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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14화 (14/281)

- 14 회 - 괴물

밤은 안락과 환락이 오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긴 밤의 끝을 알리는 어슴프레한 새벽은 누구에게나 피로할 시간.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에 많은 피로감들을 느끼겠지만 아마 그 시간에 가장 피로한 사람들은 그 시간에 막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밤의 기운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사람의 몸을 축 늘어지게 만드는 요상한 힘이 있었으니까. 현성 역시 마찬가지인지 가게 뒷정리를 마치고 나서며 조금 나른한 기운에 목을 양쪽으로 풀어 보며 적막한 거리를 바라본다.

“…아직 어둡네.”

신년이라 연초에 반짝 하던 장사도 다시 불경기와 더불어 일찍 끝이 나 주변이 무척이나 어둡다. 겨울 밤의 쌀쌀함은 어둠이 가져오는 모양인지 유난히도 새까만 밤에 선명히 대비를 이루는 네온사인들도 불이 꺼진 지 오래다. 마치 이 순간만큼은 모든 도시가 잠이 들어 버린 듯 어두운 적막감 속에서 정말 몇 안 되는 간판들만 겨우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게 따스해 보인다 거나 끌린다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저 이 시간까지도 버티고 있어야만 버틸 수 있나 하는 씁쓸함 하나 뿐. 그 불빛들 가운데 유난히도 밝고 선명한 편의점의 빛을 바라보던 그가 휴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쉰다.

새하얀 입김이 뻗어 나와 담배연기 마냥 어두운 밤 하늘을 수놓는다. 자욱한 안개나 구름처럼 잠깐 모습을 드러낸 입김이 사라지고, 그 안에 꾸벅꾸벅 조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인지 모를 ‘그 애’의 모습이 얼핏 비친다. 그 애가 나이가 몇인지는 몰라도 당시에 교복을 입고 있던 것으로 보아선 현성과 비슷한 또래일 것이다. 이 시간까지 일을 해야 할 만큼 그녀 역시 사정이 좋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현성이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녀의 얼굴이, 목소리가 자꾸만 귀를 맴도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미움의 대상이기도 했고, 후회의 대상이기도 했으니까. 못 본 척 하고 넘어갔더라면 하는… 비겁하지만 현실적인 마음. 그리고 뭐라도 한 마디만 해줬더라면 하는 서운한 배신감. 물론 지금은 그 모든 것에 초탈할 수는 없지만 크게 연연치는 않고 있다. 그 생각으로 현성이 그 일은 연연하지도 말고, 매달리지도 말자 하고 고개를 흔들어 애써 생각을 떨쳐내곤 얇은 옷이 조금 추운 듯 팔짱을 낀다.

물론 지척에 숙소가 있어 남들보다는 훨씬 빨리 퇴근이야 하겠지만 그래도 지켜보는 사람은 마음이 그렇게 편안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그가 입구에서 나오지 않나 기다리고 있는 동안…

“닌 옷 그거 밖에 없나?”

범수와 함께 가게를 나서며 혜주가 그에게 물음을 던진다. 아가씨들이 일찍 퇴근을 하고 웨이터들이 뒷정리를 하는 시간까지 남은 그녀가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범수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아… 예.”

“팁 받아서 뭐 하는데? 옷 하나 사 입어라!”

괜시리 까칠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현성이 ‘괜찮심더.’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혜주가 흥 하고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문을 잠그고 나오는 범수가 ‘보는 사람이 추우니까 그렇지!’ 하고 목소리를 더한다.

“진짜 하나 근사한 거 사 입어라, 현성아. 아무리 가까워도 그러다가 감기 걸리고 니 몸 축나면 니만 고생이다.”

까칠한 혜주와는 정반대로 자상한 범수의 목소리에 현성이 왠지 두 사람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아직 우에 될 지 몰라가…”

항상 그렇듯 그에게는 뚜렷한 미래란 것이 없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어떻게 변화 할 지 모르는 상황이라 당장 돈을 그런 데 쓸 수는 없다 생각한 것인지 끄덕이는 고개와 달리 말은 절대로 사입지 않을 것만 같다. 그 모습에 범수와 혜주가 조금 안타까운 듯 힐끔 그를 바라보자 현성이 ‘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 하고 고개를 숙인다.

“안 피곤하면 가가 술이나 한 잔 할래?”

그러 그를 조금 뚱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혜주가 인사 대신 술이나 한 잔 하지 않겠냐 물음을 던지자 현성이 ‘예?’ 하고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본다. 범수 역시 혜주가 이런 적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지 신기한 눈빛으로 그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본다.

“원래 오늘 범수랑 한 잔 할라 그랬는데, 니 뭐… 또 궁상 떨까봐!”

