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반나절 뒤. 시끌벅적하던 크니악 왕궁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크나슈 특유의 보랏빛 안개가 깔리면서 스산함을 더했다.
“그냥 푸른 숲을 터는 게 훨씬 손 쉬웠겠네. 아우, 힘들어 죽겠다.”
엘프 피를 뒤집어쓴 악귀가 서 있었다. 유진이었다. 불과 반나절 만에 크니악 왕성은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죽음의 기운을 사용하는 것은 피차일반이었지만, 유진은 마왕이었다. 숱한 마물들을 상대하며 익힌 감각과 경험을 무시할 수 없었다.
“끄어억.”
“덩치가 커서 그런 건가 트림 소리가 우렁차다?”
“컹!”
엄청난 트림 소리에 왕궁 전체가 다 흔들렸다. 유진과 마찬가지로 엘프 피로 목욕을 한 엄청난 크기의 마물이 입가에 묻은 피를 핥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배부르니까 기분 좋아? 그렇다고 너무 늘어지지는 마. 진짜 싸움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컹!”
둘은 그렇게 반나절 만에 크니악 성에 살아 있던 모든 것들을 지워 버렸다. 다리언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감탄을 쏟아내며 쉴 새 없이 영웅시를 읊조렸을 터였다.
“컹! 컹!”
“응? 살아 있는 놈이 있다고? 하도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대충했나 보네. 어디?”
“컹!”
“으으으…….”
그때 어마어마한 본체를 드러낸 백구가 한 곳을 바라보며 짖어댔다. 어찌나 그 소리가 크던지 이미 죽은 다크 엘프들조차 화들짝 반응할 정도였다.
어딘가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생존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것이 이미 치명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진짜네. 많이 아프겠다.”
배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꾸역꾸역 솟구치는 핏물을 막아 볼 정신도 없어 보였다. 제 손으로 그리 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유진은 얼굴을 찡그렸다. 숱하게 이런 광경을 보아왔건만, 그는 아직도 피 냄새에 익숙하지 않았다.
“미…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 그런 말을 듣다니 전혀 예상 밖인데? 너 다크 엘프 맞아?”
아직 숨어 붙어 있는 다크 엘프가 건넨 첫 마디는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유진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저주를 퍼부을 것이라고 예상했건만.
“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래, 다 자업자득이지. 그래도 양심은 있네. 좀 늦은 것 같기는 하지만.”
여인이었다. 좀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엘프였지만, 분명 철없는 어린 녀석은 아닐 것 같았다.
“그… 그 힘을 어찌할 것입니까?”
“뭐? 이거? 에모렙 잡으려고 모은 힘인데 일단 에모렙부터 처리하고 봐야지.”
엘프 여인은 대뜸 유진에게 죽음의 기운을 어찌 사용할 것인지 물었다. 크니악 왕성에 이제 더는 살아 있는 엘프가 존재하지 않았다. 막 숨이 끊길 듯한 이 여성을 제외하고는. 그 모든 죽음의 기운은 고스란히 유진과 백구의 몫이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흑색 구체가 그들 주변을 감싸고 있는 이유였다.
“불… 불쌍한 아이입니다.”
“글쎄. 방금 그 말을 삼원왕들이 들으면 펄쩍 뛸 것 같은데? 동의하기 힘든 말인 거 너도 잘 알 거 아니야?”
“푸… 푸른 숲에서 버려진 나를 살리기 위해 그 길을 선택했죠.”
여인은 울고 있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모든 원죄를 짊어진 에모렙을 안쓰럽게 여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남을 죽여서야 쓰나. 내 목숨 소중한 것만큼 남의 목숨도 결코 가볍지않다는 걸 알았어야지.”
“변명하자는 게 아닙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촉촉한 여인의 눈동자가 더욱 서글퍼보였다. 유진을 바라보는 그녀는 목숨을 구걸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죽는다는 두려움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유진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옛날 에모렙이 그랬든 유진 또한 죽음의 기운에 잡아먹힌 괴물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누군가 그러더군. 소중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그 의지를 잃지 말라고.”
“누구나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는 법입니다. 다만 그 방법이 다를 뿐이죠.”
“그건 맞는 말이네. 걱정하지 마. 누구처럼 폭주하지는 않을 테니까.”
유진은 여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모렙 또한 소중한 이 여인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기운을 선택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했던 그 마음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잘못된 방법을 선택한 것일 뿐.
“그 방법 말고는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없다면 어쩔 것입니까?”
“에모렙이 그랬다는 건가?”
“어미가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거죠.”
“이해가 가기는 하네. 그렇다고 용서하겠다는 말은 아니야. 내가 용서할 문제도 아니고.”
놀랍게도 여인은 에모렙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아들이 이렇듯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 모두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말렸어야 했습니다.”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어.”
후회로 끝낼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죽음의 기운을 거둘 때였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부탁? 나한테?”
“그 애에게 전해 주십시오.”
“…….”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이 어미 때문에 더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입니다.”
유진은 이것이 여인의 유언이 되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여인은 아들을 말리고자 했다. 아들이 더는 흉폭하고 잔인한 괴물로 기억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직접 전하지 그래?”
“쿨럭! 아… 아닙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그 애 마음이 또다시 약해질 것입니다. 이 어미를 위해서라도 꼭 사죄하라고 전해 주십시오.”
“음…….”
여인에게 죽음의 기운 일부를 되돌려주려고 했지만, 여인은 그런 유진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도 이런 식으로 연명하는 것에 회의감을 느껴왔을 터.
