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에모렙은 이곳 크나슈의 주인이었다. 백구가 방금 집어삼킨 다크 엘프들의 왕이 아니던가. 백구 뱃속에서 녹아내리고 있을 그 조무래기 전초들처럼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이게 다 미련 곰탱이 같은 네놈들 때문이잖아!”
“미…… 미련 곰탱이? 지금 감히 신성한 강 하우릴의 주인인 나 파비우를 미…… 미련 곰탱이라고 불렀느냐!”
에모렙이 돌아오고 있다는 소리에 팽달수가 가장 먼저 발끈했다. 그의 말대로 삼원왕들이 유진 일행더러 능력을 검증해보라며 시간을 끌지만 않았어도 벌써 크나슈를 정리하고 에모렙까지 처리할 전략을 세우고 있었을 터였다.
파비우는 졸지에 팽달수에게 바보 취급을 당하자 분을 참지 못했다. 그 또한 지금 이렇게 자존심만 세우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솟구쳐 오르는 화를 참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미련한 놈이 자존심만 더럽게 세서는 아직도 제가 일을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어 놨는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뭐? 신성한 강 하우릴의 주인? 지금 이 판국에 그따위 자랑이 그렇게 하고 싶냐? 나도 서울의 중심 가리봉의 주인이었어. 이거 왜 이래!”
“달수야? 솔직히 가리봉이 서울의 중심은 아니지.”
“형님은 화도 안 납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말싸움이라는 것이 대개 이러했다. 처음에는 죽자 살자 덤비다가 나중에는 원래 발단과 목적도 잊은 채 유치한 말장난이 되는 법. 그래도 팽달수는 말싸움이 무엇 때문에 시작되었는지를 까먹지 않았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에모렙이 돌아오고 있다고?”
“지금쯤 불칸 해협에 당도했을 것이다.”
저 멀리 바다 건너 사정에 이리 밝은 것을 보면 아마 에모렙이 이끄는 다크 엘프 군단의 동태를 수시로 살피기 위해 수하들을 붙여둔 모양이었다. 불칸 해협에서 이곳 크나슈까지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거리. 곧 에모렙이 이끄는 다크 엘프 정예병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 대응책을 강구 해야 했다.
“생각보다 빠르기는 하네.”
“이미 알고 있었나?”
“아니.”
“그런데 어째서 놀라지 않지?”
“돌머리가 아니라면 우리가 케이아도스 주변에 없다는 사실을 지금쯤은 알아차렸어야 하니까.”
유진은 이미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케아스에서 불칸 해협으로 방향을 튼 이후 그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이블리스나 에모렙이 바보가 아니라면 오지 않는 적수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을 터.
“예상했다는 것이로군. 그게 전부가 아니야.”
“뭐가 또 있어?”
“클라마스 산맥.”
“클라마스? 북쪽 얼음산을 말하는 거야?”
“그래. 이블리스의 군대가 얼음산을 넘을 거야.”
첩첩산중이었다.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에모렙과 그의 군단만이 아니었다. 이블리스의 군대 또한 이곳으로 진군해 오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은 건널 엄두도 못 낼 불칸 해협을 피하기위해 일부러 북쪽 얼음산 쪽으로 방향을 잡은 모양이었다. 인간이 견디기 힘든 극한의 환경이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칸 해협보다는 클라마스 산맥이 수월할 터였다. 그만큼 이블리스도 이번 전투에 많은 것을 걸었다는 의미였다.
“이블리스의 군대라면 누구를 말하는 거지?”
“전부 다. 그 녀석을 따르는 인간들은 물론 마물들까지 전부.”
이블리스의 군대란 단순히 케아스 제국군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블리스가 빚어낸 마물들 까지 총동원된 눈치였다. 묘한 구도였다. 인간과 마물, 다크 엘프들이 유진 일행을 노리고 있었다.
“그래? 이거 점점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네. 누구 덕에 괜히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지 않았으면 불칸 해협이나 클라마스 산맥 어디로든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아쉽군.”
“내 핑계를 대는 건가?”
“누구 탓을 하겠다는 건 아니야. 다만 다음번에는 그러지 말라고. 내가 두 번씩 관대하게 넘어가고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삼원왕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다만 운명을 건 전투를 앞둔 시점에서 확실하게 해 둘 것이 있었다. 더는 쓸데없이 힘을 빼는 일은 없어야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불쑥 찾아와 정령수를 내놓으라며 생떼를 쓴 네 녀석은 하나도 잘못한 게 없다는 건가?”
“인정. 좀 당황스럽기는 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너랑은 달라.”
“뭐가 다르다는 거지?”
“지금 너 고민하고 있잖아?”
“고…… 고민이라니?”
파비우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애초 유진 일행이 허락 없이 엘프들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은 명백한 잘못이었다. 미리 언질을 주었다면 불필요한 무력 충돌은 막을 수 있었을 터.
의외로 유진은 자신의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파비우를 몰아세웠다. 확답을 듣고 싶은 게 있는 눈치였다.
“우리를 삼켜야 할지 뱉어야 할지 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난 딱히 너희들에게 원한 같은 거 없어. 그냥 거래를 하고 싶을 뿐이지. 거래가 내키지 않으면 그냥 안 하면 되는 거야. 괜히 날 화나게 하지는 말라고. 내가 성질이 원체 더러워서 받은 건 꼭 돌려줘야 하거든.”
얼굴빛은 애써 평온함을 유지했지만, 파비우는 내심 뜨끔했다. 유진과 백구가 죽음의 기운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지금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들을 죽여 후환을 없애든가. 아니면 정령수를 좀 내주더라도 손을 잡고 에모렙을 상대하든가.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능력도 안 되는 인간에게 속아 괜히 에모렙의 화만 돋우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러면서도 다크 엘프들을 일소하고픈 욕심만은 여전했다. 에모렙이 회군해 이곳으로 오고 있는 지금 결론은 빨리 내릴수록 좋았다.
