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출정은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 미룰 일이 아니었다. 유진도 삼원왕들의 진짜 속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순순히 선봉에 섰다. 지금은 일단 능력을 증명할 때였다.
“대단하군요! 이 많은 엘프 군단을 직접 제 눈으로 보게 되다니……!”
“당장 저놈들이 우리를 죽이겠다고 덤벼들 수도 있어.”
“불세출의 영웅 유진과 친구들! 엘프들을 이끌고 크냐슈를 정벌하다! 캬! 제목 어떻습니까?”
유진 일행 뒤로 정연하게 도열해 있는 엘프 군단의 위용에 다리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수려한 외모의 엘프들이 멋들어진 황금빛 무구까지 갖춰 입고 정렬한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누가 시인 아니랄까 봐 다리언은 즉흥적으로 새로운 영웅시의 제목을 지어냈다. 카스카디아를 내세웠던 저번 영웅시와 달리 이번에는 유진의 이름이 도드라졌다.
“직업병치고는 심한데? 너 그러다 진짜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산재보험이고 뭐고 없을 거 아니야?”
“저 같은 떠돌이 가객에게 그보다 더 큰 영광은 없죠.”
직업의식 하나만큼은 높이 살 만했다. 전장으로 향하는 이의 얼굴 표정치고는 너무나도 해맑지 않은가.
“너도 참 대단하다. 그건 그렇고 쟤들 진짜 제대로 붙을 생각인가 본데요, 형님?”
“에모렙이 안방을 비우는 게 흔한 일이 아니니까. 생각보다 많이 모이기는 했네.”
삼원왕들은 유진의 능력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도 이런 기회가 자주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군세를 보아 전력을 다할 것임이 분명했다. 물론 바라는 대로 크나슈를 정벌하고 나면 저 병력이 고스란히 유진 일행을 에워쌀 터.
“다크 엘프들이 뭐가 무섭다고 저리 우르르 몰려다니는 거야? 그냥 플레어 한 방이면 끝날 것들을.”
카스카디아는 그깟 다크 엘프들을 상대하는데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삼원왕들을 비웃었다. 삼원왕들에게 된 통 당한 전력이 있는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아마 주렁주렁 원군을 달고 가야 하는 신세가 답답해서 나온 말인 듯 보였다.
“너 아직 안 갔어? 불칸 해협에 가서 침 질질 흘리면서 자빠져 자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도마뱀 씨?”
“그만 해라.”
“뭐야? 꼬리 어디 있어? 아까 볼일 보다가 엘프들 우르르 몰려오니까 겁먹고 도망쳐오느라 떼놓고 왔나 보네. 와, 도마뱀 좋네!”
“드웨인 너 진짜 죽을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칸 해협으로 꽁무니를 빼려고 했던 카스카디아가 오히려 거들먹거리자 드웨인은 재미있다는 듯 그를 놀려댔다.
예전 같았으면 감히 자신을 도마뱀 취급하는 인간을 결코 살려두지 않았을 카스카디아였다. 치고받고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이 이제 제법 다들 정이 든 모습이었다.
“두 분은 왜 볼 때마다 싸우십니까? 누가 보면 사랑싸움하는 줄 알겠네.”
“내가 얘랑? 미쳤냐? 도마뱀이랑 사랑하게?”
“누구보고 도마뱀이라는 거야? 그리고 나 여자 아니라고 했지!”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뭘 또 그리 다들 발끈하십니까?”
발끈하는 모습도 귀여웠다. 이쯤 되면 진심이 담긴 악담이라기보다 전투를 앞두고 긴장을 풀기 위해 주고받는 가벼운 격려처럼 들릴 정도였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제 가자고. 우리가 출발하기만 기다리는 것 같은데.”
언제까지 농담이나 주고받을 수는 없는 일. 유진이 모두를 진정시켰다. 엘프 군단의 거친 숨소리가 출정을 재촉했다.
“와, 이 카스카디아가 고작 화살받이로 전락하다니……!”
“선봉이라고 생각해. 어차피 쟤들 원하는 대로 놀아줄 거 아니잖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남의 코 풀어주느라 제 몸 상하는 꼴이었다. 정령수만 아니었다면 유진 일행이 엘프들 집안싸움에 끼어 들 이유가 없었다.
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따라와 준 모두를 바라보며 유진은 속으로 전의를 다졌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었다. 또 다른 소중한 것들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거야 모르지.”
“하여간 간을 콩알만 해서는. 도마뱀 간도 그것보다는 크겠다.”
“뭐야! 유진 너까지 정말 이럴 거야?”
“자자, 이제 출발하시자고요. 영웅시로 천 년 만 년 남을 거니까 표정 관리들도 좀 하시고.”
다리언은 쉬지 않고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소중한 듯 말똥말똥한 눈동자가 쉴 새 없이 굴러다녔다. 훗날 오늘 이 모습이 위대한 승리의 첫 장면으로 기록될 터. 농담을 주고받던 유진 일행이 드디어 첫 걸음을 내디뎠다. 크나슈 정벌이 시작된 것이었다.
***
얼마 뒤, 케이아도스 황궁.
“폐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이렇게 잠잠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루피론 케아스 황제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왔어도 진즉 왔어야 할 유진 일행이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국경을 넘었다는 첩보를 들은 지가 벌써 언제던가.
“원군을 부르러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일럼 주교가 그리 말하던가? 도대체 ‘검은 그림자’의 수장이라는 작자가 뭘 하고 있는 거야?”
“…….”
대신전에서 파견한 사제는 괜한 소리를 했다가 불호령을 듣고 말았다. 타렘이 갑작스럽게 전사하여 대사제가 공석이 되면서 주교단장인 세일럼 주교가 ‘검은 그림자’를 이끌고 있었다. 암살은 물론 정보 수집 또한 ‘검은 그림자’이 몫이었다. 때문에 유진 일행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다크 엘프들은 뭘 하고 있느냐?”
