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회 - 괴물
술기운에 뻗었다 눈을 뜨는 경우는 대체로 비슷비슷했다. 본능적으로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기 보다는 타는 듯 한 갈증이 목구멍 전체를 뻑뻑하게 채워서 물을 마시지 않고선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물에 대한 욕구가 생기기 때문에 말이다. 목구멍이 말라비틀어진 논처럼 쩍쩍 갈라지는 느낌에 현성이 침을 모아 꿀꺽 삼켜 보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몸의 수분이란 수분이 다 나가버린 듯 입술이 바짝 말라서 따갑기까지 하자 그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뜬다. 이상하게 으슬으슬한 가운데 등 뒤만은 따뜻한 것이 정말 이상하다 생각하며 으음… 하고 현성이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곧…
“…아… 춥다…”
마찬가지로 잠이 들었던지 눈을 감고 있던 혜주가 그를 바라보며 짜증 섞인 얼굴로 투정을 부른다. 그 목소리에 현성이 화들짝 놀라서 ‘어, 어어어…?!’ 하고 고개를 돌리자 혜주가 얇은 홀복에 움츠러 든 채 그가 몸을 던진 탓에 덥지 못했던 이불을 이때다 하고 뚤뚤 감자 극도로 당황한 얼굴의 현성이 깨질 것 같은 두통과 갈증보다도 더 크게 놀란 얼굴로 ‘누나…?’ 하고 물음을 던진다.
“…잘 자다 갑자기 와 일났노…”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는 혜주의 목소리에 현성이 꿀꺽 하고 다시 침을 삼키며 ‘목이 말라가…’ 하고 어색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 본다. 분명히 그가 혜주와 함께 나서서 여기까지 들어온 것은 기억한다만 그 이후론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혜주가 가지 않고 옆에서 잠이 들었단 것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더욱 더 당황한 얼굴로 현성이 그녀를 바라본다. 이내 ‘우음…’ 하고 혜주가 덩달아 잠에서 깬 듯 새하얀 이불을 덮고 ‘뭐?’ 하고 까칠한 눈빛을 보내며 바라보자 ‘아니요…’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그가 이름표도 떼지 않은 차림 그대로란 것을 기억 해내고는 별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안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간이 냉장고를 열고 생수를 꺼내든다. 벌컥벌컥 물을 마시던 그가 이내 뒤에서 들려온 ‘나도… 물!’ 하는 혜주의 음성에 이게 꿈이나 환상 같은 게 아니구나 하고 순간 콜록 하고 기침을 하며 입을 막는다.
“…집에 안 갔네요… 누나.”
“내가 니 때문에 이래 나왔는데, 이캐가 우에 들어가노!”
까칠한 얼굴로 그를 한 번 쏘아보곤 물통을 받아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을 마시는 그녀의 모습에 현성이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정신 없는 와중에 서서히 지금 상황이 눈에 들어오던지 그래도 혜주가 옆에서 그러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왜 웃는데, 변태야?”
치 하고 혜주가 물통을 내밀며 톡 쏘듯이 이야기 하자 현성이 ‘예…?’ 하고 그녀를 바라본다.
“니 어제 기억 안 나나?”
새침한 얼굴로 짓궂게 물음을 던지는 그녀의 말에 그가 ‘그, 그거는…’ 하고 주춤하며 머리를 긁적인다. 이내 현성이 그 앞에 혜주가 당겨 두었던 의자에 앉으며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하고 힐끔 그녀를 바라보자 혜주가 흥 하고 고개를 돌린다.
“취해서 은연 중에 본심 나온 거는 아니고? 니 내 그렇게 끌리더나?”
도도한 그녀의 물음에 현성이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그저 머리를 긁적인다. 박재운의 곁에서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어쩔 수 없이 몸을 맡긴 그녀를 본 순간 또 다시 무슨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그 애’를 보았을 때 처럼 뭔가가 툭 하고 튀어 나와서 주제 넘게 나서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현성이 ‘죄송합니다…’ 하고 다시 사과 하자 혜주가 흐음… 하고 그를 바라본다.
“미안하다 하는 거 보니까 진심이었나 보네!”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누나 표정이 안 좋아 보여가.”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말에 혜주가 괜시리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지만 티를 내긴 싫었던지 다시 한 번 더 크게 ‘흥!’ 하고 소리를 낸다.
