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회 - 괴물
쉬는 날이라고 하지만 마냥 쉴 수만은 없었다. 일을 마치고 들어와서 평소보다 일찍, 채 5시간도 잠을 자지 못한 현성이 조금 피곤한 듯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천천히 눈을 뜬다.
“후우…”
따로 시계를 사놓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항상 약속이 정해져 있다면 그 시간보다는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다. 앞이 불투명하다보니 덩달아 몸은 항상 긴장해 있고, 그러다 보니 잠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다.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시간을 놓치지 않을까 전전 긍긍하면 다시 약속 시간보단 매번 일찍 깨긴 했으니까.
물론 그것이 약속이 있거나, 출근을 해야 한다거나 할 때에는 도움이 되는 편이었다. 긴장하고 있으니 그 시간 전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나게 되니까. 허나 매일 그런 생활이 계속 되다 보니 육체적인 피로감은 둘 째 치고, 정신적인 피로감이 물 밀 듯이 밀려오던지 눈을 뜨고도 현성이 한참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꾸물꾸물 몸을 움직인다. 침대가 비좁아 보일 정도로 큰 몸이지만 일어나기 싫어 꾸물거리는 모습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와 이래 힘드노…”
그러나 다른 게 있다면 그 어린아이는 아주 이른 나이부터 스스로 해내야 한단 것을 배운 사람일 것이다.
“아…”
어깨 위로 누군가 올라 탄 것만 같은 피로감에 기지개를 쭉 펴서 간신히 그 묵직함을 떨쳐내고는 현성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왠지 모르게 코 끝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든다. 몸도 으슬한 것이 범수가 말했던 대로 혹시 감기라도 걸린 게 아닌가 생각해 보지만 딱히 몸에는 이상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웨이터 생활을 시작하고 나선 매번 그랬고, 오늘은 보호관찰 담당자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평소보다도 잠을 더 설쳐서 그런 게 틀림 없다 생각하며 그가 화장실로 걸음을 옮긴다.
벌ㅆ 한 달 가까이 생활하고 있는 모텔은 집처럼 익숙해진 구석이 있었는데, 모텔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오늘도 어김 없이 현성이 한숨을 내쉰다. 소년원을 나와선 더 끼니를 잘 챙기지 못해서 그런지 볼이 많이 홀쭉 해진데다 피로가 쌓여서 초췌해 보이는 몰골이 평상시보다 훨씬 더 못나게만 보이는 것 같다. 가끔씩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나도 괜찮게 생긴 것 같은데 싶은 때가 있지만 아마 지금 보고 있는 모습이 현실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모습일 것이다.
화상 자국도, 초췌함도, 칼날처럼 날카롭게 날이 서 더욱 매서워 보이는 얼굴도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생각하며 그가 한숨을 내쉬고 세면대의 물을 튼다. 쏴아아 하고 흐르는 물 소리에 잠깐 멍한 정신이 팔렸다가 금방 따뜻한 온수로 손을 익히고는 점차 차가운 물로 운도를 내린다. 겨울 날에 찬 물로 세수를 하는 것이 정신이 번쩍 들게 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것보단 그 자체가 뜨거운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특히나 얼굴에 닿는 것들은 말이다.
그에게는 유난히 뜨거운 것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많았다. 어릴 때 입은 화상이나, 그의 부모님을 앗아간 화마나. 그리고 그 날의 그 끈적하고 기분 나쁜 더위 같은 것 말이다. 어쩜 선원이 되고 싶다 생각 했던 것은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현성이 적당히 차가움이 느껴지자 세수를 시작한다. 비누칠을 하고 얼굴을 어루 만지다 보니 까칠한 수염이 손 끝에 걸려 온다. 이걸 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그가 담당자만을 만나는 날이 아니니까… 하고 일회용 면도기로 슥슥 수염을 민다.
“…하나 안 하나 똑같은데…”
이내 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던 그가 비웃음 같이 씁쓸한 웃음을 남긴다. 대체 그게 뭐라고. 담당자를 만나고, 혜주를 밖에서 만난다는 생각에 기묘하게 들뜬 마음이 갑자기 또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던지 현성이 헛된 기대감은 가지지 말자 하고 고개를 흔든다.