돈을 벌면 써야지 하고 투덜거리는 그녀의 말에 현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괜찮심다…’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야, 그냥 누나가 먹자 그러면 같이 가자 마시는 거다! 니 혜주 누나랑 같이 술 마시는 거 보통 일 아니데요! 다른 애들한테 자랑해도 될 정돈데!”

범수가 ‘튕기지 말고 같이 가자!’ 하고 이야기 하자 혜주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자부심 있는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오늘 누나 왜 이렇게 오래 있었어요?”

“왜 내 오래 있으면 안 되나?”

까칠한 혜주의 목소리에 현성이 ‘아니요.’ 하고 고개를 흔든다. 곧 혜주 대신 범수가 ‘오늘 내랑 술 한 잔 하기로 약속 했었거든!’ 하고 씩 웃으며 대신 대답한다.

“기다린다 그래도 얼마 안 기다렸잖아. 금방 끝나가…! 맞죠, 누님?”

“흥! 여자 기다리게 하는 남자 최악이다!”

“에이, 누나! 그건 아니죠! 여자 아들 맨날 약속 시간보다 늦게 나오던데.”

“난 안 그렇거든?”

다시 도도한 얼굴로 혜주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자 그 도도한 모습에 현성과 범수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곤 혜주가 두꺼운 오리털 파카나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자신과 달리 얇은 옷의 현성이 신경 쓰였던지 ‘빨리 가자!’ 하고 목소리를 높인다.

“잠깐 편의점에 좀 들어갔다 가자! 내 담배!”

그녀의 목소리에 범수가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른다. 하지만 편의점은… 아마도 현성에겐 들어가기가 무척이나 껄끄러운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 말에 현성이 ‘저는 밖에서 기다릴게예.’ 하고 대답하자 혜주가 살짝 인상을 구긴다.

“니 뭐 추운 거 좋아하나? 잠깐 들어오기 힘드나?”

오해가 있는지 혜주가 예전처럼 그를 쏘아붙이자 현성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흔든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얼핏 보이는 실루엣이 분명히 ‘그 애’가 틀림 없었다.

“…그냥…”

“그러고 보니까 니 담배 심부름도 딴 아들한테 부탁 했더만? 야, 귀찮아도 그카면 안 된다!”

담배 심부름이 귀찮아도 웨이터에겐 남겨 먹기 좋은 부분 중 하나다. 안 그래도 룸에서는 별로 팁빨을 못 올리면서 잘 가던 담배 심부름을 또 다른 녀석들에게 맡긴 것이 걸렸던지 범수가 이상하다는 듯 물음을 던지자 혜주가 흐음… 하고 가늘게 눈을 뜬다.

“니 혹시 뭐 저 안에 있는 알바생 여자라가 그카나? 혹시 니 보고 난리 부릴까봐?”

“…아니요.”

뭐라 말하기 참 뭣한 듯 현성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든다.

“됐다! 그럼 밖에 있던가!”

답답한 듯 혜주가 목소리를 높이곤 도도하게 편의점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지 ‘그 애’가 화들짝 놀라 ‘어서오세요…!’ 하고 인사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성이 한숨과 함께 돌아서선 ‘지는 담배 한 대 좀 태우고 있으께요…’ 하고 이야기 하곤 품에서 담배를 꺼낸다.

“그래, 금방 나오께.”

그리고 범수가 뭔가 이상하다 느낌은 들지만 많이 꺼리는 모습에 사연이 있으려나 하고 편의점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 안녕하세요…”

밤 시간의 근무가 익숙하지 않은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귀여운 인상의 여자 점원이 그를 반기자 범수가 꽤 귀엽게 생겼네… 하고 생각하며 ‘네, 안녕하세요.’ 하고 친절하게 답인사를 한다. 동글한 얼굴에 하얀 피부. 쌍거풀은 없지만 크고 서글한 눈매가 무척이나 순해 보이는 귀여운 얼굴이다. ATM기 앞에서 현성을 힐끔 힐끔 바라보며 궁시렁 거리는 혜주가 서구적인 얼굴이라면 그녀와는 상반되는 동양적인 아기자기한 얼굴. 혹시 현성이가 얘 좋아하나? 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범수가 힐끔 그를 돌아본다.

뒤돌아 선 채 홀로 담배를 태우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착잡해 보이는 것이…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참 이상한 일이다 생각하며 그가 호기심을 느끼고 점원 아가씨의 명찰을 살핀다. ‘최진희’라는 이름의 편의점 직원과 현성이 서로 과거에 알았던 사이는 아닐까 생각하며 그가 ‘저기요.’ 하고 말을 걸자 진희가 조금 놀란 듯 ‘네, 네…?’ 하고 그를 바라본다.

무척 평범한 용모에 성격도 좋고 잘 웃는 범수가 여자들에게 유난히 인기가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말을 걸자 무척이나 놀라서 경계하는 빛이 역력한 진희의 모습에 그가 조금 이상하다 생각한 듯 ‘아…’ 하고 말을 잇는다.

