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203화 (완결) (204/204)

<제203화>

“이 세상은 내가 창조한 거야. 내가 바로 창조주라고. 그런 내가 저까짓 인간에게 당할 거라고 생각해?”

“…….”

헤르미오스는 오히려 카스카디아를 나무랐다. 창조주만큼이나 위대한 드래곤이 인간과 말을 섞는 것 자체가 못마땅할 터. 그런 그녀를 카스카디아는 그저 슬픈 눈동자로 바라볼 뿐이었다.

“카스카디아?”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유진이 나지막하게 카스카디아를 불렀다. 이제 헤르미오스의 이 위험천만한 유희를 과연 어떤 식으로 끝내야 할지 결정할 시간이었다.

다시 침묵만 흘렀다. 카스카디아는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한때 사랑했던, 아직도 사랑하는 연인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내가 할게.”

“……당장에라도……? 뭐? 네가 직접 끝내겠다고? 진심이야?”

“…….”

“카스카디아…….”

카스카디아는 울고 있었다. 이것이 제 잔인한 운명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도 그는 운명을 거스르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헤르미오스의 유희에 일정 부분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 손으로 끝낼 수 있게 해줘.”

그의 눈동자를 적시던 눈물이 멍울져 떨어졌다. 목소리는 눈물에 잠겨 낮았지만 단호했다. 결국 유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훗! 여전히 미련하군. 너라고 별수 있을 것 같아?”

“넌 언제나 강했지. 그래서 더 아름다웠어. 나와는 달라 보였거든.”

“최강이라고 불렸던 레드 드래곤 일족의 마지막 생존자가 고작 너 같은 답답하고 우유부단한 녀석이라니…….”

“드래곤은 오늘 멸족하고 말거야. 너는 결코 유희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카스카디아는 헤르미오스를 죽일 생각이었다. 배신감 때문이 아니었다. 헤르미오스의 이 위험한 유희를 끝낼 방법은 그것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헤르미오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언제나 그녀는 카스카디아를 압도했다.

“착각하지 마. 너는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해. 오늘 멸족하는 건 너희 레드 드래곤 일족뿐이라고. 이제 우리 화이트 드래곤만이 남아……!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코웃음을 치며 카스카디아를 비웃던 헤르미오스는 느닷없는 상황에 발버둥 쳤다. 카스카디아가 쏜살같이 날아가 그녀를 바락 안아 버린 것이었다.

아직 본체로 돌아가기 전이었기에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모습으로는 헤르미오스와 카스카디아의 힘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의 팔이 점점 더 헤르미오스를 옥죄어 왔다.

“본체로 돌아가면 너를 감당하지 못할 테지. 같이 가자. 이 방법뿐이야.”

“이거 안 놓아? 당장 놓으라고, 어서!”

그러더니 카스카디아의 몸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드래곤 하트에 레드 드래곤 특유의 화염 기운을 집중시켰다. 본체일 때야 늘상 드래곤 플레어를 내뱉을 때마다 하는 일이었지만, 인간의 몸으로 화염의 기운을 끌어올리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헤르미오스와 카스카디아의 몸이 완전히 밀착된 상황이었기에 그의 심장이 이대로 터져 버린다면 헤르미오스 또한 살기를 바라기는 힘들 것이 뻔했다.

***

그 시각, 대신전 문 앞은 마음 졸이는 나머지 일행들로 정신없었다.

“아, 궁금해 미치겠네. 형님, 정말 이대로 가만히 계실 겁니까?”

“유진이 가만히 있으라잖아.”

“형님이 언제부터 유진 형님 말씀을 그렇게 잘 들으셨다고요. 이러다가 유진 형님하고 카스카디아 님 돌아가시면 어쩌실 겁니까?”

오늘도 역시 팽달수가 가장 호들갑을 떨었다. 이미 푸른 숲의 정령수도 얻었겠다 가리봉으로 돌아갈 일만 남아 있었기에 더 마음이 급한 것일 터.

“달수 동생도 잘 알겠지만, 둘 다 그리 쉽게 죽을 관상은 아니야.”

“이제 관상까지 보세요?”

