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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7화 (7/281)

- 7 회 - 괴물

좋을 것 같다고 마냥 좋지 않다. 그렇게 들떠서 기대하다가 언제고 다시 곤두박질 치는 게 세상이었다. 그 세상의 이치를 현성은 단 한 번도 잊어본 일이 없었다. 마지막에 취객들을 정리하면서 아가씨들이나 웨이터들이 그를 달리 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옅은 기대감이 있지만 결국 그 또한 지나가리라. 사람들은 항상 좋은 것보단 나쁜 것을 더 오래 기억한다. 그리고 좋은 것은 나쁜 것보다 쉽게 지워진다.

애써 기대감을 꾹꾹 누르고 아무 것도 달라지는 건 없다 되뇌이며 현성이 가게 근처의 모텔로 걸음을 옮긴다. 일을 마치고 집이 아닌 모텔로 들어오는 것도 익숙할 법 하다만 그 날은 유난히도 힘에 겨운 듯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하아…”

몸이 물을 먹은 솜 인형 마냥 무겁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힘든 일은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피로가 쌓이고 쌓여 어딘가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강도야 과거 소년원에서 하던 일이 더 높지만 이상하게 피곤한 기운에 현성이 쓴웃음을 짓고 만다. 점점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고 어른이 되어 가면 갈수록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211호요.”

장기투숙객으로 끊어 거래를 해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돈 생각을 해서는 또 쉽게 자리를 옮길 수도 없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지낼 곳을 먼저 마련해놓는 것이 먼저이겠지만 현 상황으로썬 그게 여의치 않았다. 창호를 만나 운 좋게 웨이터로 취직할 수 있었지만 수익은 보잘껏 없었고, 그로써도 계속 창호의 신세를 지고 있으면 그 미래란 불을 보듯이 뻔했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해보려 해도 받아주는 곳은 여전히 없었고… 그래서 결국 선원이라는 위험한 일을 염두에 두고 이 자리를 떠나가려 집을 구하지 않고 장기투숙객이 되었지만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좋게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할 수 있는 모드 힘을 다해 아둥버둥하고 있지만 허우적 거리면 거릴수록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정신적 피로감이 극에 달한 듯 머리 양 쪽으로 지끈 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현성이 방문을 열고 모텔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빈 방에는 아직까지 약한 담배 냄새가 남아서 맴돌고 있다. 한 대 태우고 잠을 잘까 생각을 하다가도 미친 듯이 밀려오는 피로감에 현성이 침대 위로 몸을 던지고 만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서 침대 위로 몸을 던져 눈을 감은 그가 극도로 피곤한 가운데 잠은 오지 않는 기이한 상황에 하아… 하고 다시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미치겠네… 씨바…”

이렇게 살다간 정말 정신이 나가버릴지도 모르겠다 생각으로 돌아누운 현성이 지끈 거리는 두통을 머리를 꾹 누르고는 품을 뒤진다. 안 주머니에 넣어둔 담배 곽의 단단한 사각형 윤곽이 느껴지자 담배 곽을 빼내고 안을 열어 보니…

“…돛대였나…”

아까 가게에서 핀 게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한숨을 푹 내쉬며 현성이 담배 곽을 툭 던지고는 다시 머리를 붙이고 침대 위에 눕는다. 어수룩한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퀭한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려 하지만 정말 짜증이 날 정도로 잠은 오지 않는다. 하다 못해서 이제는 자기 몸까지도 말을 듣지 않는 것만 같은 서러운 기분이 갑갑한 한숨을 내쉬고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을 부비던 그가 문득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화상 입은 피부의 거친 느낌에 또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얼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지만 담배를 태우고 싶은 생각만은 간절하다. 그게 그가 골초라서, 담배 없이 못 사는 사람이라서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소년원에 들어가기 전에도, 심지어는 소년원 안에서도 담배는 있으면 태우고 없으면 태우지 않는 그냥 그런 물건이었을 뿐이니까.