“혹시… 저기 밖에 있는 사람 아는 사람이에요?”

그 순간 혜주가 힐끔 그를 바라본다. 그녀로써는 속 간지러운 물음을 쉽게 꺼내거나 하는 성격이 못 되다 보니 하지 못했지만 저 오지랖 대왕은 속 시원하게 그 부분을 긁어 준다. 그 모습에 혜주가 덩달아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진희를 바라보자 진희가 안에 다른 여자 손님이 있어 안심한 얼굴로 힐끔 편의점 밖을 바라본다. 외로워 보이는 크고 너른 뒷모습을 하고 홀로 담배를 태우고 서 있는 남자.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들어오지도 못한 채 밖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한 모습에 진희가 ‘아…’ 하고 금방 눈물을 글썽글썽하며 그를 바라보자 대체 무슨 사이야…? 하고 범수가 힐끔 혜주를 바라본다.

“…아니요…”

죄책감이 느껴지는 그 떨리는 목소리에 순간 혜주가 머리를 스친 듯 ‘어…’ 하고 멈칫하며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왜 밖에서 저 멍청이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저러고 있는지도 알겠다는 듯 그녀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ATM기에서 돈을 찾아 걸음을 옮긴다.

“아… 혹시 아는 사람인가 해서.”

범수가 아니라곤 하지만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생각하며 고개 숙여 인사 한다. ‘네…’ 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를 힐끔힐끔 살피는 진희의 얼굴은 단순한 난감함이라기 보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이 보인다.

“말보로 레드도 하나 주세요.”

그 와중에 혜주가 찾은 돈으로 담배를 이야기 하자 진희가 ‘아, 네…’ 하고 떨리는 손으로 말보로를 찾아 혜주에게 내민다. 그리고 혜주가 내민 돈에 거스름돈을 내밀며 그녀가 힐끔 혜주를 살핀다.

“왜요? 뭐 할 말 있어요?”

눈치를 살피는 듯 소심한 그녀의 모습에 혜주가 까칠한 얼굴로 한 마디를 던지자 진희가 깜짝 놀라 ‘아, 아니요…’ 하고 고개를 흔든다.

“할 말 있으면 제 때 제대로 해요. 그런 것 때문에 누구는 인생 망칠 수도 있으니까.”

뭔가 뼈 있는 그녀의 말에 순간 진희가 크게 움찔한다. 죄인처럼 파리해진 얼굴로 ‘죄송합니다…’ 고개 숙이는 그녀. 그리고 거스름돈과 담배를 챙겨 혜주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그 당당한 뒷모습이 조금 화가 난 것 같다는 생각에 범수가 혜주 누나는 뭔가를 아나보다 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지치고 피로한 새벽 시간에 무척이나 슬퍼 보이는 진희의 모습에 그가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저 누나가 원래 좀 까칠해서…’ 하고 뒷수습을 하고는 그녀를 따라 편의점을 나선다.

“볼 일 다 봤어요?”

벌써 담배 하나를 다 태우고 빨게진 귀로 그가 물음을 던지자 혜주가 ‘그래! 빙시야!’ 하고 또 괜히 툴툴 거린다. 까칠하긴 하다만 어제는 무척이나 친절하고 귀엽다가 오늘은… 정말로 토라진 듯 보이는 그 모습에 현성이 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혜주가 흥 하고 아무 말 없이 그의 팔에 팔짱을 낀다.

“아…”

갑자기 또 왜 이러나 하고 현성이 주춤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혜주가 ‘가자!’ 하고 걸음을 옮긴다. 차가운 몸에 따뜻한 사람의 몸이 닿자 어떤 옷을 입은 것 보다 따뜻한 것 같다. 마치 그 날 함께 누워 있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범수가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누나, 나도 추운데!”

“니 팔짱껴! 오리털!”

이내 그가 미소와 함께 소리치자 혜주가 흥! 하고 까칠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 말에 범수가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두 사람을 따라서 함께 걸음을 옮기는 동안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희가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 날. 그녀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게 너무 두려워 도망쳤던 그녀는 그녀를 구해준 사람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게 되었다. 그 모든 게 그녀의 탓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상처와 함께 죄책감이 밀려오자 버틸 수 없었던지 진희가 계산대 위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만다.

“…미안해요…”

그의 말대로 이제 와선 모든 것이 늦었겠지만 말이다.

* * * * *

“…그러니까… 가가 가라고…?”

함께 술을 마시며 그간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범수가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현성을 바라본다. 좀처럼 말이 없다보니 그 과거가 어떠했는지는 정말로 알 길이 없었지만 이렇게 술 자리에서 간결하게나마 왜 그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그 편의점 아가씨와 있었던 일을 알고 나니 남아 있던 두려움보다도 가련하단 생각이 먼저 든 모양이다.

