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회 - 괴물
세상이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마치 놀이 공원에 있는 마술 거울처럼 어떤 때에는 짜부러졌다, 어떤 때에는 펑퍼짐해졌다, 또 다른 때에는 멀어졌다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지만 현성은 결코 눈을 감지 않았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저도 모르게 스르륵 감길지도 몰랐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가 가지고 왔던 것은 참고 다시 되새기며 인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근성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가 생각하기로 그것은 결코 ‘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니 진짜 술 쎄네.”
새벽 6시. 밖은 이미 해가 떠올랐고, 문을 닫아도 한참 전에 닫아야 할 시간. 허나 그 시간까지 재운과 창호를 두고 함께 술을 마시는 현성은 현 직 종사자인 아가씨들이나 양사장, 그리고 주당인 재운과 창호가 보기에도 대단하다 싶은 구석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것이라면 몰라도 이미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우고 시작했단 것은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술이란 것이 몸에는 그렇게 유익한 물건이 되지 못하다보니 술을 마시는 것도 달리기와 같이 너무 페이스를 서두르다 보면 몸을 망가뜨리기 십상이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버텨 내는 정신력도 정신력이거니와, 그 정신을 따라와주는 몸 역시 감탄을 자아낼만 했다.
“…아입니다…”
하지만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힘겹게 대답하는 모습이 위태롭다 싶은 것이 이제 슬슬 자리를 파해야겠다는 기운이 밀려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도 잘 버텨 오는 현성이었지만 더 이상은 한계가 온 모양이다. 재운이나 창호도 이제 마실만큼 마셨고, 더불어 그것에 지친 모양이다. 술을 그렇게 퍼다 마시지 않은 혜주나 승지를 비롯한 아가씨들과 양사장 까지도 새벽의 기운에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있는데 오죽 하겠는가?
“암튼… 우에 되든 내는 현성이, 니. 내는 니가 엄청 마음에 든다. 행님이 뭐라 카는지 알겠나?”
이제 자리를 끝낼 생각으로 박재운이 곁에 있는 혜주의 어깨를 꾹 누르며 현성에게 이야기 한다.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혜주의 어깨에 올라와 있는 손을 유심히 바라보다 ‘행님…’ 하고 그를 부른다.
“제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얘기해도 되겠심니까…?”
그 말에 창호가 비몽사몽 간에 ‘응?’ 하고 그를 바라본다. 앵간해서는 알고 지낸지 꽤나 된 사이에도 현성이 먼저 부탁을 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는데, 이번에 자리를 구해달란 말조차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들은 부탁이었다. 그 정도로 남에겐 기대지 않는 성격의 현성이 초면인데다 자존심을 한 번 내세웠던 재운에게 그런 부탁을 할 줄은 그 와중에도 몰랐다 싶었던 모양이다. 그 얼굴에 승지와 혜주가 동시에 현성을 힐끔 바라본다.
“그래, 함 말해 봐라! 동생아!”
그들과 달리 뭔가 일이 잘 풀린다는 느낌이 들었던지 재운이 남자답게 껄껄 웃으며 다시 한 번 혜주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찹쌀떡처럼 희고 말랑한 피부를 매만지는 거친 손길에 현성의 눈빛이 닿자 왠지 모르게 혜주가 불편한 기분으로 ‘오늘 만큼은 안 그랬으면…’하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작은 한숨을 내쉰다. 그 사이 현성 살짝 눈을 감고서 술기운이 몽롱하게 놀라와 알딸딸한 듯 한 번 고개를 비틀하며 이야기 한다.
“지가… 아직… 총각 딱지를 못 땠심다… 행님.”
고요한 가운데 터져 나온 그 말이 정말로 의외였던지 재운이 ‘뭐라꼬? 진짜가?!’ 하고 박수를 치며 웃음 짓는다. 창호나 양사장도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뜻 없이 웃음 짓는 동안 아가씨들도 웃음을 터뜨리며 ‘진짜~?’ 하고 그를 바라본다.