“몸은 좀 괜찮나?”
이내 어제보다 무척이나 수척하고 초췌해진 그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물음을 던지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갈증은 사라졌지만 다시 머리가 지끈 거리는 두통이 밀려오자 살며시 인상을 찌푸리는 그의 모습에 혜주가 옆 자리를 팡팡 두드리며 ‘앉아 있지 말고 누워라!’ 하고 이야기 한다.
“…아, 아니요…”
“뭐 누워 있으면 내가 니 잡아 먹을 줄 아나? 기대 하지 마래이!”
새침한 그녀의 목소리에 현성이 ‘그, 그런 게 진짜 아니고요…’ 하고 얼굴까지 붉히며 고개를 흔든다.
“니 진짜 바보네. 줘도 못 먹을 놈아.”
그 풋풋한 모습이 오히려 껄떡쇠들보단 훨씬 신선했던 모양이다. 혜주가 오랜만에 자신을 사람처럼 대해주는 그의 모습에, 수줍음 가득한 소년 같은 남자의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진 채 놀리 듯 이야기 하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 그럴라고 그런 거 아니니까.”
그 말에 혜주가 순간 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니 내 싫어서 자꾸 그런 소리 하는 거가?”
“예?”
알다가도 모를 게 여자의 마음이라고 했던가? 이번엔 자꾸 그런 소리를 하니 싫다는 듯 혜주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현성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조금 가까워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그녀에 대해서는 그가 달리 알고 있는 바가 없었다. 그저 범수의 말대로 까칠해 보여도 사실은 속은 여리고 다정한 사람이었다는 것 밖엔…
하지만 그걸 떠나서 여자란 존재 자체가 그에겐 익숙치 못했다. 과거 함께 어울린 적이 있다 하더라도 얼굴에 난 상처와 외모 때문에 스스로 벽을 쌓고 선을 그어 놓고서 도망치듯이 물러서 있던 것이 현성이었으니까. 그런 탓에 좀처럼 여자들과는 이야기를 나눠본 일도 잘 없었고, 여자들도 무서운 용모와 분위기를 가진 그에게 접근해오지 않았다. 소년원에 들어가선 더욱 더 볼 일이 없었고 말이다.
“…그냥 입 다물고 와서 누워 있어라! 뭐 누우면 내한테 무슨 짓이라고 하고 싶을 것 같아서 못 눕나?”
그래서 더욱 더 미스테리한 혜주의 목소리에 현성이 우물쭈물하며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르자 답답했던지 혜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당긴다. 그녀의 힘이야 아주 우습다지만 이상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현성이 미끄러지듯이 다시 침대에 눕자 혜주가 누워있던 자리에서 향긋한 향취가 올라온다. 그 냄새에 다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그가 바짝 굳은 얼굴을 하고서 입을 꾹 다물자 혜주가 그의 눈 앞에서 그를 마주보며 자리를 눕곤 흥! 하고 입술을 삐죽이며 이야기 한다.
“추워서 카는 거다. 착각하지 마래이.”
“…예.”
착각 하래도 하지 않겠다는 듯 현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혜주가 이불을 덮고 정말 추웠던지 오들오들 떨며 그에게로 다가오자 현성이 ‘아…’ 하고 어색한 얼굴로 몸을 돌린다.
“니! 여자한테 함부로 등 보이는 거 아니거든!”
그 말에 현성이 움찔하며 멈칫하자 혜주가 ‘여자를 하나도 모르네!’ 하고 그를 바라본다. 현성이 이 순간이 무척… 가슴이 터질 것 같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불편한지 ‘얼굴 보면 불편 할까봐…’ 하고 움츠러 들자 혜주가 ‘뭐!’ 하고 따지듯이 턱을 들이댄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남자가 여자한테 등 돌리는 거 여자한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줄 아나? 택도 없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가슴팍에 다시 얼굴을 기대자 현성이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는 것을 느낀다. 다시 목구멍이 메말라 버린 것 같은 기분에 꿀꺽 하고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대체 혜주가 왜 이러나… 하고 의문을 가져 보지만 답은 떨어지지 않는다. 너무 심장이 거칠게 뛰어서 온 몸이 화끈 거리는 기분에 그가 이 어색한 정적을 어떻게든 깨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자 혜주가 샐쭉한 웃음과 함께 다시 눈을 뜬다.