“진짜… 니는 빙시다, 빙시…!”

덩달아 속이 상한 듯 혜주가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곤 술을 들이킨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 성격이 되진 못하지만 세상엔 갑갑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특히나 현성에게는 말이다. 그녀 역시 만만찮게 복잡한 인생을 살고 있었지만 이제 겨우 20살이 된 그에겐 세상의 벽이 너무나도 험하고 높았다. 그 나이 차이 때문이었을까? 왠지 모르게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지 속상한 마음에 혜주가 연신 술잔을 채우자 현성이 ‘누나, 적당히 마셔요.’ 하고 그녀를 말린다.

“내 그래 술 안 약하거든?”

치 하고 다시 퉁명스럽게 한 마디 하며 발그레한 얼굴로 혜주가 고개를 돌린다. 취기가 오르면 제법 애교가 있게 변하는 그 모습에 현성과 범수가 함께 웃음 짓는다.

“암튼 진짜… 현성이 니도 고생 많았네. 와… 나는 진짜 그런 일 있단 이야긴 많이 들었는데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

범수가 함께 술잔을 든다. 거드는 그 분위기에 현성이 ‘그냥.. 별 일 아닙니더.’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함께 잔을 든 현성이 챙 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소주를 들이킨다. 벌컥벌컥 넘어가는 술이 이제 질릴만도 하다만 그래도 이 순간… 위로 받는 이 순간에는 그보다 달콤한 친구도 없다. 하지만 내내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혜주나 범수의 눈빛이 못내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던지 현성이 말을 돌린다.

“근데 누나는… 이제 그만 둔다면서요? 가게 새로 차린다고…?”

“내 그런 돈이 어딨노, 빙시야. 범수, 니가 이상한 소리 했제? 그냥… 이제 더 이상 이런 거 할 나이는 아이잖아. 그냥… 이 나이 먹고 계속 그러고 있으면 서글프니까.”

다시 술 잔을 채우는 혜주의 모습에 현성이 ‘누나…’ 하고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자 혜주가 ‘뭐~!’ 하고 새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걱정스러운 눈빛에 기분이 좋은 것을 감추지 못하고 후후 웃음 짓는다.

“내 나가는 거는 아직 멀~었다. 니가 더 먼저 나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러면서도 도도함을 잊지 않은 그녀의 말에 현성이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옴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현성을 바라보며 범수가 얘길 듣고 보니 더 얇은 옷이 더 걱정이 되는지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이야기를 꺼낸다.

“근데 진짜 현성아, 니 같이 쇼핑 한 번 해야겠다. 진짜 옷은 좀 사야지, 이 날씨에 그게 뭐꼬? 나는 돌아가면서 쉬어야 되니까 같이는 못 가겠고…”

“혼자 보내봐야 뭐 제대로 하지도 못 할 거고, 언제 쉬노?”

흥 하고 낚아채듯이 혜주가 한 마디를 던진다. 그 말에 범수가 오~ 하고 들뜬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자 ‘오바 하지 마라! 변태야!’ 하고 혜주가 소리를 지른다.

“내가… 야 답답해서 그런 거다! 멍청아!”

새침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외침에 범수가 ‘예~ 누님~’ 느긋한 얼굴로 웃음 짓는 동안 현성이 쇼핑은 생각도 못했던 모양인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다음주 월요일에 쉬는데예… 근데 그 날은 좀… 힘들 것 같심더.”

“뭐, 쉬면 쉬는거지 뭐가 힘든데? 승지랑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했나?”

다시 혜주가 도끼눈을 뜨고 불만스럽게 이야기 하자 현성이 ‘예?’ 하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혜주가 눈에 띠게 크게 움찔하며 ‘뭐 다른 약속 있냐고!’ 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홱 고개를 돌린다. 술기운 탓에 발그레한 얼굴에 현성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단 생각에 살짝 웃음 짓는다.

“그 날 보호 관찰 담당자랑 만나기로 해가지고예… 누가 저 만날라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시간이 어떻게 될 지 모르겠심다.”

“만날라는 사람?”

“누군지는 모르겠심더. 그냥 뭐… 상담사나 그런 사람이겠지예.”

아직까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따로 약속은 없지만 그 날은… 그리 될 것 같다는 그 말에 혜주가 흠… 하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뭐? 으레 하는 거 아이가? 대강 보고 정리해라! 알겠제?”

화끈한 그녀의 목소리에 현성이 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갑작스러운 술자리에, 갑작스러운 약속이 당황스럽긴 하지만 은근히 반가운 기분이 드니까. 특히나 혜주가 함께 한다는 것에 설렘을 느끼며 현성이 그 날 다른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마디를 거든다.

“별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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