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같은 시각 케이아도스 황궁 안은 분주했다. 모두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케이아도스 외성을 에워싼 적들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아리아스 대륙의 모든 국가에서 빠짐없이 병력을 보낸 것처럼 보였다.
“폐하!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피하기는 어디로 피하라는 건가? 저들이 이미 성을 완전히 에워싼 것을 모르는 겐가?”
“저들이 곧 성문을 열고 황궁으로 들이칠 것입니다. 일단 대신전으로 몸을 피하시지요. 지금 의지할 곳은 그곳뿐입니다.”
루피론 케아스 황제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모습이었다. 에모렙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부터 그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낯빛이었다.
“그리 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네.”
“어찌 그리 나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무슨 수가 있었다면 진즉 기별을 했을 테지. 이 지경이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하지만…….”
수하 또한 딱히 반박할 만한 말이 없었다. 사방에서 몰려든 적들이 케이아도스를 에워쌀 때까지 아무런 신탁도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은 곧 이블리스 신 또한 이번만큼은 가망이 없다고 여긴 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폐하! 폐하!”
“주교! 주교가 어찌 이리 온 것이오? 대신전은 어찌하고?”
그때 세일럼 주교가 루피론 케아스 황제를 찾아왔다. 대신전을 지키고 있어야 할 그가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것은 무슨 사달이 나도 크게 났다는 의미였다.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신탁? 그래, 신탁은 뭐랍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말이오?”
다행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신탁이 내려온 것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자 루피론 케아스 황제는 서둘러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것이…….”
“어서 말해 보시오. 어서!”
그러나 세일럼 주교는 어찌 된 일인지 쉽사리 신탁의 내용을 밝히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믿지 못할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
세일럼 주교가 신탁의 내용을 두고 루피론 케아스 황제와 옥신각신하는 사이 유진 일행은 이미 케이아도스 성문에 도달해 있었다. 굳게 닫힌 성문을 마주한 카스카디아는 헤르미오스 걱정에 당장 성문을 때려 부수자며 유진을 채근했다.
“뭘 고민해? 그냥 밀고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야?”
“정오까지 시간을 주겠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아니, 그러니까 왜 정오까지 기다려줘야 하냐고?”
“항복할 시간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약속은 지켜야지.”
유진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뒤로 수만 병사들이 도열 해 있었다. 그의 명령 한마디면 저깟 성문 하나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허물어질 터.
그러나 그는 정오까지 기다릴 심산이었다. 이블리스를 당장 때려죽이고 한시라도 빨리 가리봉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그렇다고 혹시 있을지 모를 애먼 케이아도스 백성들까지 죽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저것들이랑 무슨 약혼식 하러 왔니? 지키기는 뭘 지켜? 그냥 싹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
“이블리스만 죽이면 되지 애먼 병사에 백성들까지 죽일 거야 없잖아.”
“애먼 병사라니? 이블리스 믿고 온갖 잔악한 짓을 다 한 놈들이라고. 이블리스가 어디 따로 있겠어? 저런 놈들이 죄다 이블리스지.”
카스카디아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블리스의 위세를 믿고 별의별 짓을 다 하던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저 강압에 못 이겨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애먼 병사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블리스라는 놈은 도대체 뭡니까?”
“여태껏 뭘 들었냐? 악신 이블리스 몰라?”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래도 명색이 유일하게 카렌 신에 버금가는 어둠의 신이라면서 너무 조용해서요. 케이아도스가 함락되게 생겼는데 너무 잠잠하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이제 적이 되어 마주한 상황이었다. 이블리스와 유진의 이 마지막 전투가 아리아스 대륙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꿀 것이 분명했다.
“원래 음흉한 놈들인 조용한 법이거든. 노래 부르면서 강도질하는 놈 봤냐?”
“그래도 이건 너무 조용한데…….”
그런데 팽달수의 말대로 너무나 조용했다. 높은 성벽 너머로 간간이 겁에 질린 케아스 병사들의 눈동자가 보이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마치 성이 텅 비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저 숨소리를 죽인 채 유진 일행이 어찌 나올 것인지만 살폈다. 그 서슬 퍼렇던 이블리스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카스카디아, 너 진짜 헤르미오스 좋아하냐? 진짜 사랑해?”
“갑자기 그건 왜? 헤르미오스 눈 높아. 너 같은 인간 따위에 흔들릴 그녀가 아니라고.”
“뭔 개소리야.”
“그게 아니면 당연한 걸 왜 물어본 건데?”
그때 유진이 느닷없는 질문을 카스카디아에게 던졌다. 헤르미오스를 진정으로 사랑하냐는 말.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뜬금없는 말이기는 했다.
“헤르미오스가 네가 아는 예전의 그 헤르미오스가 아니라면 어쩔 건데?”
“네가 나를 잘 모르나 본데 애인 얼굴 좀 변했다고 배신하고 그러는 쓰레기 아니다. 얼굴이야 원하는 대로 바꾸면 되는 거지, 뭐.”
어차피 생김새야 드래곤의 권능으로 마음껏 바꿀 수가 있었다. 카스카디아 또한 유진이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았다. 도무지 뭘 말하려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어 농 아닌 농으로 유진의 말을 기다리는 것일 뿐.
“얼굴 말고.”
“그럼 뭐? 여기?”
“손은 좀 내려라. 변태 같아 보여. 거기도 말고.”
카스카디아의 손이 가슴으로 향했다. 제가 사춘기를 갓 지난 여자애 몸이라는 사실을 그새 잊었는지 그의 손이 거침없었다. 괜스레 머쓱해진 유진이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그럼 뭐! 너 이상해. 왜 자꾸 말을 빙빙 돌려?”