“협박하는 건가?”
“협박? 그럴 거면 너희 삼형제 중 적어도 한 놈 정도는 벌써 모가지를 비틀어 버렸겠지. 그게 ‘협박’ 아닌가?”
“…….”
유진은 최대한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예전 성질대로였다면 벌써 어느 쪽이든 사상자가 발생했을 터였다.
파비우 또한 유진이 빈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충분히 그럴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방금 목격하지 않았는가.
“아, 그리고 이건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두는 건데 얘는 나보다 성질이 더 더러워. 아까 봤지? 그냥 삼켜 버리는 거. 눈 돌아가면 그냥 다 물어뜯고 본다고.”
“뿌웅.”
파비우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일까. 유진은 백구에 관한 말도 잊지 않았다. 귀여운 눈웃음을 흘리며 꼬리를 흔들던 백구는 주인이 뭘 바라는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주인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물어뜯겠다는 의지를 앙증맞은 방귀 소리로 표현했다.
“욱!”
“저거 봐. 말도 안 섞는 거. 아무튼 너희는 이제 큰일 났어.”
“큰일이라니?”
“아니. 백구가 아까 먹은 걸 그새 다 소화시켰잖아.”
“그게 왜 큰일이라는 거지?”
조그마한 몸집에 비해 방귀 냄새는 여간 지독한 것이 아니었다. 곧바로 코를 틀어막았음에도 파비우는 숨이 가빠졌다. 그 틈을 놓칠세라 유진이 말을 이어갔다.
“끼응.”
“지금 말하는 거 들었어? 배고프다네. 조심해. 우리 백구는 배고플 때 가장 예민해지거든.”
“……!”
아까 다크 엘프들을 잘근잘근 씹어 먹던 백구의 모습을 삼원왕 중 으뜸인 파비우마저 간담이 서늘하게 했다. 저 올망졸망 깜찍한 강아지가 고대마물 바게스트라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자신 또한 한 줌 방귀가 되어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가 그의 고민을 덜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이거 완전 독박 쓰는 거 아닙니까? 저것들도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요.”
“타이밍이 영 안 좋기는 하네. 여기서 찢어지자.”
“찢어지자니?”
“드웨인하고 카스카디아는 클라마스에 좀 다녀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결코 우리에게 이로운 전개는 아니었다. 이럴 심산으로 여기 온 것이 아니었다. 뭉그적거리다가 사방팔방에서 적을 맞이한 형국이었다.
일단 병력을 나누기로 했다. 드웨인과 카스카디아에게 케아스 제국군과 마물 군단을 맡겼다. 어차피 그들은 죽음의 기운을 견뎌낼 수 없으니, 그편이 더 나을 터였다.
다크 엘프가 끼어들지 않는다면 본인들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그들이었다. 어찌 보면 에모렙과 이블리스가 따로 움직이는 것이 우리를 도운 꼴이었다.
“이블리스 졸개들 막으라는 거지?”
“케아스 제국군이야 별거 아니겠지만, 마물 군단은 좀 까다로울 거야.”
“까다롭기는. 그 잡것들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케아스 제국군쯤이야 이들에게 애송이일 터. 문제는 마물 군단이었다. 이블리스가 어떤 고대 마물을 불러냈을지 모를 일이었다. 간혹 드웨인이나 카스카디아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마물들을 숨겨두었을 수도 있었다.
에모렙을 쓰러뜨릴 때까지 이들이 버텨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어차피 이블리스는 대신전에 묶여 있는 몸. 그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승산은 있었다.
“믿어도 되지?”
“뭐냐, 그 눈빛? 설마 지금 나 카스카디아 님의 실력을 못 믿겠다는 거야?”
“덤벙대지 말고 잘 해.”
“그 어투 몹시 불편하거든!”
“드웨인 너도 조심하고.”
“난 이 손으로 직접 네 그 목 따기 전까지 절대 안 죽어.”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둘 다 내가 아니었다면 굳이 이런 위험한 상황에 놓일 일이 없었다. 평소답지 않은 내 어투에 녀석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멋쩍은 대꾸만 할 뿐이었다.
“달수랑 다리언도 데려가. 잘 챙겨주고.”
“형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죽어도 형님 곁에서…….”
“죽기는 왜 죽어? 돌아가서 봉 여사 안 볼 거야? 애타게 널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아니, 꼭 죽겠다는 게 아니라…… 어쨌든 형님 옆에 남겠습니다!”
“됐어. 드웨인이랑 같이 가. 그게 더 안심되니까.”
달수를 여기 남겨둘 수는 없었다. 그동안 이 형님 챙긴다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던가. 이제 정말 성진이와 같은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애먼 다리언도 챙겨야 했다. 결국 에모렙을 상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와 백구의 몫이 되었다.
“너희는 어떻게 할래?”
“……?”
“다 듣고 있었잖아. 뭘 못 들은 척하고 그래?”
“우리?”
마지막으로 삼원왕들. 그들 뒤에 도열한 엘프 군단이 나와 마찬가지로 주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엘프 세계의 판도가 달라질 터. 엘프들이 마른 침을 삼키며 파비우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아직도 고민 중이야? 결정은 빨리 내리는 게 좋아. 여기저기 간 보다가 죽도 밥도 안 될 수 있으니까.”
“우리는…….”
옆에 있어봤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죽음의 기운을 다루지 못하는 것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확실히 해둘 필요는 있었다. 내 등에 칼을 꽂을 지도 모를 이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닐 수는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