“니 어색해 죽을라 카네. 아다 떼달라 캐놓고.”
여전히 장난을 치는 듯 짓궂은 목소리에 현성이 뭐라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미안 합니다… 누나…’ 하고 다시 사과를 꺼낸다.
“뭐, 나름 귀엽네! 덩치에 안 맞게 내한테 쩔쩔 매는 것도!”
그의 불편함이야 어쨌거나 난 이 상황에 만족한다는 듯 악동 같은 웃음을 띤 채 혜주가 그를 바라보자 현성이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내심 7살 많은 그녀가 나이를 거꾸로 먹은 듯 무척이나 귀엽다 생각하며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누나… 왜 난방 안 틀었어요…?”
이내 현성이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방의 냉랭함에 물음을 던진다. 그 말에 혜주가 ‘내가 이거 뭐 어떻게 할 줄 알고…!’ 하고 투덜거리며 그를 올려다 본다.
“바보야! 니가 하고 뻗어야지…! 내 이런 거 어떻게 아노…! 여기는… 처음은 아니지만… 아무튼!”
아마 기계 다루는 데엔 재주가 꽝인 모양이다. 괜히 성질부리는 모습이 오히려 귀엽다 생각하며 현성이 어색한 웃음을 짓곤 ‘난방 좀 돌릴게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혜주가 유심히 그 모습을 바라본다. 무척이나 간단하게 그가 버튼 하나를 꾹 누르고 방에 온기를 돌리자 혜주가 억울한 듯 인상을 찌푸린다.
“우리 집이면 하는데 여기 우리 집 아니라서 그렇다!”
변명치고는 궁색한 감이 있었지만 ‘어디 있는지 몰라서 못 한 거니까…!’ 하고 당당하게 소리치는 모습에 현성이 그저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 와중에 다시 한 번 갈증이 밀려와 그가 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동안 혜주가 ‘아직 춥다!’ 하고 다시 옆자리를 팡팡 두드린다. 현성이 어색한 얼굴로 다시 살며시 그 자리에 앉자 혜주가 ‘등!’하고 그의 너른 등을 찰싹 때린다.
그 손길이 왠지 낯설지 않은 것 같다 생각하며 마지 못해서 현성이 다시 자리를 잡자 혜주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본다. 깨어나서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잠이 모두 달아나버렸던지 그녀의 시선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현성이 ‘왜 자꾸…’ 하고 힐끔 그녀를 바라본다.
“못 생겨서 쳐다 본다 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야 있지만 그것도 이렇게 정면으로 묵직허니 치고 들어오니 오히려 웃음이 먼저 나는 모양이다. 현성이 ‘그렇지예…’ 하고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혜주가 대답 대신 그의 팔을 끌어 안는다. 얇은 홀복 너머로 느껴지는 두 가슴의 야릇한 감촉에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굳어가자 혜주가 ‘있잖아, 니…’ 하고 말을 건다.
“다음부터는 그카지 마래이… 내니까 그래도 암 것도 안 했다 카면 그렇다 할 건데 다른 애들 같았으면 소문 돌고 난리 났다. 이 바닥 그런 거에 되게 민감 하거든. 니가…”
놀리던 때와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 하던 혜주가 순간 말을 멈춘다. 그리고 다시 그를 힐끔 바라보며 그녀가 말을 잇는다.
“니가 여기 떠날라 카면 별로 상관은 없겠지만.”
그 목소리가 순간 무척이나 슬프게 들렸단 생각에 현성이 힐끔 그녀를 돌아본다. 때마침 고개를 숙이던지, 혹시나 그의 눈을 피한건지…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현성이 ‘…예.’ 하고 다시 천장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의 거취는 아직도 명확히 결정된 바가 없었다. 선원이 꿈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나마 할 만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박재운과의 만남 덕분에 더욱 더 절실해졌다. 최소한 이 대구 바닥을 벗어나서 그의 덩치와 외모를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야만 했는데 당장에 그것들을 떠올리기도 막막하고 모든 것이 어렵고 난해 했다.
