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불과 십여 명의 다크 엘프들이었다. 삼원왕이 이끄는 엘프 군단이 갑작스럽게 출병한 것을 눈치채고 병력 규모를 파악하고 진격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접근한 것이 분명했다.
“형님, 쟤들 물러서는데요?”
다크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삼원왕들은 곧바로 병력을 뒤로 물렸다. 순식간에 생명력을 앗아가는 무시무시한 다크 엘프들을 피하고 싶었을 테지만, 우리가 정말로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클 것이었다.
“비겁한 새끼들. 하여간 상종 못 할 족속이라니까.”
“우리 실력이 어떤지 확인하고 싶을 거야.”
금세 카스카디아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딱히 삼원왕들의 선택을 헐뜯고 싶지는 않았다. 나 같아도 저랬을 테니까. 저들과 과거의 악연으로 묶인 카스카디아와는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 있었다.
“그럼 어디 내가 한 번 나서볼까?”
“까불다가 달수처럼 머리 빠지면 어쩌려고? 머리카락에 스치기만 해도 저리될걸?”
“그러면 안 되지.”
그때 드웨인이 듬직한 표정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일전에 베냐스에서 저항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죽음의 기운에 당할 뻔했던 것을 갚아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굳은 결기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오늘따라 더 휑해 보이는 달수 녀석의 머리 탓이었다.
“유진, 내가 아무리 의리의 드래곤이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너에게 전적으로 맡길게. 이 외모에 머리 빠지는 건 좀 너무하잖아.”
“저도 도와드리고 싶지만, 이 두 가닥만은 지키고 싶습니다.”
카스카디아와 달수 또한 서둘러 꽁무니를 뺐다. 다크 엘프들에게 잘못 걸렸다가는 머리카락은커녕 정말 뼈도 못 추리고 핏기없는 가죽만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어.”
저 다크 엘프들은 겨우 전초일 뿐이었다. 십여 명이 전부인 저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 크나슈에는 저런 다크 엘프들이 수천 마리나 모여 있었다.
그런데 벌써 이렇게 혼자가 되었다. 진심이었다. 전혀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만 막상 또 이렇게 되고 나니 외롭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이었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카스카디아와 드웨인이라고 해도 죽음의 기운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마음껏 저 산송장들을 상대하려면 차라리 다 멀찍이 물러서서 가만히 있어주는 편이 나았다.
[영웅은 외로웠다. 불모(不毛)의 두려움에 용사들조차 영웅을 도울 수 없었다.]
그때 다리언의 노랫소리가 짙은 안개를 타고 늪을 휘감았다. 다크 엘프들의 출현과 함께 일순간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걸 꼭 그렇게 큰 소리로 노래 불러야 하냐?”
“사실 그대로 남기는 게 바로 제가 해야 할 의무거든요.”
하필 다리언이 노래가사가 나만 남겨두고 꽁무니를 빼는 나머지를 꾸짖는 것 같았다. 듣고 있기 멋쩍었는지 카스카디아가 다리언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했지만, 다리언은 정말 영웅시에 진심이었다.
“인간들의 의리라는 게 이렇게 허무하고 덧없는 거라니까. 나야 어쩔 수 없이 빠지지만, 너희들은 너무한 거 아니야?”
“저도 어쩔 수 없다고요. 아시면서.”
오랫동안 남을 다리언의 영웅시를 의식해서일까. 카스카디아가 스스로를 항변하듯 일부러 큰 소리로 드웨인과 달수를 꾸짖었다. 달수 또한 어쩔 수 없는 제 입장을 주절거려 보지만, 다리언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자, 이거.”
“이거로 뭐하라고? 여기서 설거지라도 해?”
“내가 이제껏 사용했던 건틀렛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거야. 이 드웨인 하인라이트의 애병이라고 할 수 있지. 비록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선봉에 나설 수는 없지만, 마음만은 함께 하고 있다는 거 항상 잊지 마.”
혼자만 가만히 있기가 민망했던지 이번에는 드웨인이 앞으로 나섰다. 좀처럼 벗어놓지 않던 빨간 고무장갑 건틀렛을 기꺼이 내주었다. 아끼는 애병을 양보하는 모습이 맨입으로 해결하려는 카스카디아나 달수 녀석보다는 양심적으로 보였다.