“여느 때와 같습니다.”
“곧 불만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에모렙 왕의 분노를 어찌 잠재워야 할지…….”
“이블리스 신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만, 영 불안해서 이거 참…….”
죽음의 기운을 풀풀 풍기는 다크 엘프들을 성안에 들인지도 오래였다. 이대로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지 못해 허송세월을 하게 둔다면 잡음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에모렙 왕이 직접 이곳에 와 있지 않은가. 이블리스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였다. 이블리스 신이 있으니 크게 걱정할 것까지는 없을 테지만, 혹여 둘 사이에 갈등이라도 생겨 무력 충돌이라도 빚어진다면 케아스는 순식간에 지도상에서 지워지고 말 터.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믿음을 굳건히 하십시오.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폐하.”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가! 다크 엘프들까지 황궁 안으로 들여놓은 마당에 애간장만 태우고 있으니 하는 소리지.”
꾸중 아닌 꾸중을 들은 사제는 루피론 케아스 황제가 불안감을 내비치자 그의 신심을 다독였다. 황제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 이블리스 신에 기대어 대신전의 위엄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폐… 폐하!”
“주교! 어찌 대신전을 비우고 여기까지 온 것이오? 다크 엘프들이 결국 무슨 난동이라도 부린 것이오?”
그때 의외의 인물이 회의실로 뛰어 들어왔다. 대신전을 지키고 있어야 할 세일렘 주교였다. 이블리스 신의 신탁이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사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뜸 다크 엘프들이 걱정된 루피론 케아스 황제. 늑대를 잡으려고 호랑이를 집 안에 들인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
“그것이 아니오라……. 당장 대신전으로 가보셔야겠습니다.”
“대신전으로?”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다행히 에모렙 왕이 최악의 수를 둔 것은 아니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신탁이 내려온 것이었다. 이제 이 답답한 상황도 끝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그런데 세일렘 주교의 표정이 어두웠다. 루피론 케아스 황제의 그의 표정을 살필 새도 없이 대신전으로 향했다. 그만큼 그동안 마음을 졸여 왔다는 뜻이었다.
***
체면 차릴 것 없이 잰걸음으로 대신전으로 향하는 루피론 케아스 황제. 그런데 경건해야 할 대신전 앞에 어수선했다. 다크 엘프들이 어느새 이곳까지 몰려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단지 이야기만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구를 제대로 갖춰 입고 서둘러 짐을 꾸리는 것이 군영을 옮기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새 출정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곧바로 출정하라는 신탁이 내려온 모양이었다.
“저들이 왜 저러는 거지?”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대신전 안으로……! 헉!”
루피론 케아스 황제는 떠날 준비가 한창인 다크 엘프들의 모습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신탁의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탓이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하게 그를 대신전으로 안내하는 세일렘 주교. 하지만 이내 누군가 그들의 길을 막아섰다. 누가 감히 이 케이아도스 황궁 안에서 루피론 케아스 황제와 세일렘 주교를 막아선다는 말인가.
“이블리스도 불쌍하군. 아랫것들이 이리 느려 터졌으니…….”
“이블리스 신의 충복 루피론 케아스가 유일한 엘프 왕께 인사 올리겠습니다!”
그는 에모렙이었다. 다크 엘프들의 왕. 이블리스 신과 직접 소통하는 자. 아무리 루피론 케아스 황제라고 해도 그의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급히 크나슈로 돌아간다!”
“충!”
에모렙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뒤, 루피론 케아스 황제의 인사를 다 듣기도 전에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철군 명령이었다.
“유일한 엘프 왕이시여! 어찌 그냥 돌아가시는 것입니까? 그 오만한 것들은 어찌 하시려고……?”
에모렙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엘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진군하기 시작했다.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어 보였다. 순간 루피론 케아스 황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디로 튈지 불안하기는 해도 이만한 원군이 또 있을 수 없었다. 동맹만 잘 유지된다면 대륙 전체를 손에 넣는 것도 헛된 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케아스를 떠나려 했다. 대륙 통일의 꿈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블리스에게 전해. 나 에모렙이 똑똑히 지켜보겠다고 말이야.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나를 엿 먹이면 전장에서 마주 보게 될 거야. 가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두려운 시커먼 기운을 순간적으로 뿜어낸 에모렙 왕이 루피론 케아스 황제를 겁박했다. 분명 에모렙 왕과 이블리스 신 사이에 틈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애걸하듯 이유를 묻는 루피론 케아스 황제를 뒤로하고 매정하게 말머리를 돌리는 에모렙 왕. 루피론 케아스 황제는 영문을 몰라 급히 세일렘 주교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라면 그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말해줄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세일렘 주교,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저들을 붙잡아야 하는 것 아니오?”
“그들이 불칸 해협을 건넌 모양입니다.”
“불칸 해협을? 도대체 누가 말이오? 저 영혼 없는 엘프들이 아니고서야 그 불바다를 누가 감히 건널 수 있다는 거요?”
세일렘 주교의 입에서 느닷없이 불칸 해협이 튀어나왔다. 불칸 해협은 인간들의 영역인 아리아스 대륙과 엘프들의 땅 아대륙 코니도스를 가르는 바다였다.
수백 개의 해저 화산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불기둥이 바다와 하늘을 연결하는 곳이었다. 화염 속에서 잉태된 태초의 피조물 레드 드래곤의 고향이기도 했다. 인간은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땅. 발길을 들여놓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로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저 다크 엘프들 또한 갖은 고생을 다 해가면서 그곳을 건너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또 그 누가 감히 불칸 해협을 건넜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