아직까지도 뭔가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그 답답한 기분에 현성이 한숨을 내쉬자 다시 그를 몰래 바라보던 혜주가 덩달아 짧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그 소리에 현성이 ‘아…’ 하고 고개를 돌리자 혜주가 움찔하며 소리친다.
“그래도 니! 나중에 배를 타던지, 뭐… 여 계속 있던지, 아님 깡패를 하던지 뭘 해도 아가씨한테 그래 맘 주지 마라! 니 같이 어수룩한 아들은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리고 다 뜯긴데이!”
어색하게 버벅 거리며 소리 친 그 말에 현성이 ‘그랄게예…’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혜주의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가 생각해도 ‘그 애’ 이후로 절대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해놓고서 혜주…의 모습에 또 그런 무리수를 던지고 말았으니까. 그게 왜 인지는 정말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 빙시는 아니니까…”
“빙시지! 줘도 못 먹는!”
뭐가 또 불만이던지 이내 툴툴 거리는 혜주의 말에 현성이 다시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혜주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그게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하면 상당히 재미있는 모양이다.
“…근데 니 가족은 없나?”
그 와중에 혜주가 다시 졸리는지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그에게 물음을 던진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시간에 혼자가 아니라 옆에 누군가와 함꼐 있다곤 생각해보지 못했던 현성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고모 있긴 한데…”
“그럼 왜 여기 혼자 지내노?”
“고모가 진짜 가족은 아니잖아요.”
고모만을 이야기 하는 걸로 보아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부모님은 계시지 않는 모양이다. 고개를 흔들며 이야기 하는 그의 서글픈 목소리에 혜주가 ‘글치…’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깊고 슬픈 눈빛에 그녀가 더욱 더 꼭 그 팔을 안고서 ‘졸리네, 또…’ 하고 힐끔 그를 바라본다.
“너거 부모님은 어떻게…”
“그냥…”
꿀꺽 뭔가를 삼키는 그의 모습에 혜주가 더 이상은 묻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화상 자국에 손을 올리자 현성이 크게 움찔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좀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만지게 해본 적도 없는 그 상처를 만지는 혜주의 손길에 ‘지금… 뭐하는 겁니까…?’ 하고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음을 던진다.
“약 손 모르나. 빙시야.”
흥 하고 삐진 듯 손을 떼고서 혜주가 홱 등을 돌리자 현성이 그 기분을 대체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돌아선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혜주가 잠이 든 듯 더 이상의 말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그가 휴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리려 한다.
“등은 돌리지 마레이! 언제든…!”
아직 잠이 든 게 아닌지 혜주의 목소리에 다시 현성이 움찔하며 ‘그럼… 우에 하라꼬요…?’ 하고 다소 불만 섞인 얼굴로 물음을 던진다. 그 말에 혜주가 ‘내 쪽 보면 되잖아, 바보야!’ 하고 도도한 얼굴로 살짝 그를 돌아본다. 여자란 참 이기적인 생물이구나… 하고 현성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등 뒤를 바라본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자리에 하얗게 드러난 어깨가 너무나도 가냘파 지켜주고 싶단 충동이 밀려오고 있다.
그 어깨에 손을 올리고 포근히 그녀를 감싸 안아주고 싶다는 열망 아닌 열망을 느끼며 그가 허전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꾹 눌러 담는 동안 혜주가 ‘빙시…’ 하고 꾸물꾸물 뒤로 물러나며 그의 품으로 다가온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향수 냄새가 은은히 코 끝을 스치자 현성이 움찔하며 손을 든다.
그의 가슴팍에 등을 붙인 혜주가 이제는 이곳도 충분히 따뜻하다는 듯‘ 따시네… 내 잔데이…’ 하고 속삭인다. 그 속삭임에 현성이 ‘아… 예…’ 하고 다시 얼어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혜주가 다시 반대로 몸을 돌린다. 무척이나 밀착한 그녀의 모습에 그가 다시 멈칫하고 굳은 동안 혜주가 물끄러미 그의 눈을 바라보며 ‘내한테 이상한 짓 하면 가만 안 둘 거데이.’ 하고 도도한 얼굴로 경고를 남긴다.