진심인지, 아니면 팽달수를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드웨인이 뜬금없는 관상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의외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기도 했다.

“어?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진짜네? 끝났나?”

그때 갑자기 대신전 안이 조용해졌다. 다리언은 제 영웅시의 주인공 유진이 마침내 절대악 이블리스를 물리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끼이익.

드디어 커다란 대신전 문이 열리고.

“나온다!”

“형님! 어? 저건……!”

“카… 카스카디아 님!”

유진이 누군가를 안고 있었다. 서로 부둥켜안은 두 여인이었다. 그중 하나는 카스카디아였다. 가슴 섶이 온통 피로 물들어있었다.

“이 여인이 헤르미오스야?”

“응.”

“이블리스는?”

“죽었어. 카스카디아 손에.”

“어쩌다가 카스카디아까지……! 유진, 너는 도대체 뭘 한 거야?”

“어쩔 수 없었어. 그게 카스카디아의 뜻이었거든.”

허무한 결말이었다. 유진은 헤르미오스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이대로 카스카디아의 연인으로 기억되길 원했다. 그게 카스카디아의 뜻이라고 여겼다.

“유진 님을 살리고 싶었을 겁니다. 영웅이 이렇게 사라지는군요.”

다른 이들은 유진의 마지막 말을 오해했다. 카스카디아가 이렇게 죽은 것이 유진을 살리기 위해 몸을 날린 탓이라고 여긴 것이다.

“달수야, 그만 울고 그거 꺼내봐.”

“예? 뭐요?”

“정령수. 이 녀석에게 돌려줘야 할 게 있거든.”

다들 카스카디아의 죽음을 애도하려던 그때. 유진이 급히 정령수를 찾았다. 유진은 이대로 카스카디아를 보낼 생각이 없었다. 꼭 돌려줘야 할 물건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 네. 여기요. 그런데 이거로 살릴 수 있을까요? 지금이라도 푸른 숲으로 가셔서…….”

“불칸 해협을 어떻게 건널 건데? 클라마스를 넘어가도 되지만, 그러면 너무 늦어.”

“하지만 우리가 가진 걸 다 모은다고 해도…….”

“일단 숨만 돌아오게 하면 돼. 다 물러서 있어.”

“아니, 도대체 뭘 하시려고……! 헉!”

팽달수가 푸른 숲에서 제 몫으로 받은 정령수를 급히 카스카디아의 입안에 쏟아부은 유진. 그러더니 이내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치 심장을 쥐어뜯듯 가슴 한가운데에서 마력덩어리를 뽑아 들었다. 오래전 카스카디아가 내주었던 드래곤 하트였다.

***

며칠 뒤.

“아까워?”

“아니, 아깝다는 게 아니라…….”

드래곤 하트를 내어주었건만, 유진은 무사했다. 오히려 낯빛이 안 좋은 건 팽달수였다. 천형(天刑)과도 같은 탈모의 늪에서 이제야 벗어날 수 있다며 남몰래 정령수를 부둥켜안고 좋아하던 것이 불과 엊그제였다.

그러나 이제 그의 손에 정령수는 없었다. 카스카디아를 살려보겠다고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다. 남은 것은 여전한 두 가닥의 머리카락뿐.

“달수 동생 매력은 팔 할이 그 대머리 때문이야.”

“형님 일 아니라고 그렇게 대충 말씀하시지 마세요. 내심 다시 머리카락 생긴다고 얼마나 기대했었는데…….”

“그럼 이거라도 줄까?”

“그건 민우 몫이잖아요. 그냥 대머리로 살 팔자인가 보죠.”

얼마나 상심이 컸으면 드웨인이 애써 달래 보지만, 여전히 뚱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민우 몫의 정령수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어차피 유진이 없었으면 얻지 못했을 정령수였으니 애초에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속 편했다.

“자, 이거.”

“드… 드웨인 형님! 이거 정말 저 주시는 겁니까?”

“그래, 마음 바뀌기 전에 받아.”

“혀… 형님!”

“대신 앞으로 내 아이스크림은 동생이 다 책임지는 거다?”

“그럼요. 네가 죽을 때까지 사드리겠습니다.”

