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며칠 뒤. 유진 일행의 눈앞에 어느새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아리아스 대륙의 동쪽 끝 불칸 해협에 도착한 것이었다.
“오우씨! 포기! 더는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진짜 더럽게 덥네.”
“끼응.”
해안선을 따라 걷기를 벌써 몇 시간째. 일행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빛과 어둠의 기운이 갈라진 태초에 아리아스 대륙의 생성과 함께 잉태된 최초의 레드 드래곤 불카누스가 화염을 삼킨 곳. 불칸 해협은 그 아득히 먼 과거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 듯 감당하기 힘든 열기를 뿜어댔다.
팽달수가 가장 먼저 자리에 주저앉았다. 열탕처럼 부글거리는 바다는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바로 옆 불칸 해협을 바라보았다.
이어 드웨인도 나가떨어졌다. 악으로 버틴다면 못 참을 것도 없었지만, 여기까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끌려온 것이 아직도 불만이었기에 포기가 빨랐다.
게다가 백구까지 지쳐 보였다. 일반적이지 않은 환경이었기에 힘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바게스트도 힘들다잖아. 우리는 여기까지! 더는 못 가. 달수 동생하고 바케스트, 그리고 나는 먼저 케이아도스로 가서 기다릴 테니까 셋이 가서 볼일 보고 와.”
“어디 똥 싸러 왔어? 뭔 볼일을 보고 와.”
“아니, 그러니까 삼원왕들하고 잘 얘기 나누고 오라고. 우리까지 갈 필요 없잖아.”
드웨인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마 한참 전부터 이 말을 내뱉을 적절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터.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삼원왕들과 담판을 짓은 일은 오롯이 유진의 몫일 터. 줄줄이 몰려갈 이유가 없었다.
“다리언, 너는 괜찮아?”
“저는 참을 만합니다.”
“다리언도 참는데 아리아스 대륙 최강 용사라는 놈이 뭐 이 정도로 나가 떨어지냐?”
“쟤는 영웅시 쓰는 거에 미친 놈이니까 그렇지. 아, 몰라. 더는 못 가.”
“저도 못 갑니다. 이러다 죽겠다고요.”
엄살은 오래가지 못해 탄로 났다. 마력이라고는 콩알만큼도 없는 다리언도 견디는 열기를 드웨인이나 팽달수가 못 견딜 리가 없었다. 백구 또한 온몸의 털을 축축하게 적신 더위가 싫어 덩달아 엄살을 부린 것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카스카디아, 이만하면 되지 않았어?”
그들만 탓할 문제도 아니었다. 참고 못 참고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유진은 이제 할 만큼 했다는 듯 카스카디아를 찾았다.
“저기! 저기가 내가 어릴 때 살던 동네야. 와! 완전 그대로네.”
“어이, 카스카디아? 내 말 안 들려?”
“어? 왜? 날씨가 제법 선선하네.”
“이게 선선한 거냐? 얘들 더워 죽겠다잖아.”
“에이. 온 김에 고향 구경 좀 실컷 하고 가려고 했더니. 좀 참어. 이게 뭐가 덥다고 그래? 진짜 더운 게 뭔지 보여 줘?”
“그만해. 이러다 코니도스 땅은 밟아보지도 못하고 다 쓰러져.”
“하여간 약해 빠져 가지고. 이래서 인간들하고 어울리지를 못한다니까.”
해협을 가득 메운 아지랑이 너머로 아대륙 코니도스가 보였다. 저 가까운 곳까지 가려면 길쭉한 해안선을 따라 쉬지 않고 걸어야 했다. 이 지독한 열기를 견뎌 가면서.
유진이 갑자기 카스카디아를 부른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에게 지금의 난국을 타개할 해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써 못 들은 척 유진을 외면하는 카스카디아의 반응이 이상했다. 아마도 그 해법이라는 것이 카스카디아가 남다른 수고를 해야 하는 방법인 듯 보였다.
“주둥이만 살아서는. 얼른 본체로 변해 봐.”
“본체로? 갑자기 왜? 진짜 불 맛 좀 보려고?”
“우리 좀 등 위에 태우고 날아가라고.”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진즉에 날아갔으면 될 걸 가지고 괜히 고생한 거잖아요?”
해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본체로 변한 카스카디아의 등에 업혀 해협을 건너자는 것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팽달수는 더 억울해했다. 진즉 그랬다면 이 고생을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코니도스로 간다고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 하도 힘들다고 징징거리니까 그러자는 거지.”
“내가 무슨 당나귀냐? 타기는 어디를 타겠다는 거야?”
“아, 얼른! 얘들 여기 다 버리고 갈 거야?”
“먼저 케이아도스에 가 있겠다잖아!”
멸족한 것으로 알려진 드래곤이 하늘을 유유자적 날아다닌다면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을 터. 이목을 끌어 좋을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유진도 이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던 것이었다.
하지만 코니도스가 바로 코앞이었다. 아주 잠깐이라면 시선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기에 이대로 해안선을 따라 걷는 것은 무리였다.
카스카디아는 펄쩍 뛰며 물러섰다. 위대한 드래곤의 등을 인간이 밟고 올라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의 뜻은 완강했다.
“너 자꾸 그러면 이블리스는 그냥 놔두고 에모렙만 치는 수가 있어. 헤르미오스는 너 혼자 구할 거야?”
“이 치졸한 마왕 새끼! 그건 약속하고 다르잖아!”
어쩔 수 없이 가장 마왕다운 수를 꺼내 드는 유진. 카스카디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혼자서 이블리스를 상대할 자신은 없는 모양이었다. 유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협조 좀 해. 나만 좋자고 이러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 카스카디아 님더러 고작 인간 따위를 위해 등을 내어주라는 거야?”