사람을 망치는 가장 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대감일 것이다. 뭔가를 기대하게 되면 항상 실망만을 만들 뿐이고, 그래서 그는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하지 않는 법이니까. 가끔씩은 그 맘이 ‘나도 다른 사람들 처럼…’ 하고 뭔가를 바라거나 하게 된다면 스스로 무척이나 엄하게 자신에게 매질을 하기도 했다. 차라리 그 편이… 그리 크지도 않은 작은 기대조차 산산히 부서지는 것보단 덜 아팠으니 말이다.
몸을 씻고 나온 그가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서 입고 나갈 옷들을 둘러보다 이내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쉰다. 범수나 혜주 말대로 옷을 좀 사긴 사야 할 것 같았다. 웨이터로 일하면서 입는 셔츠 두어벌과 까만색 정장 바지와 청바지. 그리고 그 위로 지금껏 입고 있는 얇은 점퍼 하나.
일을 하러 갈 때 입는 옷 말곤 딱히 입을 것들이 보이질 않자 현성이 한숨을 내쉬고 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도 아직은 20살에 불과했고, 스스로를 꾸미고 싶단 생각도 가끔씩 하곤 했다. 그렇지만 현실의 여건은 그걸 전혀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 그에겐 남들보다 더 한 패널티가 있었다. 꿈도 꾸지 못 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기본은 갖춰야 하지 않나 생각하며 그가 까만 가방 안에 모아둔 팁들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다.
옷 사는데야 충분히 쓸 수 있는 돈들이라고 하지만 그걸 이렇게 써버릴까 생각하니 다시 망설여지는 모양이다. 혹시 몰라서 이 일을 그마두게 되고, 선원도 하지 못하게 되면 창호나 재운을 피해서 다른 동네로 가야 할 지도 모르는데 그때 돈이 없으면… 걱정과 불안감에 그 돈을 모아두고도 전혀 쓰질 못한 채 현성이 다시 한숨을 내쉰다. 매번 내쉬는 한숨이 얼굴을 더 망치고 있는 것 같단 생각에 또 다시 씁쓸한 기분이 밀려오지만 그런 것들이 현실을 극복시켜주진 않았다.
결국은 다시 가방 안으로 그 돈들을 집어넣고 여윳돈 5만원 정도만을 챙겨서 현성이 모텔을 나선다. 이제 겨울도 다 가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러니까 얇은 옷이나 몇 개 더 사서 안에 입고 다니자. 욕심을 포기 하고 현실을 선택한 그가 왠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으로 모텔을 나서는 동안 거리는 제법 싱그러운 기운들이 가득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저녁에 출근을 하고 새벽에 퇴근하던 그에게 정오의 거리는 무척이나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겨울날이라 날씨는 쌀쌀했지만 햇빛만큼은 따사롭고 쾌청한 날씨인지라 우울한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생각하며 현성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음을 옮긴다.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서 동성로까지 나서야 하지만 그렇게 멀진 않다. 대구 동네 자체가 그리 큰 동네는 아니다 보니 중심부까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금방 도착할 수 있었고… 다만 걱정 되는 게 있다면 이런 시간에 대중 교통을 이용한다는 건 편리함보단 거북스러움이 먼저 생긴단 것 정도. 허나 그것도 익숙해지면 별 일이 아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당연하다 생각하며 현성이 천천히 버스에 오른다. 유심히 그를 살펴보는 버스 운전 기사를 외면한 채 다시 습관처럼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벽면을 바라보고 우두커니 선다. 평일 낮 시간이라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탓에 그렇게 심하게 부대끼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이런 곳은 마음을 죄어 오는 불편함이 가득하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괴롭힌 것은 아니지만 본인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그 자신을 어느 샌가 이렇게 잡아 먹고 있었다.