겉보기로 보아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하는 짓을 보면 굉장히 순하고 순수하단 생각도 든다. 남자다움과 순수함이 공존하는 그의 모습에 외모야 어쨌든 인간적으로는 끌리는 것을 느끼는지 아가씨들이 호기심을 가득 담아서 그를 바라보는 동안 현성이 다시 고개를 들어 재운을 바라본다.
“지 오늘 그 딱지 좀 떼주이소… 행님.”
술에 취해서 그런지 몰라도… 아니, 그는 애시당초 요령이란 것이 잘 없는 사람이었다. 그 말에 재운이 푸하핫 웃음을 터뜨리며 아가씨들을 돌아본다.
“니 아다가?! 오늘 역사적인 날 되겠네! 누구 자 좀 잘 돌봐줄 아 없나?”
껄껄 웃으며 재운이 즐거운 기색으로 아가씨들을 돌아보자 아가씨들이 서로 부끄러워 하며 ‘남사스럽구로…’ 하고 부끄러운 얼굴로 서로를 힐끔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 와중에 현성이 한숨을 깊이 내쉬며 정면에 있는 혜주를 바라본다. 그 눈빛에 아가씨들을 돌아보던 재운이 ‘니 설마…’ 하고 씩 웃음 짓는다.
“자슥! 보는 눈이 있네!”
자기 여자를 넘본다는 생각보다도 이렇게 솔직한 편이 좋다는 듯 그가 다시 박수를 친다. 혜주가 그 눈빛과 이 상황에 당황한 듯 ‘니 와 카노…’ 하고 그를 바라보는 동안 재운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오야. 그래, 혜주야. 니가 오늘 내 동생 좀 잘 돌봐주그레이. 내는… 우리 영계 아가씨랑 오늘 좀 놀아봐야 겠네.”
혜주 정도 되는 급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위치의 남자. 그렇기 때문에 아가씨에 달리 연연하지 않는 사나이의 면모를 보이며 재운이 창호의 옆에 있는 승지에 눈독을 들이자 창호가 썩은 표정으로 억지웃음을 짓는다.
“야가 애교가 많심다, 행님…!”
하지만 기라면 기어야 하는 게 그 바닥 이치가 아니던가? 승지가 창호도 싫지만 재운 역시 무서운 듯 두려운 빛을 스쳐 보이지만 절대로 티를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억지웃음과 함께 그의 곁에 붙는다. 웃음 팔고, 몸 파는 여자 팔자가 다 이렇지 하고 체념한 동갑내기의 모습에 현성이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카면… 더 늦기 전에 일나봐야지. 우리 양사장님도 퇴근 하셔야 하고. 괜찮제, 현성아?”
혜주는 오늘 양보해주겠다는 그의 넓은 마음에 감사보단 씁쓸함을 느끼며 현성이 ‘고맙심다…’ 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됐다, 마. 다음에 또 보자. 그때까지 생각 잘 해보그라. 종종 놀러 오께, 행님이 니 보러.”
술이 퍼뜩 깨는 마지막 말에 현성이 취한 와중에도 더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을 느끼곤 다시 꾸벅 고개를 숙인다. 창호와 재운이 승지와 다른 아가씨를 하나 끼고 방을 나서는 동안 양사장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아직도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얼떨떨한 모양으로 남은 혜주를 힐끔 바라 본다.
“혜주야… 고마 자 데리고 퇴근해라. 오늘 욕 봤다. 여는 아들 출근하면 그때 치우라 칼 테니까…”
재운을 마중 나가야 하는 입장인지라 서두른 그의 말에 혜주가 ‘사장님도 욕 봤네예…’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곧 양사장도, 다른 아가씨들도 퇴근을 위해서 방을 나선 사이 혜주가 물끄러미 쓰러지듯이 소파에 앉아 괴로워하는 현성을 바라본다.