소년원을 나오고 나서 급격하게 늘어버린 담배는 인생의 쓴맛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열쇠를 챙겨 방을 나선 현성이 카운터에 ‘잠깐 담배 좀 사올게예’ 하고 열쇠를 맡기지 않고 모텔을 나선다. 그러다 문득 그가 모텔 입구에서 멈칫하고 걸음을 멈추고 만다. 왜냐하면…

“…니 진짜 여서 사나?”

추운 새벽 날. 푸르스름함이 내려앉은 거리에 가게 안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리 두꺼운 코트를 입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바로 묶은 혜주가 그를 향해 물음을 던지고 있었으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등장에 현성이 당황한 듯 어물어물 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왜…”

머리를 긁적이며 던진 그 물음에 혜주가 홱 하고 고개를 돌리며 ‘그냥…’ 하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여… 볼 일 있으십니까…?”

직업이 그렇다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물음에 혜주가 다시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곤 ‘내 그래 싸구려로 보이나?’ 하고 소리친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설마 자기를 찾아온 것인가? 전혀 예상치 못 했던 일에 현성이 다시 머리를 긁적이자 혜주가 힐끔 그를 살핀다. 가게 밖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만 가게 안과 별로 다를 바 없다. 단지 새벽녘에 푸르스름한 빛을 받은 얼굴이 무섭다기 보단 너무 지치고 힘들어 보여서 안타깝다. 그 큰 덩치가 볼이 홀쭉해져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아서 혜주가 괜히 마음이 안타까워짐을 느끼며 ‘니… 왜 먼저 갔는데…?’ 하고 물음을 던진다.

“다른 아들은 다 같이 아침 먹고 들어갈라 카던데.”

“…별로 생각이 없었심다. 글고 가봐야 서로 불편하기만 하고…”

움츠러든 그 목소리에 혜주가 다시 한 번 그를 바라본다. 휴 하고 한숨을 내쉬는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슬쩍 드러난다. 가게에서 양사장만큼이나 영향력이 큰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녀일 것이다. 왜냐하면 타고난 미모로 가게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아가씨니까. 아가씨는 가게의 매물이고, 잘 나가는 매물은 언제나 가치가 있다. 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그녀가 처음부터 대놓고 싫어한 사람이 현성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더 싫어하고 멀리 하는 것일 것이다. 웨이터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아도 아가씨들이 팁도 주지 않는 이유는 더더욱 말이다.

단지 그가 소년원을 갔다 왔고, 깡패의 소개로 들어온 녀석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뜻하지 않게 괴로움을 심어준 그녀가 생각과는, 보기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에게 ‘밥은…?’하고 물음을 던진다.

“생각 없심다… 담배 사러 나온 거라…”

“그카다 니 폐 다 썩는다! 어린 게 무슨 담배고…!”

볼 때 마다 담배를 피우려는 그의 모습에 혜주가 잔소리를 하자 현성이 무척 당호아한 듯 힐끔 그녀를 바라본다. 혜주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이유도 모르겠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지 어색해 하는 그의 모습에 혜주가 덩달아 어색한 얼굴을 하고서 흠흠 헛기침을 한다. 막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텔 앞에 있는 두 남녀의 모습에 시선을 힐끔 보내자 혜주가 ‘일로 나온나!’ 하고 먼저 돌아서서 걸음을 옮긴다.

무척이나 피곤한 가운데 이런 일이 벌어지자 이게 꿈인가…? 하고 현성이 고개를 흔들어 보지만 꿈은 아니다. 확실히 그보다 앞에서 걷고 있는 혜주는 꿈이 아니라…

“니 내랑 술이나 한 잔 할래?”

“예…?”

“술도 못 마시나?”

현실이었다. 새초롬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7살 연상의 아가씨는 그 까칠한 성격으로도 가게 에이스 노릇을 할 만큼 예쁘장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밖에서 만난다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여자라곤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니요…”

현성이 고개를 흔들며 여전히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혜주가 ‘그럼 잔 말 말고 따라온나!’ 하고 그를 이끈다. 담배 사러 나왔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고 거리를 두고 그녀의 뒤에 서서 걸음을 옮기는 현성의 모습에 혜주가 ‘내 미행하는 거가?’ 하고 톡 쏘 듯이 한 소리를 더한다. 그 말에 현성이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서둘러 그녀의 옆에 서자 혜주가 힐끔 그를 바라본다.