-삑…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현성이 목적지에 도착하자 도망치듯이 버스에서 내리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음을 옮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대구 시내는 다른 곳보다 유난히 사람들이 많아 붐비곤 했다. 그게 그처럼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싫어하고, 두려워 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고통인지 담당자는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 그런 걸 존중해줄 사람은 세상 천지에 몇 없겠지만.
한숨을 내쉬며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기던 현성이 약속 장소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느긋하게 출발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동하는 시간을 생각지 못한 탓이 시간이 조금 지체된 감이 있었다. ‘프라하의 봄’이란 이름을 가진 카페 안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가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하던 알바생이 그를 보고 움찔하자 쓴웃음과 함께 가게를 둘러본다. 이내 그를 기다리고 있던 담당자가 그를 발견하곤 손을 든다.
소년원에서 함께 생활했던 김형범 대리가 아니라 처음 보는 담당자는 서글서글한 눈매에 살집이 통통허니 오른 30대 남자였는데, 사람 좋게 생긴 얼굴이 인상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의 손짓에 현성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게 싫어 서둘러 걸음을 옮기자 그의 곁에 있던 젊은 여자가 ‘아…’ 하고 마치 그를 알아보듯이 반가운 미소를 짓는다. 그 사실에 현성이 조금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직감을 뒤로한 채 맞은 편에 자리를 잡자 ‘반가워요, 장현성씨!’ 하고 담당자가 손을 내민다.
“앞으로 6개월 동안 한 달에 한 번씩은 이렇게 같이 데이트 할 김동진이라고 합니다.”
예의바른 그의 목소리에 현성이 ‘아… 반갑심다..’ 하고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붙잡는다. 이내 그가 힐끔 여자를 바라보자 여자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이쪽은 이지선 씨…라고 방송국 피디에요. 인사해요.”
그 순간 현성의 얼굴이 매섭게 굳는다.
“…피디라꼬요…?”
확연히 달라진 얼굴에 동진이 오해는 하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든다.
“아, 현성 씨랑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다고 부탁을 하셔서… 사전에 이야기 했는데…”
“피디라곤 안 하셨는데예.”
딱딱한 얼굴로 현성이 왠지 모르게 더러운 기분을 느끼며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 모습에 지선이 조금 당황한 듯 힐끔 동진을 바라보자 동진이 ‘일단은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하고 진정하라는 듯 손을 든다. 그 모습에 현성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튼… 우선 지내는 건 잘 지내고 있어요? 보니까… 나와서 지금…”
“모텔에서 지내고 있심다. 웨이터 일 하고 있고요.”
전화로 이야기 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하며 현성이 고개를 돌린다. 이 자리에 왜 PD가 나왔을까? 그게 너무나도 신경이 쓰이고, 기분이 이상했다.
“집은…”
“없심다. 고모 집이지, 내 집 아니잖아요.”
그 기분이 바닥을 쳤기 때문인지 서슬퍼런 그 대답에 동진이 진땀을 빼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뭐 지내는 데 혹시 불편한 거 있으면…”
“그런 거 없심다. 이야기 다 했으면 가볼게예.”
형식 상 진행하는 절차이기도 한데, 그 자리에 저런 혹을 들고 나오니 제대로 이야기 할 생각조차 사라진 모양이다. 그 가시 돋힌 모습에 동진이 ‘아, 벌써 그러시면 안 되구요!’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래도 최소한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런 거 이야기 듣고 싶으시면 최소한 옆에 저런 거는 안 델꼬 어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 화가 난 목소리에 지선이 움찔하다 ‘저런 거…’ 하고 조금 기분이 상한 듯 힐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거칠어 보이는 외모와 지금 무척 기분이 상한 듯 공격적으로 보인 모습에 심장이 쿵쿵쿵 하고 요동을 친다. 결국 그녀가 눈을 계속 바라보진 못하고 이렇게 취급 당하긴 억울한 듯 ‘저기요!’ 하고 그를 부른다.
“제가 같이 동행해서 조금 당황하신 것 같은데… 저는 그런 게 아니구요… 혹시 ‘주먹이 운다!’라는 프로그램 아세요?”