“그…랄게예…”
현성이 조금 얼어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혜주가 ‘빙시!’ 하고 픽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가슴팍에 다시 얼굴을 기댄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가 너무 듣기 좋다 생각하며 그녀가 집에서도 느끼지 못한 편안한 기분으로 다시 잠이 드는 동안 현성 역시 생애 최초로 느껴본 그 기분 좋은 두근거림과 설렘에 미소 짓는다. 그리고 용기 내어 들고 있던 손을 살며시 내리고 그가 그녀의 몸을 감싸안자 혜주가 더욱 더 그의 품에 깊이 다가온다.
백 마디 말보다도 더 소중히 느낄 수 있는 느낌이 있단 걸, 그리고 그 지친 마음에 하나의 작은 위안이 되고 싶단 것을 전해주고 싶단 걸 이야기 하고 싶은 듯 말이다.
* * * * *
“PD님… 지금 시청률도 그저 그렇고 좀… 분위기가 진짜 좀 그런데요…? 그 이종격투기 카페에서도 영…”
서울에 위치한 남성 스포츠 전문 케이블 방송사 회의실은 사뭇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그도 그런 것이 방송국에서 야심차게 꺼내 놓은 프로그램 ‘주먹이 운다!’라는 프로그램이 전국 각지의 유명한 주먹들과 프로 파이터의 대결을 이끌어 내어 흥미와 주목을 받았지만 시즌이 지나가면 지날수록 뻔해지는 구도로 인해서 점차 사람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시즌 3에 이를 때 까지 소위 ‘주먹’이라 불린 이들이 프로 파이터를 능가한 경우를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단 것이 치명적이었다. 유치하긴 하지만 사람들은 스트리트 파이터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프로를 능가하는 만화 같은 사실을 보고 싶어 했지만 현실의 벽은 냉담했다. 그리 하여 시즌 2에서부터는 아예 대놓고 사회에서 악이라 이야기 할 만 한 나쁜 주먹들을 섭외하고 프로 파이터들이 그들을 응징 하며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는데 시즌 3에 이르러서는 그마저도 빛을 잃고 있었다.
특히 주먹이라 할 만한 이들의 임팩트가 너무 약하단 사실이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이대로라면 폐지는 당연한 수순인지도 몰랐다. 그 동안 프로그램이 좋은 원석 파이터들을 발굴해내긴 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실질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주먹들이 기회를 얻어 프로 파이터가 된다 하더라도 열악한 국내 상황에서는 주목 받을 수 없었으니까. 설령 프로 파이터가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엘리트 체육인 출신의, 어린 시절부터 훈련된 프로 파이터들을 이기긴 어려웠고 생계 문제로 파이터란 직업을 그만두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 악순환과 맞물려 점차 사람들의 관심이 떨어져 가는 케이블 프로그램의 운명 역시 불을 보듯이 뻔했고.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전임 PD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동안 투입된 신입 PD가 여자란 것은 아예 프로그램을 접겠다는 방송사의 의지인지도 몰랐다.
“…뭐라고 하는데…?”
“그냥 뭐… 매번 똑같은 양아치들 나와서, 매번 똑같이 맞다가 끝이 난다고… 내용이 없대요…”
작가의 말에 이지선 PD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는다. 신방과를 졸업하고 FD로 2년 정도 일을 하다 맡은 첫 번째 자리가 이런 침몰하는 배라니…!
“…섭외가 문제잖아, 섭외가…! 솔직히 뭐, 프로 파이터 섭외는 그렇게 안 어렵다고 해도… 주먹이 문제잖아요? 이걸 살릴만한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해?”
전임 PD가 너무나도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탓에 방송된 지난 회는 정말 그녀가 봐도 형편 없는 수준이었고, 혹평일색이었다. 갑갑한 듯 지선이 머리를 싸매고 있는 동안 다시 회의실 분위기가 조용해진다. 작가진을 비롯한 스탭들 역시 여자 PD가 이런 거친 프로그램을 맡는다는 것에 회의적인 듯 전임 PD가 회의를 진행할 때 보다 덜 적극적이었는데 그 묘한 분위기를 지선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사회의 법칙인 것을…! 결국 살아 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활로를 찾아야만 한다 생각한 그녀가 ‘영돈 작가님, 뭐 정말 괜찮은 사람 어디 없어요?’ 하고 물음을 던진다.