“…니 와 그랬노… 미친 거 아이가?”
조금 화가 난 듯 굳은 얼굴로 이야기 하는 혜주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힘겹게 뜨며 현성이 ‘…그러네예…’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일라봐라! 니 걸을 수 있나?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 술 다 받아 먹고… 그칸 거고!”
마지막에 총각 딱지 좀 떼달란 그 말이 떠오른 듯 혜주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지만 현성에겐 아무래도 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버티는 게 고작인지 ‘퇴근 해보이소…’ 하고 벽을 짚고 일어나는 모습이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질 것만 같다.
“…니…”
퇴근해보란 말에 괜히 혜주가 울컥한 듯 그를 바라보다 그가 휘청하자 쪼르르 달려가 휘청이는 그를 붙잡는다. 이내 그녀의 손길에 그가 자신만큼이나 혜주도 괴로웠을지 모르겠다 생각한 듯 안타까운 얼굴로 쓴웃음을 짓는다.
“…진짜로… 예쁘다고 다 좋은거는… 아니네예.”
그리고 술기운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고개를 흔들며 그가 다시 혼자서 걸음을 옮기겠다는 듯 혜주를 뿌리치고 비틀비틀 걸음을 옮긴다.
그 자신도 왜 그랬는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애’를 도와주고 나서 소년원에서 1년 6개월을 보냈던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역시 주제 넘게, 보기 싫단 이유로 이렇게 무리수를 둔 이유를 말이다. 어쩜 술에 취해서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몇 번이나 생각했던 걸 또 잊어버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단지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그건 누구에게 질 책임이 아니라 스스로 감당을 해야 할 것일 뿐. 그 생각으로 현성이 점점 더 격하게 몰려 오는 술기운에 금방이라도 퍼져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 듯 가게 복도의 차가운 벽을 짚은 채 비틀비틀 걸음을 옮긴다.
“야! 니…!”
그의 한 마디 말에 우두커니 서서 멈칫하던 혜주가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입술을 꽉 깨물고 재빨리 따라 붙어 그를 붙잡는다. 대체 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 날만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잘난 척 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속 깊은 이야기들을 몇 나누었던 사람에게 그 더러운 본연의 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지… 복잡한 기분이 오가는 가운데 괜히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인 것만 같단 생각이 들자 혜주가 속이 상해서 ‘누가 니 보고 이 카라 카더나!’ 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를 부축한다.
“그러게예…”
힘없는 웃음과 함께 자신이 생각해도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현성이 공허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그냥… 보기가 싫었네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고개를 흔들며 현성이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 큰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심각하게 취한 모습이지만 어떻게 스스로 누군가에게 폐는 끼치고 싶지 않단 생각에 용케 넘어지지 않고 벽을 지지대 삼아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처연하기까지 하다.
“…빙시… 진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무어라 이야기해야 할 지 몰라 혜주가 괜시리 자꾸만 울컥울컥하는 기분으로 그를 향한 원망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게 진심은 아니다. 단지 어떻게 이야기 해야 할 지 모르는 그녀가 ‘지가 뭐라꼬…’ 하고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밖으로 나온 현성이 급히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벽을 짚고 서너걸음을 옮긴다.
“우욱…!”
바깥 공기를 맡아서 그런지 갑자기 속이 뒤집어진 듯 그가 고통스러워 하며 속을 비워내자 혜주가 이젠 무어라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르는 당황스러움이나 화보다도 걱정이 앞 선 듯 ‘니 그 칼 줄 알았다…!’ 하고 그의 곁으로 다가오려 하자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그냥 좀 가소!’ 하고 소리친다.