그때 드웨인이 제 몫의 정령수를 내놓았다. 대륙 최강의 용사는 만병통치약 정령수 대신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그것 때문에 유진을 따라 다시 가리봉으로 가겠다는 그였으니 그리 놀랄만한 선택도 아니었다.

가리봉으로 돌아가는 유진과 드웨인, 팽달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틈에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는 인물이 끼어 있었다.

“정말 돌아갈 거야?”

“뭐야? 환자가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돼?”

“이제 괜찮아.”

카스카디아였다. 그의 가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아물어 있었다. 유진의 몸 안에서 더 강해진 드래곤 하트를 돌려받은 덕분이었다.

“정말 괜찮아?”

“그렇대도.”

“그럼 됐고.”

유진이 재차 카스카디아의 상태를 물었다. 상처가 아물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다친 마음은 쉽게 아물지 않을 터. 유진은 애써 담담한 척하는 그의 슬픔을 모른 척 눈감아주었다.

“자자, 서둘러.”

“아, 이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얼른 못 보내 막 좀이 쑤시지?”

“그럼 가지 말든가. 이게 마지막 남은 ‘차원의 서’라고. 나 아니면 너희들은 여기 평생 눌러살아야 해.”

다들 이별을 아쉬워 하는 그때 유독 한 사람만은 더 빨리 유진을 보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대사제 하드리안이었다. 유진에 관한 오해는 풀렸지만, 경계심은 여전했다. 죽음의 기운까지 손에 쥔 전직 마왕이 아리아스 대륙에서 얼쩡대는 모습을 보기 싫은 눈치였다.

“형님, 그것도 나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이 양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오순도순 사는 건 어떻습니까?”

“그럴까.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 그런지 어젯밤에는 꿈에도 우리 하드리안이 나오더라니까.”

“끔찍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라.”

“가지 말라고 해도 갈 테니까 걱정마.”

그렇다고 예전처럼 마냥 유진을 마물 취급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대륙의 평화를 해치던 두 마두 이블리스와 에모렙을 모두 해치운 건 유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고마워, 유진.”

“고맙기는 뭘.”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보고 싶으면 놀러 오시면 되잖아요? 아니면 드웨인 형님처럼 같이 가시든가. 어차피 이제 여기 미련도 없으실 것 아니에요?”

“달수야.”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이제 정말 떠나야 할 때. 카스카디아는 연신 유진의 손을 매만졌다. 이별이 아쉬운 것일 터.

그때 팽달수가 눈치 없이 괜한 말을 꺼냈다. 연인을 떠나보낸 카스카디아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

“진짜 너도 가게? 너 설거지 잘해?”

“설거지? 그게 뭔데?”

“탈락! 얘는 그냥 두고 가자.”

“왜? 나도 데리고 가!”

“설거지가 뭔지도 모르는 놈을 데려가서 어디에 쓰라고!”

그런데 카스카디아는 다른 말에 더 귀를 기울인 모양이었다. 함께 가리봉으로 가자는 말에 덥석 유진 편에 섰다. 이렇게 영웅들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영웅들께서 이렇게 전부 사라지시면 어떻게 합니까?”

“사라지다니? 저기 안 보여?”

“저기 어디……?”

“이제 이곳은 저들 세상이야. 저들이 바로 이곳을 지킬 새로운 영웅들이라고.”

이곳에 남는 것은 다리언뿐. 아쉬워하는 그에게 유진은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그곳에는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샤이언과 렉스, 바란 소렐 황태자와 선제후 파에얀 대공 등이 모여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 진짜 영웅시 속에서나 뵐 수 있겠네요. 그동안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다리언 너라면 언제든지 놀러 와도 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야 가죠.”

“어디는 어디야? ‘가리봉 왕족발’이지. 저 마왕 형님이 족발 하나는 진짜 기똥차게 잘 만드시거든.”

“기회가 되면요.”

떠나가는 유진 일행에게 진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다리언. 그를 남기고 떠나는 팽달수도 아쉬웠던지 다리언에게 행선지를 남겼다. 영웅들의 행선지. 그곳은 ‘가리봉 왕족발’이었다.

<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