 않았던지 그녀가 혜주를 힐끔 바라보고 현성과 어떤 관계인지 생각을 해보지만 딱히 연결점은 보이지 않는다.
“여자친구…?”
그녀의 물음에 현성이 ‘아…’ 하고 움찔하며 혜주를 바라본다. 혜주 역시 그 물음에 뭐가 대답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괜시리 어물어물하는 얼굴로 홱 고개를 돌리자 현성이 ‘그냥…’ 하고 문을 닫고 침대로 걸음을 옮긴다. 곧 그 위에 살짝 걸터앉은 그가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한다.
“좋아하는… 사람이요.”
그 수줍고 어색한 대답에 지선이 ‘아…’ 하고 그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자 혜주가 ‘뭐가 그래 궁금한데요?’ 하고 툴툴 거리며 지선을 바라본다. 왠지 모르게 톡톡 쏘는 것이 귀엽단 생각을 하며 지선이 ‘미안해요.’ 하고 살짝 웃음 짓는다.
“그럼…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죠. 현성씨.”
그리고 그녀가 더 만들고 싶은 게 많고, 그 많은 것을 담고 싶은 듯 눈에서 빛을 내며 이야기 하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되는 마음에 그를 찾아온 혜주 역시 어떤 이야기를 할 지 궁금한 듯 힐끔, 힐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핀다.
“처음에 거절한 이유가…?”
다시 시작된 물음에 혜주가 그녀도 아직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어쩜 이 순간에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던지 입을 꾹 다물고 현성을 바라본다. 두 여자의 시선에 현성이 자못 부담스러운 감이 있는지 살짝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이내 음영이 도드라진 얼굴이 아그리파 석고상처럼 묵직한 느낌을 전해 준다.
“폭행치사로 소년원에 가게 됐을 때…”
그리고 그가 다시 고개를 들고 말을 잇는다. 지선이 카메라로 그 얼굴을 담으며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무척이나 느낌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뭔가 ‘작품’이 나올 것도 같단 느낌이 들었던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취재 나온 기자가 있었심다.”
그녀와 달리 그 때를 떠올리는 그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심한 듯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쓴웃음 짓는 모습은 그가 또 다른 형태로 상처를 입진 않았을까 싶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혜주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쥔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은 그런 얼굴과 모습을 하고서 그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 사람도 사건 정황 진술서 논란이 있었단 걸 알았고… 그 사람이 와서 자기한테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다 해주면 억울한 사연을 풀어 주겠다 약속을 했었심다. 그래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비록 내가 너무 과해서 사람이 죽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이유 없이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이야기 하고 싶어가 얘길 했지예. 그게 너무 빙시 같은 짓이었심다.”
쓴웃음. 그리고 울컥하는 뭔가를 꿀꺽 삼킨 채 그가 카메라 너머의 지선을 바라본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지선이 그 눈빛에 움찔하며 ‘어떤…?’ 하고 물음을 던지자 그가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다.
“극성부리는 10대 폭력. 거짓말까지 일삼는 파렴치한 범죄자. 그 기사 쓴 게 그 양반입니더.”
사람들은 본디 자극을 좋아한다. 한 순간의 짧고 강렬한 자극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기자나 언론인이란 본디 진실을 전하는 일을 해야 했으나… 그가 만났던 이는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강렬하고, 자극적이 가십’을 던져주는 것이 업이었던 모양이다. 그 말에 지선과 혜주가 동시에 그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뭔가 참 일이 안 풀려도 어떻게 이렇게 안 풀릴 수가 있는지…
“증인이 없으면 인정이 되지 않는다. 다만… 아직 10대이고 살인하려 한 의도는 없었다 판단해가 2년형 때리 받았심다. 그 기자는… 그거 하나 써놓고 다시는 안 찾아왔고요. 그러니까… 내가 이 방송 나오고 싶었겠심까? 못 믿었심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고요… 평생 꼬리표가 생겼는데.. 사람들은 내 이야길 안 들어줍니더. 그냥 생긴 것만 보고 도망치고 피하고… 들어줄 생각은 아무도 안 하니까. 그러니까 나도 이야기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든거죠. 결국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니까… 여 나오면 또… 더 못된 놈, 약도 없는 미친놈 같이 되가… 더 살기 힘들어질 것 같았심다. 내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그게 너무 힘들어서 지금도 죽겠는데 그걸 우에 감당해야 하나 하고요.”