“…오늘 고마웠다고…”

그 못지않게 어색한 얼굴로 이야기 하는 혜주의 말에 현성이 ‘아닙니더…’ 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흔든다. 그리곤 다시 흐르는 어색한 정적에 홱 하고 다시 고개를 돌리는 두 사람. 어수룩한 새벽 거리는 쓰레기들과 길바닥에 쓰러져 아직도 헤롱 거리는 취객들도 더러 보인다. 하지만 대체로 고요한 가운데 불이 들어와 있는 가게 간판은 몇 보이지 않는다. 가까운 근처 해장국 집으로 들어간 혜주가 힐끔 현성을 돌아보며 ‘어디 앉으꼬?’ 하고 물음을 던진다.

“…아무데나…”

별로 상관 없다는 듯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주가 밝은 곳에서는 처음 보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러자 급히 얼굴을 돌려 얼굴을 감추는 현성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찌리리 하고 아픈 듯 안타까움을 느끼곤 혜주가 그럼 ‘요기!’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야기 하곤 그 앞에 자리를 잡는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현성이 맞은 편에 앉은 동안 혜주가 가방을 의자 옆에 두고 코트를 벗어 의자 위에 걸쳐 놓는다.

“뭐 먹을래?”

그녀의 물음에 현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그냥… 순대국이나 먹지예…’ 하고 이야기 하자 혜주가 ‘이모! 순대국 두 개랑 소주 한 병 주세요!’ 하고 손을 들고 당차게 소리친다. 그 목소리에 새벽이라 피로한 식당 이모가 예… 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곤 찬들을 쟁반에 담는 동안 혜주가 가방에서 담배를 꺼낸다.

“필래?”

그 물음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주가 담배를 내밀고는 라이터를 찾다가 아… 하고 살작 인상을 구긴다.

“내 꺼 고장 났다. 니 라이터 있나…?”

“라이터는 있심다.”

그 말에 현성이 라이터를 꺼내자 혜주가 ‘불 좀 붙이 봐라.’ 하고 담배를 입에 물고 입술을 삐죽 내민다. 담배를 물고 살짝 내민 입술이 가슴이 떨릴 정도로 매력적이라만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현성이 그 생각들을 떨쳐내며 찰칵 불을 붙이곤 이내 자신의 담배에도 불을 붙인다. 그 동안 식당 이모가 테이블 위로 밑 반찬들과 소주를 가져다 주자 ‘고마워요, 이모!’ 하고 해주가 싹싹하게 인사를 하고는 바로 소주병을 딴다.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성이 신기한 듯 힐끔 혜주를 바라보자 혜주가 그의 잔에 소주를 채우며 ‘뭐 그래 보는데?’ 하고 물음을 던진다.

“아니요… 그냥… 술 좋아하시나… 해서.”

“술 진짜 싫어 한다.”

쿨하기 짝이 없는 그 대답에 현성이 아… 하고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소주잔을 받는다. 그리고 혜주가 ‘나는 아까도 많이 마셨으니까 반만 마신데이!’ 하고 5부만 채우자 현성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금방 담배를 다 태워버린 그를 보며 재떨이에 담배를 살포시 얹어두고 혜주가 잔을 들자 현성이 두 손으로 공손이 잔을 든다. 생긴 것과는 너무 다른 그 모습에 혜주가 픽 웃음을 터뜨리며 ‘니 은근히 귀엽네?’ 하고 이야기 하자 현성에 예? 하고 눈을 크게 뜬다.

“아이다, 마시라.”

그리고 그녀가 소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크… 하고 쓰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동안 현성이 얼떨떨한 얼굴로 소주잔을 단숨에 비워 버린다. 달짝지근하기보다는 쓴맛이 너무 강해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 지는 그 맛에 혜주가 ‘오늘 엄청 쓴 거 같노…?’ 하고 물음을 던지자 현성이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터져 나오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래도 물김치는 시원하네. 여가 이게 맛있다! 이모가 이거 따로 팔면 내 좀 사갈까 싶은데 그건 안 판다 그러데. 내 물김치 엄청 좋아하는데.”