***
그 시각, 만년설로 뒤덮인 북쪽 클라마스 산맥이 피로 물들고 있었다. 인간과 마물의 피가 뒤엉켜 얼어붙었다. 만년설에 갇힌 이 핏자국들이 먼 훗날 오늘의 혈전을 증언할 터.
“오우씨! 더럽게 많네.”
팽달수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쌍소리가 터져 나왔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죽이고 또 죽여도 케아스 제국군과 마물 군단이 끊임없이 클라마스 능선을 따라 올랐다.
“달수 너 자꾸 농땡이 피울래?”
“여태까지 허리 한 번 못 굽히고 싸운 거 못 보셨어요? 처음으로 잠깐 숨 고르는 거라고요.”
“지금 숨 고를 새가 어디 있어? 저기 저 새까맣게 많은 놈들 안 보여?”
“숨을 쉬어야 싸우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기운을 추스르는 팽달수는 닦달하는 카스카디아에게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다.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내 전력을 다하다가 이제 겨우 한 번 숨을 고르던 차였기 때문이었다.
“어이, 카스카디아! 너 지금 괜히 달수 동생 핑계 대고 쉬려는 거지? 이게 어디서 잔꾀를 부려!”
“잔꾀? 벌써 잊었냐? 나 드래곤이야. 저깟 놈들 한 달 내내 상대해도 지치지 않을 위대한 드래곤이라고.”
“그런 놈이 무슨 땀을 그리 비 오듯 흘리냐?”
사실 카스카디아도 팽달수를 꾸짖는 척하며 숨을 고르던 차였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지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와,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이렇게 드래곤한테도 뒤통수를 맞네요! 그런데 드래곤은 파충류 아니에요? 파충류도 땀을 흘리나?”
“누가 땀을 흘렸다고 그래!”
“그럼 그건 뭐 땀이 아니라 오줌이냐? 겁나서 오줌 지린 거야?”
“누가 오줌 지렸다고 그래!”
드래곤이 땀을 흘릴 리 없었다. 물론 케아스 제국군이나 마물 군단 따위에게 겁을 먹고 오줌을 지렸을 리도 없었다. 모두 드웨인의 입담일 뿐.
“그나저나 유진 형님은 잘 하고 계실지 걱정이네요. 혼자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네 걱정이나 해. 우리가 유진 걱정할 때야? 그리고 걔도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할 거야. 네가 옆에 있어 봤자 짐만 되었을 거라고.”
팽달수는 유진이 걱정이었다. 유진이 혹여 죽기라도 한다면 다시는 가리봉 땅을 밟지 못할 터.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드웨인 말처럼 별 도움은 안 될 테지만, 죽든 살든 옆에 있어 주었어야 한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그런 존재가 있지 않습니까? 보기만 해도 힘이 나는 그런 사람이요. 저처럼.”
“그래, 보기만 해도 빛이 나기는 하지.”
“농담 말고요.”
농담으로 받아쳤지만, 드웨인도 내심 유진을 걱정하던 참이었다. 모든 짐을 유진에게 떠넘긴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일전에 다리언이 비꼬았던 것처럼 어느새 비겁한 겁쟁이가 된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푹 쉬었으면 다시 힘이나 쓰셔. 여기를 얼른 정리해야 유진 응원하러 갈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이 팽달수만 믿으시라고요. 이리 와. 이 마물 새끼들아!”
유진을 위해 지금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였다. 어서 빨리 케아스 제국군과 마물 군단을 정리하고 유진을 도우러 달려가는 것이었다.
***
날이 새고 그다음 날. 불칸 해협을 건넌 에모렙과 휘하 다크 엘프 군단이 크니악 왕성으로 돌아왔다. 사방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사랑하는 가족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죽음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주인 잃은 삭은 거죽만 남아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누가 감히 우리 형제들을……!”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어둠의 신 이블리스의 요청으로 케이아도스에 다녀온 불과 그 짧은 기간에 이런 참변이 벌어진 것이었다.
원수의 눈을 후벼 파고 팔다리를 자르는 것은 물론 내장을 잘근잘근 잘라줘도 이 원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모두 복수심에 두 눈이 불타올랐다.
“이제 왔어? 왜 이리 늦고 그래? 어디 경치 좋은 데 둘러보다 왔나 봐? 기다리느라 얼마나 지루했다고.”
그때 중앙 광장 분수 옆에서 한가롭게 기지개를 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유진이었다. 분수에서 깨끗한 물이 펑펑 솟구치는데도 유진은 여전히 피범벅이었다.
“네가 유진인가?”
“에모렙이 너구나?”
유진과 에모렙은 순식간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에모렙이 순식간에 기운을 뿜어냈다. 마치 창을 날리듯 길게 뻗은 죽음의 기운이 당장에라도 유진을 도륙할 태세였다.
“네놈 짓인가?”
에모렙이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눈앞은 온통 죽음의 흔적들뿐이었다.
“컹!”
“보는 바대로. 백구랑 내가 힘 좀 썼지.”
에모렙의 기운에 화답이라도 하듯 백구 또한 심상치 않은 죽음의 기운을 자랑했다. 그제야 본체를 드러낸 백구를 발견한 다크 엘프 군단 병사들이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제껏 반신반의했는데 이블리스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군.”
“이블리스가 뭐라고 그랬는데? 이제까지 본 사람 중에 내가 가장 잘 생겼대?”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라고 하더군.”
아직 유진은 기운을 드러내 보이지 않은 상태. 하지만 에모렙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