“그러니까 내 말은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농은 여기까지였다. 유진이 질문의 진짜 의도를 설명하려던 찰나.
끼이익.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모두의 시선이 성문으로 향했다.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긴장한 채 병장기를 고쳐쥐었다.
“성문이 열린다!”
“뭐야? 진짜 항복하는 건가?”
“이렇게 쉽게 끝난다고?”
“케아스 놈들이 그럴 리가 있어? 긴장들 해. 분명 다 죽을 때까지 덤빌 거라고.”
병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굳게 닫고 수성전을 고집해야 할 이 시점에 성문이 열렸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항복 의사를 밝히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결사항전을 위해서거나.
“짐은 신성제국 케아스의 황제 루피론 케아스다!”
성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난 자는 케아스 황제 루피론 케아스였다. 놀랍게도 그는 혼자였다.
“목소리를 한 번 더럽게 크네.”
“현 시간부로 케아스 제국군은 일체의 교전 행위를 멈출 것이다!”
“저거 항복하겠다는 소리지?”
“그런 것 같은데요. 훗! 자존심은 있어서.”
일체의 교전 행위를 멈추겠다는 말. 항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싸움을 이어갈 의사가 없다는 말임은 분명했다.
“위대하고 유일하신 신의 충복 주교 세일럼입니다.”
“이블리스는 바쁜가 봐?”
“대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주교 세일럼이 유진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다른 설명 없이 대신전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에이, 그건 아니지! 지금 우리더러 호랑이 아가리에 목을 들이밀라는 거야?”
“신의 뜻을 예단하는 것은 불경입니다만, 여러분을 심판하실 것이었다면 굳이 대신전으로 모시고 오라는 신탁을 내려주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 누구보다 마음이 급할 카스카디아였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순순히 세일럼 주교의 뒤를 따르지는 않았다. 이들을 대신전으로 데리고 오게 한 것은 분명 이블리스의 뜻을 터. 절대악 이블리스가 무슨 의도로 이리 나오는 것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비겁하게 듣기 좋은 말로 꼬드겨서 어디 구석에 처박아둔 다음에 죽이려는 거 아니야?”
“감히 그분을 협잡꾼 취급하다니……!”
“너한테나 그분이지 우리한테는 그놈이야. 그놈보고 직접 오라고 해.”
성문이야 시간이 좀 걸릴지는 몰라도 어차피 열렸을 것이었다. 클라마스 산맥에서 대패를 당한 터라 케아스 제국군은 이제 그 수가 일만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블리스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쪽에는 에모렙의 기운까지 흡수한 유진이 있었다. 오란다고 오고 가란다고 가야 할 사람은 유진이 아니라 이블리스라는 의미였다.
“가자. 얼굴 보려고 왔으면 기다리게 하지 말아야지.”
“진짜 저기로 들어가겠다고?”
“그래야 헤르미오스를 구하지.”
“그거야 그렇지만…….”
하지만 유진은 이블리스의 꼼수를 겁내지 않는 눈빛이었다. 원하는 대로 기꺼이 움직여주겠다는 그 모습이 여간 늠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답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간계를 부리는 것이 분명한데도 속아주는 것이니 미련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카스카디아는 더는 반발할 수가 없었다. 대신전에 그토록 보고 싶은 헤르미오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병력은 여기 두고 가셔야 할 것입니다. 교전을 원치 않으신다면요.”
“훗! 어차피 다 몰려갈 생각도 없었어. 그럴 필요도 없고.”
유진 일행의 뒤를 따르려던 바란 황태자와 파에얀 선제후를 막아세우는 세일럼 주교. 유진은 코웃음으로 여유를 드러냈다. 몰려갈 필요도 없다는 말에 세일럼 주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샤이언!”
“네, 카스카디아 님.”
“이것들 수상한 낌새 보이면 바로 총공격해. 우리 신경 쓰지 말고.”
당당히 앞장서 걸어 들어가는 유진. 카스카디아는 괜히 저 때문에 유진이 위험을 무릅쓰는 것 같아 일부러 더 큰 소리로 샤이언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하지만 그랬다가 안에서 포위당하기라도 하시면 어쩌시려고요?”
“이 카스카디아가 겨우 이블리스 따위한테 당할 것 같아? 그리고 유진도 있잖아.”
괜한 기우였다. 설사 성안에서 병사들에게 포위당한다고 해도 유진과 카스카디아, 드웨인에 팽달수까지 있는데 겁낼 것이 없었다. 우르르 몰려간다고 해서 이들 조합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상대라면 당해낼 재간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드래곤 가죽이 두껍기는 두꺼운가 봐. 얼굴도 두꺼운 걸 보면.”
“너 그 음흉한 눈빛 뭐냐? 왜 내 가죽을 탐내는데?”
“됐다. 비켜. 지나가게.”
드웨인은 카스카디아가 자신의 이름을 빼놓은 것에 내심 기분이 상했다. 그러면서도 유진보다 본인을 먼저 언급한 카스카디아가 참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헤르미오스! 헤르미오스, 내가 왔어! 이 카스카디아가 왔다고!”
마침내 성안으로 들어선 카스카디아가 고래고래 헤르미오스를 찾았다. 얼마나 부르고 싶던 이름일 것인가. 그의 목소리가 분명 헤르미오스가 갇혀 있을 케이아도스 대신전을 휘감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어떤 대답도 없었다.
그리고 유진의 표정 또한 무언가 복잡해 보였다. 이블리스 때문에 긴장한 탓도 있겠지만, 덩달아 따라 들어온 다리언은 영웅이 오로지 상대 때문에 얼굴을 굳히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