“하여간 혓바닥만 길어져서는. 됐어. 다 비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 소중한 건틀렛을……!”
고무장갑 하나 낀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드웨인의 진심이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고맙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륙 최강의 용사라며 으스댈 때는 언제고 몸을 사리는 모습이 얄밉기는 했다. 그래서 일부러 녀석이 애지중지하는 고무장갑 건틀렛을 홱 던져주었다.
“끼응.”
“네가 처리하겠다고? 역시 백구밖에 없네. 아, 이 백구만도 못한 놈들.”
“…….”
“뭘 또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혼자 남게 될 내가 처량해 보였는지 백구가 꼬리를 흔들어주었다. 간식도 챙길 겸 곁에 남겠다는 표시였다. 엄청난 식욕 덕에 나와 덩달아 죽음의 기운을 받아들였던 백구였다. 지금으로서는 유일하게 나를 도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고.
[이때 영웅 유진의 단짝 백구가 당당한 걸음을 내디뎠다. 온몸의 털이 다 빠지는 한이 있어도 다크 엘프들로부터 영웅을 지켜내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꼿꼿하게 곧추선 그의 꼬리에서…….]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지 다리언이 다시 노래를 읊어댔다. 이를 멀뚱히 듣고 있어야만 하는 드웨인과 카스카디아, 달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래, 같이 가자. 간식은 빼먹지 않고 챙겨줄게.”
“끼응.”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나는 든든한 조력자가 생겨서 좋고 백구는 간식을 챙길 수 있으니까 나쁠 것이 없었다.
***
그 시각 삼원왕들은 멀찍이 거리를 유지한 채 유진 일행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여차하면 바로 군단을 물릴 수 있는 거리였다.
“드디어 움직이려나 봅니다.”
“그런데 저 강아지는 왜 데리고 가는 거지?”
유진 일행이 둘로 쪼개지자 막내 골로디아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아마도 다크 엘프들을 상대하는 것은 선두에 남은 유진뿐인 듯 보였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유진 옆에 강아지 한 마리가 남았다는 점이었다. 둘째 카렐라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래곤인 카스카디아와 용사를 자처하는 인간들조차 뒤로 물러서게 해놓고 한주먹거리도 안 될 강아지를 대동하는 것이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보통 강아지가 아니야.”
“보통 강아지가 아니라니요? 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꼬리 흔드는 거 보십시오. 인간들이 기르는 미련한 강아지가 분명한데요?”
둘과는 달리 첫째 파비우는 곧바로 저 강아지가 평범한 강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의 눈에 강아지는 시도 때도 없이 꼬리나 흔들어대는 미련한 동물이 아니었다.
“저기를 보라고.”
그의 말을 증명하듯 강아지가 그 순간 갑자기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금세 부풀어 오른 몸집은 이내 엘프 예닐곱이 덩치를 합친 것보다 커졌다.
덩치만 커진 것이 아니었다. 순하기 그지없던 눈빛은 금세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예리해졌다. 눈송이 같던 앞발에는 날 선 발톱이 솟아 있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는 짙은 안개 속에서도 홀연히 빛났다.
“저…… 저게 뭡니까, 형님?”
“고대마물 바게스트.”
파비우는 백구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고대마물 바게스트. 숱한 전설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마물이요? 그럼 이블리스가 만든 그 잡것들 중 하나라는 말씀이잖아요?”
“아니. 저건 달라.”
“하지만 마물들은 모두 이블리스가 어둠의 기운을 뭉쳐 만들어낸 거 아닙니까?”
그러나 둘째 카렐라스와 막내 골로디아는 뭘 그리 긴장하냐는 투로 백구를 얕보았다. 마물이 고작해야 마물 아니겠냐는 의미였다.
“저걸 보고도 그리 말할 수 있을까?”
“저 마물이 어떻게 죽음의 기운을……! 저게 가능한 겁니까?”
역시 이번에도 백구의 진짜 정체를 알아본 것은 첫째 파비우뿐이었다. 달려드는 다크 엘프들을 똑같은 죽음의 기운이 실린 앞발로 쳐내는 모습은 이블리스가 조잡하게 빚어낸 ‘잡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강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저 유진이라는 인간처럼 죽음의 기운을 다룰 줄 아는 거야.”