“…솔직히… 나올 사람은 이제 거의 다 나온 것 같아서…”
전국적으로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출연을 했고, 유명세 좀 탔다는 사람들은 웬만큼 연락도 해봤다. 그 중에서 된 사람도 있고, 안 된 사람도 있지만 안 된 사람들 대부분은 현재 ‘주먹’을 업으로 삼고 있어서 이겨도 본전인 자리에 참가하려 하지 않는단 것이 문제였다.
“아… 정말 미쳐버리겠네.”
지선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정말 뭔가가 없나 하고 리스트들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이미 이 프로그램의 시즌 1부터 참여해온 영돈 작가 역시 지금 다른 프로그램의 아이템을 준비한다고 여기엔 별 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회의라고 하지만 별 다른 뾰족한 수단을 찾지 못한 가운데 지선이 ‘다들 가서 생각들 좀 더 해보세요!’ 하고 목소리를 높인다. 신임 PD는 어떻게 사람들을 다뤄야 하는지도 아직 막막한 듯 깊은 한숨을 땅이 꺼져라 푹푹 내쉬고 있었는데, 현실적으로 이 프로그램은 타이타닉 호와 같은 입장이었다.
단지 전임 PD의 뒷수습으로 보내진 PD일 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첫 경력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지선이 ‘어떻게 해… 어떻게 하지…?’ 하고 입술을 잘끈 깨물며 멍하니 회의실의 시계를 바라본다. 시계를 본들 대체 답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막막하지 그지 없단 생각에 그녀가 에휴 하고 한숨을 다시 내쉬는 동안 회의실로 막내 작가 희진이 ‘저기… PD님…’ 하고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왜 희진씨?”
막내 작가라고 하지만 대부분을 잡일이나 사무 보조와 다를 바 없는 그녀의 모습에 지선이 별로 기대하지 않는 눈치로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에 희진이 조금 움츠러든 듯 ‘저기…’ 하고 회의실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저기… 제가요… 친구들한테 물어 보고 해봤는데요…”
그도 그런 게 지선이야 최소한 무술 경력이라도 있다지만 전~혀 관계조차 없는 막내 작가를 어떻게 믿겠는가? 희진의 말에 지선이 으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가 희진이 뭔가를 써온 서류를 받자 희진이 말을 잇는다.
“대구에 장현성이라고 엄청 유명한 애가 있었대요…! 얘가 그… 2년 전쯤에 목사님 때려 죽인 10대라고 뉴스도 난 적 있대요…! 근데 지금은… 예정보다 일찍 소년원에서… 나왔다고 하던데…”
그 말에 순간 지선이 ‘응?’ 하고 정신이 번쩍 든 듯 희진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의대생 파이터인가… 왜 이민… 민후…?”
“이민욱 선수!”
“아… 네! 그 사람이랑 그 사람이 동갑인데요… 제 친구가 이민욱이란 사람이랑도 알고 지냈는데… 평소에 이민욱이 그 사람이랑은 한 번 싸워보고 싶다… 뭐 그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희진이 챙겨온 자료는 다름 아닌 그녀가 말했던 기사였다. 10대의 폭력이 날로 극성을 부리고 있다는 자극적인 타이틀의 기사에는 조그마하게 얼굴을 가린, 그러나 드러난 신체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소년범의 모습이 보인다. 그 순간 지선이 머리를 번뜩이는 생각에 ‘의대생 파이터와… 동갑내기 소년범 주먹…!’ 하고 손뼉을 마주친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과 사람을 죽인 적 있는 사람의 대결…!”
지선의 외침에 희진이 ‘네…! 저도 그렇게 생각 했어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막내 작가의 아이디어에 지선이 다시 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희진을 향해 소리친다.
“희진 씨는 지금 당장 이민욱씨한테 연락해 봐요! 영돈 작가님이 알고 있을 거에요! 코어 짐 사무실에 전화 하면 되니까…! 그리고 여기, 그… 장현성이라고 했어요? 그 사람 들어간 소년원 전화번호 좀 보내줘요! 내가 직접 연락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