‘먹어 봐라!’ 하고 혜주가 자신이 먹던 숟가락으로 물김치 국물까지 떠주자 현성이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렇게 자신을 싫어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돌변하니 당황한 듯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 모습에 혜주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니 또 이것도 손으로 받아 먹을라 카는 건 아니제?”

“아, 아닌데요…”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했던지 그녀의 웃음에 현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흔든다.

“팔 아프다!”

그러는 동안 혜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성화하자 현성이 살짝 고개를 숙여 국물을 받아 먹는다.

“뭐 이게 그래 힘들다꼬 이리 전주고 있노? 그냥 먹으면 되는 거지. 이래 이쁜 여자가 떠다 주는데.”

도도한 얼굴로 잘난 척 이야기 하는 게 얼핏 재수가 없어 보일만도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 해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 말에 현성이 대체 모르겠다는 듯 ‘예…’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고개를 숙인 동안 혜주가 재떨이 위에 올려 두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는 살며시 연기를 들이킨다.

“니… 진짜 사람 죽였나?”

그리고 그녀가 던진 물음에 현성이 흠칫 하고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왜 그랬는데…? 목사님 때려 죽였다매?”

돌아가는 법 없는 그녀의 물음에 현성이 말 없이 소주잔을 채운다.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해지셨는데예…?”

그리고 그가 별로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물음을 던지자 혜주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궁금하면 안 되나?’ 하고 오히려 당차게 물음을 던진다. 그 앞에서 이렇게 당당한 사람을 마주한 기억이 얼마 없기에 현성이 화가 나기보다는 조금 신기한 기분마저 느끼며 ‘아니요…’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냥 어릴 때라가…”

“어릴 때라가 빙시 짓 좀 했다꼬? 뭐가 빙시 짓인데?”

그 레파토리는 듣기 싫다는 듯 혜주가 먼저 그의 말을 끊자 현성이 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쉰다. 그러는 동안 식당 이모가 ‘순대국 나왔으예…’ 하고 두 사람 앞에 순대국을 놓자 현성이 ‘한 잔 하시지예…?’하고 소주잔을 든다. 아까 첫 잔을 반 정도 마신 혜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고 다시 한 번 챙 하고 소주잔을 부딪친다. 금새 소주잔을 입안에 털어 넣은 현성이 후우… 하고 그 씁쓸함을 만끽하며 소주만큼이나 쓴웃음을 짓는다.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 어릴 때라가… 못 보고 지나 갔심다. 그 양반이 목사인지도 몰랐고예.”

“내랑 지금 뭐 스무고개 하나…? 뭘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 자꾸 빙빙 돌릴래?”

퉁명스러운 얼굴로 짜증내는 혜주는 현성이 여지껏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는 신선한 느낌이 가득한 그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동안 혜주가 소주병을 들어 그의 잔을 채운다. 그리고 재촉하지 않고 자시의 잔을 채우며 그가 이야기를 하도록 기다려 준다.

“지나 가는데… 여자아 목소리가 들리데예.”

그 기다림 덕분이었을까? 현성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그 날 이야기를 꺼내는지 쓴웃음을 짓는다. 얼핏 보기만 해도 무척이나… 안타까운 모습에 혜주가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끼며 ‘여자아…?’ 하고 물음을 던진다.

“가보이… 교복 입은 여자아랑 술 좀 된 거 같은 아저씨랑 같이 있는데… 여자아는 울고 있고… 아저씨는 바지 벗고 가 붙잡고 억지로… 막 그라고 있대예.”

그 말에 혜주가 ‘진짜?’ 하고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본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현성의 모습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기 보다는 후회만이 가득하다.

“그냥… 모른 척 하고 갔으면 됐는데 열이 받아가… 아가 울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데… 피가 막 거꾸로 솟는 것 같데예…? 그래가 빙시 짓 했지예. 죽일라고 그런 건 아니었심다…”

정말로 죽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연하게 목격한 그 일을 막으려고 했고, 그저 분노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조절하지 못했고, 결국 그는 사망하고 말았다.