차분하게 이야기를 꺼내려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그런 거 모릅니더.’ 하고 얼굴을 피하던 것과는 달리 매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너무나도 공격적인 그 모습에 지선이 자기가 섭외를 확실히 해오겠다 호언장담을 했지만 너무 긴장을 한 듯 바짝 굳은 얼굴로 ‘저기… 그러니까…’ 하고 말을 이어간다.
“저희가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게 뭐냐하면 왜… 그… 그… 지역마다 주먹으로 유명했던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분들이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리고 또… 그 분들이 얼마나 전설이 맞는지 검증을 하는 프로그램 같은 건데…”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는지 지선이 몇 번이고 준비했던 말들이 머리를 빙빙 돌아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버벅 거리며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흐지부지 끝이 난 말 끝이 마치 잘못을 저질러 변명을 늘어놓는 아이처럼 자신감이 없자 그녀가 이게 아닌데… 하고 쓴웃음을 띤 채 그를 바라본다.
“내 어떻게 지내는지 누가 궁금하다 캅니까? 티비서 찍어 달라고요?”
무척 가시 돋힌 그의 대답에 지선이 ‘그런 게 아니라…’ 하고 고개를 흔든다.
“사람 때려 쥑이고 소년원 갔다 와서, 지금은 우에 지내고 있는지 퍽이나 궁금들 하시겠네예.”
면도날처럼 바짝 날이 선 목소리가 무척이나 위험스럽게 들리자 동진이 ‘아니, 현성씨 그게 아니구요…’ 하고 지선보다는 한결 능숙한 얼굴로 미소를 잃지 않고 중재에 나선다.
“그러니까… 현성 씨가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사연이 있잖아요. 사실 현성 씨, 처음에 사회에 적응이 많이 어려웠다 전에 전화 통화로 이야기를 했었는데… 얘기를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 이번 기회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현성 씨가 앞으로 사회 생활을 하고 적응 해나가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생각 했어요. 여기 지선씨도 그런 생각으로 현성 씨를 찾아온거지 뭐, 그게 범죄 다큐멘터리나 그런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좀 진정 하세요.”
두 손으로 동진이 현성을 진정시키는 동안 그가 식어버린 차가운 눈으로 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왠지 모르게 더러운 기분이 엄습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뭔가 몸이 피로하고 기분이 별로였다 싶다가 이 일로 인해서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방송국 피디가 그를 촬영하길 원한다. 무엇 때문에?
“내 빙시 아입니더. 구라치지 마이소. 나와봐야 내 나쁜 놈이고, 내랑 싸울 놈만 착하고 멋진 놈이겠지예? 내 같이 생긴 놈이, 못된 짓 까지 해왔으니까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까불까불 거리다가 반듯하고 잘난 아들한테 직빵으로 깨지고 무너지는 거 찍고 싶은 거잖아예? 내 모를 줄 압니까?”
소년원에 있을 때 그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는 듯 현성이 차가운 눈으로 지선을 노려 본다. 모르지 않았다. 단지 모르는 척 했을 뿐. 그 말에 당황한 지선이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하고 해명한다.
“저희가 연락을 하면서 김형범 대리님이라고 현성 씨랑 친했던 분 이야기를 들어 봤는데 현성 씨가 그런 게… 좀 사연이 있다고 하셔서! 그래서… 그걸…”
그러나 그가 이야기 했던 것이 이지선 PD가 그렸던 핵심 그림이었고, 그 그림을 영락없이 들키고 나자 수습이 안 되는 모양이다. 우물쭈물 지선이 변명처럼 늘어놓는 말에 현성이 더 이상 화를 내는 것도 무의미하다 생각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다.
“내 빙시 아이라 안 캅니까.”
그 목소리에 지선이 미안함마저 느끼며 ‘미안해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요…’ 하고 서울말씨로 사과를 하다. 그 말이 또 ‘그 애’의 말처럼 들려온 듯 현성이 공허한 눈으로 ‘됐심다. 괜찮심다.’ 하고 고개를 흔든다.