생각보다도 현성의 말은 매끈했다. 오랜 시간 억울해 했고, 오랜 시간 괴로워했던 만큼… 많은 말들이 있어서 무얼 이야기 해야 할 지 몰라 아직도 분하고 부족한 얼굴이지만 그가 거절을 했던 이유만큼은 명확하게 알 수가 있었다. 누군가에겐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아도 그에겐 평생 달고 다닐 이름표와 같은 것. 신임 PD 지선이 그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을 뒤흔들 수도 있단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한숨과 함께 ‘그랬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어떤 연유로 다시 출연을 결정짓게 되신 거에요…?”
그리고 그녀가 물음을 던진다. 그녀는 진실을 알아야만 했고, 그 진실을 대중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그게 대중에게 관심이 없어 철저하게 외면 받는다 하더라도 그녀의 커리터에서 최소한 올바른 첫 걸음을 내딛고 싶었으니까. 그녀의 물음에 현성이 아마 이 부분만 살리지 않을까… 아직 지선을 모두 다 믿진 않는다는 듯 무뚝뚝한 얼굴로 ‘그냥요…’ 하고 대답한다.
“우에… 나갈지는 모르겠는데 이민욱이라 카는 놈이 내 찾아와서 나오라고 시비를 걸었심다. 나는 내 무시하고 깔보는 건… 어떻게든 참을라면 참는데 내 말고 다른 사람 건드리가미 괴롭게 하는 놈은 못 참심다. 뭐든 다 잘 하고 잘난 줄 아는데… 그렇다고 그걸로 다른 사람 무시하고 깔보면 안 된다는 거 가르쳐 줄낍니다. 보니까 내랑 동갑이고, 이제 의대 드간다 카던데… 공부 하는 사람이랑, 몸 쓰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그거 가르쳐 줄낍니다.”
두 사람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녀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민욱이 대구로 내려와서 그를 자극한 듯 했고, 그것은… 그녀가 아닌 그 전임 피디가 원하던 전형적인 그림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생각에 쓴웃음을 띤 채 지선이 그를 바라보자 혜주가 ‘그냥 하지 말지…’ 하고 걱정되는 듯 한숨을 푹 내쉰다. 유난히 손목의 빨간 머리끈이 튄다 생각하며 지선이 다시 두 사람의 사이에 의문을 가지지만 지금 포커스를 두어야 할 부분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혹시 이민욱 선수가 고교시절 내내 킥복싱 아마추어 대회 전적이 40전 38승 2패의 베테랑이란 걸 알고 계세요?”
프로그램 특성 상 무게를 두어야 할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민욱은 이제 20살이지만 일찌감치 프로에서도 러브콜이 올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의대에 합격해 이슈가 된 인물이다. 외모 자체도 빼어난데다 부족함이 없어 엄치아 파이터, 혹은 의대생 파이터란 별칭으로 더 유명한… 아무리 현성이 유명한 ‘주먹’이었다고 하지만 그 유명한 프로 선수를 상대로 저런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던지 지선이 힐끔 그를 바라보자 현성이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든다.
“금마는 그게 여흥거리지예? 나는 이게… 발버둥입니더. 그런 놈들은 아들이 장난이라고 개미 밟는 거 처럼 업슨 사람 우습게 알고 막 밟습니더. 근데요. 그래 다 가진 놈한테, 나 혼자 밟히는 거면 몰라도 악착 같이 지키고 싶은 거 있는데…”
이내 그가 천천히 혜주를 바라본다. 항상 의기소침하게 눈을 피하기만 하던 그가 그 순간만큼은 물러서거나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또렷하게 그녀를 바라본다. 그 강렬한 눈빛이 얼마나 든든하게 마음을 감싸오는지 절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혜주가 그를 바라보는 동안 그가 말을 이어간다. 전에 없이 강렬하고 묵직한 음성으로.
“그라믄 그건 누구도 못 밟게 할 낍니다. 아무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