“…야! 그게 뭐고…! 그럼… 니가 그 여자아 도와주다가 그래 된 거 아이가…?”

“그랬지예… 근데 아무도 안 믿어 주더라꼬예. 그냥 거짓말 하는 거라고…”

“왜 안 믿어 주는데?!”

덩달아 억울한 듯 혜주가 ‘기가 막히네!’ 하고 씩씩 거리며 그를 바라본다. 그게 그런 내막이 있는지는 정말 생각도 하지 못한 듯 ‘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하고 혜주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를 바라본다. 물론 정말로 현성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 성격에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여자아가 입 다물고 사라졌으니까예.”

그 말에 혜주가 아… 하고 멈칫하며 그를 바라본다.

“누가 신고를 해가… 현장에서 잡혔심다. 정황 상… 그 아저씨는 바지 벗고 있고 훌렁 까놓고 두들겨 맞고 있는데 이상했겠지예… 근데 내 아저씨 때릴 때 도망친 아가… 끝까지 안 나오데예. 도와줄라고 그랬다 캐도 가가 안 나오니까 어쩔 도리가 없다 카데예. 그 와중에 그 아저씨가 병원서 죽어뿌고… 그냥 그래가 아직 미성년이라꼬 2년형 받았심다. 요번에 모범수라가 6개월 감형 받은거고요. 이카나 저카나… 빙시 짓 한 거지예…”

그때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 하는 듯 씁쓸한 얼굴로 현성이 소주잔을 들이킨다.

“…뭐 그딴 년이 다 있노… 무슨…”

기가 막히다는 듯 혜주가 그를 바라본다. 멍한 그 눈빛에 현성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든다.

“제가 빙시 짓 한 거지예… 그 아저씨도 원래는… 전과가 있었다 그카던데 신문 같은데는 그냥 목사라고만 나오데예. 어차피 그냥… 그냥 그런 일 없어도 지는 안 됐을 낍니다. 그냥 그게 좀 더 빨리진 거 뿐이지예.”

나락 까지 떨어진 삶을 너무나도 일찍 맛을 보았기 때문인지 담담한 듯 하면서도 착 가라앉은 그 목소리에 혜주가 ‘뭐라 카노! 그런 게 어딨노!’ 하고 소리친다. 그 목소리에 식당 이모가 깜빡 잠이 들었다 놀란 듯 ‘엄마야…!’ 하고 한숨을 내쉬는 동안 현성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아무도 알려고 하지도 않을 거고, 아무도 믿지도 않을 거니까예.”

그 말에 혜주가 ‘정말 이런 경우가 다 있구나… 세상에…’ 하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사연을 알고 나니 여지껏 그를 미워했던 것 자체가 너무나도 미안하다. 술집 여자란 이유만으로 갖은 오해와 편견을 마주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더욱 더 쉽게 속단하고 선을 그어선 안 됐다. 최소한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잘 알아보고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그게 너무 미안해서 무어라 이야기도 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러다 공허한 얼굴로 술잔을 들어 홀로 술을 마시려는 그에게 혜주가 술잔을 들어 눈 앞에 들이 댄다.

“…내는 니 믿는다. 빙시야.”

그렁그렁한 눈 빛. 그리고 퉁명스러운 그 목소리에 현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 만이라도 고맙심더…’ 하고 잔을 부딪친다. 다시 한 번 더 넘어가는 술이 유난스럽게도 더 쓰다. 크… 하고 인상을 찌푸린 혜주가 힐끔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 한다.

“내 국물 떠다줘.”

“예?”

“쓰다고! 안주, 빨리!”

재촉하는 그 말에 현성이 당황한 듯 움찔한다. 이내 그가 어색하지만 이 꿈결 같은 시간이 그동안의 외로움과 괴로웠던 시간들보다는 훨씬 더 좋단 것을, 그리고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행복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국물 한 숟갈을 뜬 숟가락을 내민다. 망설임 없이 잘 받아먹고서는 후… 하고 그녀가 양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를 바라본다.

“다음부터는 빠릿빠릿하게 해라. 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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