“내 같은 거 한테 뭐 바라겠심까. 그냥… 난 사람 같이만 대해줘도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게 안 되나 보네예. 그런 데 죽어도 안 나갑니다. 다시 묻지도, 찾아오지도 마이소. 죽어도 안 합니다.”
완강한 그의 거절에 지선이 섭외를 하는데 완전 큰 실수를 범했다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다. 최소한 그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을 하고 접근을 했어야 했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던 신임 피디가 송구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는 동안 동진도 현성이 그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단 생각에 ‘미안해요…’ 하고 사과 한다. 그러나 더 이상 현성은 말이 없다.
“…더 할 말 있심까?”
이런 상태론 확인 해야 할 것들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겠단 생각에 동진이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곤 ‘전화로 나머진 이야기 할 게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간신히 마음 잡은 사람을 흔들어 놓는 게 그의 일이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마음 잡은 사람들이 다시 그 일을 하지 못하고도록 막는 사람이니까. 오늘은 큰 실수를 저지른 게 틀림 없다 생각하며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현성이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카페를 나서는 뒷모습이 무척이나 외롭고 고독해 보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선이 ‘하아… 어떡 하면 좋아요…’ 하고 죄책감을 느끼는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인다.
“…저 친구가 그렇게.. 안 좋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네요. 그래도 예의 바른 친구라서 얘기는 좀 들어볼 줄 알았는데… 잘 못 생각했어요.”
동진이 한숨과 함께 머리를 긁적인다. 그 모습에 지선이 ‘어쩔 수 없죠…’ 하고 천천히 고개를 흔든다. 그는 그녀가 생각했던 대로 곰처럼 큰 덩치에 무척 무서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서운 용모와 달리 무척 여린 속이 방금 그녀와의 만남으로 인해서 아주 깊은 상처가 생긴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좋은 소재다 들뜬 나머지 너무 경솔했단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자 지선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제대로 사과를 해야겠어요!’ 동진을 바라본다.
“예? 안 그러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아니요! 그래도 할 말은 해야죠! 내가 저 사람 기분 상하게 만들었으니까, 미안하다고 이야길 해봐야죠.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프로그램의 존망과 커리어에 집착하다보니 생긴 사태가 틀림 없었다. 그게 그녀의 본심은 아니었기에 지선이 성큼성큼 현성의 뒤를 따라 나선다. 당찬 신임 피디의 모습에 동진이 ‘매력 있으시네…’ 하고 호감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홀로 남아 커피를 들이킨다. 그 사이에 밖으로 빠져 나온 현성이 큰 키만큼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어느샌가 저만치 멀어진 모습을 발견하곤 지선이 ‘저기요!’ 하고 그를 부르며 뒤를 따라 달려간다. 편안하게 신은 운동화와 스포티한 패션이 단발 머리와 함께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그녀의 부름에 현성이 힐끔 고개를 돌린다.
“…미안해요. 정말 그럴 생각은…”
“괜찮다 안 캅니까.”
“하나도 안 괜찮잖아요? 그냥 껍데기로 사과만 하는 거 아니라구요. 그쪽 기분을 하나도 생각 못 했으니까… 정말 미안해서 사과 하는 거라구요.”
그렇게 꼬인 모습으로 받아들이지만 말아달라는 지선의 목소리에 현성이 조금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가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로 ‘진짜 정말 미안해요.’ 하고 사과하자 현성이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얼떨떨한 얼굴을 하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 괜칞심다.”
그리고 그가 뒤돌아서서 다시 걸음을 옮기자 지선이 ‘우…’ 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그가 정말로 그녀의 사과를 받아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미안한 느낌이 사리지지 않고 있었다.
“…장현성이라고…”
얼굴이 화상이 난 큰 키와 덩치, 그리고 섬세한 마음을 가진 경상도 남자. 분명히 그가… 헛으로 그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지선이 뒤돌아 서며 핸드폰을 꺼낸다. 곧 그녀가 통화 목록에서 ‘김형범 대리’를 찾아서 다시 한 번 통화 버튼을 누른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다시 멀어진 그 뒷모습을 힐끔 바라보곤 전임 PD와는 ‘다른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살려 보겠다 다짐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