“저놈도 살려둬서는 안 되겠군요.”
“그래. 하지만…….”
에모렙과 같은 괴물이 둘이나 더 등장한 것이었다. 반드시 죽여야 했다. 에모렙 하나만으로 감당하기 벅찬 그들이었기에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첫째 파비우는 말끝을 흐렸다. 다크 엘프들을 장난감 가지고 놀 듯 유린하는 백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마치 필멸의 원수 에모렙을 바라보듯 두려움이 가득했다.
***
“백구 잘 한다!”
“그렇지! 목덜미를 그냥 콱 깨물어 버려!”
“깨물어가 뭡니까? 물어뜯으라고 하셔야지.”
“이거나 그거나.”
묵묵히 전투를 바라보고 있는 삼원왕과 달리 유진 일행 쪽은 시끌벅적했다. 목이 터져라 다크 엘프를 상대하고 있는 유진과 백구를 응원했다.
“유진, 허리를 비틀어 공격을 흘린 다음에…… 그래, 그렇게!”
“역시 내 말대로 하니까 되잖아. 다크 엘프들도 별거 아니라고.”
드웨인과 카스카디아는 경쟁하듯 훈수를 두었다. 누가 보면 은퇴한 전대 고수가 파릇파릇한 신출내기를 가르치는 것 같았다.
[영웅 유진이 내지른 주먹이 짙은 죽음의 기운을 흩어놓았다. 백구 또한 강한 턱으로 다크 엘프들의 머리통을 으깨 버리는데…… 한편 두려움에 차마 앞으로 나서지 못했던 용사들은 여전히 무기력했다. 겨우 용기를 내 목소리를 내보지만 공허한 메아리만이…… (중략)…….]
말로만 젠체하는 모습이 눈꼴 시렸던지 다리언은 노래로 이들의 행동을 비꼬았다. 졸지에 무기력한 용사가 되어 버린 드웨인과 카스카디아의 고개가 서둘러 다리언 쪽으로 향했다.
“그 용사들에 나는 포함 안 되는 거지?”
“카스카디아 님도 포함한 건데요?”
“드래곤이 왜 용사야? 그리고 내가 뭐가 무기력하다는 건데? 지금 유진이 내 말대로 해서 다크 엘프 모가지 따는 거 못 봤어?”
“굳이 소리치지 않으셨어도 알아서 잘 하셨을 것 같은데요…….”
드래곤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다리언은 달랐다. 자신의 이름과 함께 역사 속에 남을 영웅시에 거짓을 섞을 수는 없었다. 설령 드래곤이 위협한다고 해도.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딱 보면 모르겠어? 내가 여기서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니까 유진이 고민 없이 주먹을 내지른 거잖아!”
“주둥이에 치질 걸렸냐? 유진이 언제 네 말을 들었어? 내 말을 들어서 저리 이기고 있는 거지. 아까 네 말대로 허리를 비틀었으면 어찌 되었을 것 같냐? 오른쪽이 그대로 드러났을 거라고. 역습 당하기 십상이지.”
카스카디아의 위협 아닌 위협은 엉겁결에 카스카디아와 드웨인의 설전으로 이어졌다. 서로 제 덕에 유진이 다크 엘프들을 잘 상대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옆구리로 똥싸는 소리하지 말고 너는 빠져. 사천 살이 내일 모레인 내가 아무렴 너보다 모를까.”
“드래곤들은 하루를 일 년으로 세나 보지? 사천 살은 개뿔. 열 살짜리 꼬맹이도 너보다는 잘 싸우겠다.”
“뭐야? 실력 한 번 제대로 보여줄까?”
저러다가 둘이 주먹다짐을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다리언이 얼굴을 찌푸렸다.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영웅의 고군분투가 눈물겨웠다. 무능을 숨기고픈 용사들은 더 목소리를 높였다. 적들이 두려워 몸을 숨긴 용사들은 부끄러움을 몰랐다.]
그리고 이내 ‘무기력한’ 용사들은 무능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파렴치한 무리로 전락했다. 역사는 그들을 영원히 그리 기억할 것이 분명했다.
“…….”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드잡이라도 벌이려던 드웨인과 카스카디아는 머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조용히 입을 닫을 수밖에. 팽달수는 그 틈에 혼자 빠져나가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