그 외침에 움찔하며 혜주가 멈춰선 동안 다시 한 번 현성이 우욱 하고 속을 비워 낸다. 달리 먹은 게 없어 위액이 고스란히 올라 왔던지 시큰한 기운이 절로 구토감을 만들어 낸다. 누구든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무척 추잡하고 더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성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술에 취할 때 마다 더욱 더 크게 올라오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비하감.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이런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성질을 부리는 모습은 무섭다기 보다 서글퍼 보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혜주가 그녀는 이해하지 못 할 그의 고통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쉰다.
오늘 그는 정말로 마주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고, 정말로 가고 싶지 않은 길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아마 다른 자리를 구해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필시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밤일을, 밤공기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필연적인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그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나마 할 수 있는 필사적인 저항이 바로 그것일 테니까.
단지 의문이 있다면 그는 무리해 스스로를 팔아 넘겼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혜주를 위해서 말이다. 그게 왜, 대체 왜인지는 혜주도.. 현성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혜주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괴로워하던 그가 어느 정도 속이 진정된 듯 벽에 기대어 서서 하아 하아 하고 거친 숨을 몰아쉰다. 놀란 마음에 주제 넘는 짓이라 화를 내기도 했지만…
“괜찮나…?”
마냥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가지 않고 기다린 듯 한 그녀의 목소리에 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괜찮은 듯 그가 걸음을 옮기지만 숙소로 잡아 놓은 모텔까지 가는 길은 벽이 없어 걸음이 위태로워 보인다. 속을 비워내고 나면 술이 좀 깨는 경향이 있다지만 아무래도 술병이라도 난 모양인지 속은 불편하고 술은 영 깨지 않는다.
깨질 듯 한 두통에 온 몸이 화끈거려 괴로운 기분만 가득한 가운데 비틀거리던 현성이 그 몸을 꼭 붙잡은 혜주의 손길에 지친 얼굴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본다. 그 눈빛에 혜주가 더 이상 그를 나무라지도, 주제 넘는 일을 했다 탓하지도 않은 채 ‘가자… 걸을 수 있제…?’ 하고 물음을 던지자 현성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미안합니데이…”
도움을 주고도 사과해야 하는 그가 처량했던지 혜주가 ‘뭐가…’ 하고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린다. 같이 걸음을 내딛어야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기대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폐를 끼치는 것이 너무나도 신경 쓰이는지 다시 또 바짝 긴장해선 혼자서 어떻게든 해내려는 모습이 더욱 더 그녀의 마음을 저민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녀에게 화를 냈을 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했는데!’ 하고 말이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단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경험해본 일이 없어 어색한 가운데 혜주가 도망치거나 피하지 말라는 듯 더욱 더 그의 옷자락을 꼭 쥔다. 거의 안기다 시피 그녀가 그를 부축했을 때 그도 더 이상은 그녀를 피할 수가 없었던지 결국 어색하게나마 그녀에게 기댄 채 같이 걸음을 내딛는다.
별 다른 말도, 별 다른 눈빛도 오가지 않는다. 그저 함께 내딛는 걸음에 정적과 숨소리만이 오갈 뿐.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것은 그 정적이 어색하지 않았을뿐더러, 이상할 정도로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단 것이었다. 혜주가 함께 걸음을 내딛으며 크고 무거운 그 몸이 그녀에게 기댄 것에 작은 보람마저 느끼기 시작할 때 두 사람이 현성의 숙소에 도착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여지없이 술에 취해 뻗은 깡패와 야하게 옷을 입은 술집 여자가 모텔에 들린 것처럼 보일 테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다 왔으니까 정신 챙기래이…”
혜주의 목소리에 현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가라 이야기 했지만 도움 받지 않으면 길에 뻗어 거기에서 잠을 청했을지도 모른다.
“고맙심다…”
투박하지만 참 올곧다. 그 말에 혜주가 ‘뭐가…’ 하고 다시 퉁명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홱 돌리고는 조심조심 함께 걸음을 옮긴다. 작고 마른 체구로는 그 덩치를 감당하기 힘들었던지 그녀 역시 힘에 겨운 얼굴이지만 전혀 티 내지 않은 채, 같이 계단을 내딛는다.
“니 몇 호에 지내는데…?”
현성이 거의 다 왔다는 안도감에 거의 감긴 눈으로 ‘…211호…’하고 대답하자 혜주가 모텔 프론트에 ‘211호요…’ 하고 열쇠를 받는다. 미심쩍은 눈으로 힐끔 여주인이 그와 그녀를 바라보지만 그런 눈빛은 익숙한 듯 혜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열쇠를 받아 챙겨 함께 걸음을 옮긴다.
“다 왔다… 조금만 참아라… 알겠제…?”
지친 듯 헉헉 숨을 몰아쉬며 이야기 하자 현성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에 혜주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짠함을 느끼곤 함께 211호 앞에 서서 열쇠로 문을 열자 마자 현성이 숙소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그녀가 뭐라기도 전에 신발을 벗고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침대 위로 몸을 던진다. 기절한 듯 퍼진 그 모습에 혜주가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덩달아 긴장이 풀린 듯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는다.
모텔에서 장기 투숙을 하고 있는 20살 남자의 방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모텔에서 갖추고 있는 물건 말곤 딱히 그 물건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아마 소년원을 나올 때 들고 왔을 법 한 까만색 가방이 전부였다.
그게 또 왜 그리 마음이 쓰이는지 주저앉아서 쉴 겸 그의 방을 돌아보던 혜주가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따로 외투도 챙기지 못하고 끙끙 거리며 함께 나선 터라 열심히 움직이다 말고 멈춰서니 서늘한 냉기가 느껴진다. 물론 내부 온도야 곧 조절하면 다시 따뜻해지겠지만… 지친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고 기절해버린 어리고 덩치 큰 막내가 너무나도 안타까워 보였던 모양이다.
“…와 이래 사노.”
자기도 모난 년이지만 그 또한 너무 할 정도로 모난 놈이라고, 그 인생이 순탄치 않은 것이 참 안타까운 듯 그녀가 아이처럼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든 그를 내려다 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정신 없이 잠에 빠져 거친 듯 쌕쌕 거리는 숨소리만 내쉬는 그의 모습에 그녀가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진다.
짧게 잘랐던 머리카락이 조금 자라서 손가락 끝에 사르륵 걸리는 느낌이 긴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그 느낌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던 혜주가 ‘예쁜 얼굴도 힘드네예…’ 하던 그의 음성이 귓가를 맴도는 것을 느끼며 살짝 웃음 짓는다.
“…진짜 닌 빙시데이… 와 그래가…”
잠이 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새침하게 웃음 짓고는 혜주가 애휴 하고 의자를 끌어 당겨 그 앞에 살며시 주저앉는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유흥계에 뛰어들어 오랜 시간을 일 하면서 오늘처럼 누군가가 그녀를 위해서 이렇게 자신을 기꺼이 내던진 건 처음이었다. 무식하고 투박한 방법이 비록 그렇게 멋들어지진 않았지만 그건 드라마나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숱하게 일어나는 환상들이 아무리 아름답고 멋지다 하더라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안다. 이제는 그런 것을 기대할 나이가 아니니까. 그녀가 살아온 현실은 언제나 높고 차가웠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보잘껏 없어 보이는 하나의 현실이 더욱 더 마음에 와닿은 것인지도 몰랐다.
“휴…”
피로감 속에서 왠지 모를 안락함이 느껴진다. 이내 그녀의 손길에 그가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하자 혜주가 다시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거두고는 으슬으슬한 한기가 밀려오던지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의 곁에 나란히 몸을 뉘인다. 침대에 뻗어 있는 현성이 옆에 누군가 자리를 잡자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다시 움츠러드는 모습에 또 다시 마음이 안타까운 것을 느끼며 그 너른 등판을 다독이 듯 살며시 손을 올린다.
“줘도 못 먹는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