“그 인간 따위가 화나기 직전이거든? 그 주둥이 뽑아 버리기 전에 얼른 시키는 대로 해라.”
“이 천벌을 받을 마왕 새끼! 알았어, 알았다고! 태워주면 될 거 아니야.”
“진즉 그렇게 나올 것이지.”
결국 카스카디아는 자존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사천 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이 또 있던가. 하지만 더한 수모를 겪지 않으려면 유진의 말을 따라야 했다. 유진이라면 말한 대로 드래곤의 주둥이를 뽑아 버리고도 남을 성격의 소유자이니까.
쿠르르릉.
“알아서 잘 붙잡아라. 도중에 떨어져도 나는 몰라.”
“너 일부러 떨어뜨리려는 거 아니야?”
“특히 너 드웨인 조심해.”
“하여간 꽁하기는. 덩치만 크면 뭐하냐? 소갈머리가 벼룩인데. 야, 다리언! 너 이래도 드래곤이 위대한 것 같냐?”
“…….”
카스카디아는 본체를 드러내는 그 순간까지 투덜투덜 구시렁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 화를 애먼 드웨인에게 풀었다.
드웨인은 그런 카스카디아를 속 좁은 벼룩이라며 비꼬았다. ‘위대한’ 드래곤의 행동치고는 확실히 쪼잔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어째 드웨인 형님은 점점 더 유치해지는 것 같은데요? 원래 저랬습니까, 형님?”
“아니.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진단 말이지. 게이트 통과할 때 어디 부딪쳤나?”
드웨인의 언행도 그릴 칭찬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카스카디아 덕에 편하게 해협을 건너게 된 마당에 굳이 이렇게 화를 북돋을 이유가 없었다. 유치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
“아우! 허리 부러지는 줄 알았네. 엉덩이뼈로 콱콱 찔러댄 놈 누구야? 드웨인 너지?”
“내 엉덩이가 얼마나 튼실한데 애먼 나보고 그래?”
“분명 어떤 놈이 일부러 찔러댔는데…….”
비행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주 잠시였지만, 이미 유진 일행은 아대륙 코니도스에 발을 내디딘 후였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카스카디아가 연신 허리를 두드렸다. 소녀 태가 풀풀 나는 모습으로 허리 굽은 노파처럼 허리를 두드려대는 모습이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입니까? 풍경이 예사롭지 않네요.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데요?”
“판데리아. 엘프어로 어머니의 대지라는 뜻이지. 정령수가 가진 세 근원력 중 땅의 힘이 생성되는 곳이야.”
“뭔가 으스스한데요? 화이트 엘프들은 다크 엘프 놈들처럼 무턱대고 죽이려고 덤비고 그러지는 않겠죠?”
코니도스는 아대륙으로 불리는 것만큼 드넓었다. 이곳은 그중에서도 판데리아라는 곳. 카스카디아의 설명대로 이곳에서 ‘푸른 숲의 정령수’로 흘러드는 삼원력 중 하나인 대지의 기운이 형성되었다.
쿠르르릉.
“조심해!”
마치 초대한 적도 없는 불청객에게 경고라도 하듯 눈앞의 절벽이 무너져 내렸다. 드웨인이 다급하게 팽달수를 잡아끌지 않았더라면 저 돌무더기가 그대로 팽달수의 무덤이 될 뻔했다.
“오우씨, 뒈지는 줄 알았네!”
“갑자기 웬 산사태야? 다들 괜찮으세요?”
졸지에 죽을 뻔했던 팽달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연신 거친 콧바람을 뿜어댔다. 놀란 것은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리언이 곧장 고개를 돌려 다친 이가 없는지 살폈다.
“긴장해. 이제 시작이니까.”
요란한 환영식을 마치고 숨을 돌리려던 찰나. 유진의 한 마디가 모두를 더욱 긴장시켰다.
휙!
“예? 시작이라니요? 뭐가 시작이라는 겁니……! 헉! 무슨 놈의 바위가……!”
“뭔가 이상한데? 바위에 이상한 기운이 실려 있어.”
그의 말이 끝나가기 무섭게 곧바로 엄청난 크기의 바위가 날아들었다. 하필 이번에도 드웨인이 없었더라면 팽달수는 여지없이 바위 아래 깔린 뻔했다.
단순한 낙석이 아니었다. 드웨인이 나지막하게 읊조린 말대로 바위에 인위적인 기운이 실려 있었다. 누군가가 절벽 어딘가에 숨어 유진 일행을 노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야, 이 돌대가리 놈아! 다짜고짜 바위를 날리면 어떻게 해!”
“카스카디아 님은 지금 누구더러 돌대가리라고 하는 겁니까?”
“방금 우리를 죽이려고 한 놈.”
“그럼 이게 다 자연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고요?”
“땅의 힘을 이용할 줄 안다면 가능하지.”
그때 카스카디아가 별안간 절벽을 향해 고성을 내질렀다. 분명 뭔가를 알고 하는 행동 같았다.
유진도 이미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이곳은 ‘어머니의 대지’로 불리는 판데리아. 바위를 움직이고 대지를 뒤흔드는 일이 결코 불가능한 곳이 아니었다.
“또 날아온다!”
쾅!
그때 또 다시 바위가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바위가 정확하게 카스카디아를 노렸다. 그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바위를 그대로 머리로 받아버렸다.
“너희 진짜 죽을래!”
“오호! 역시 위대한 존재는 다르네요! 안 아프십니까?”
바위는 산산조각 났지만, 카스카디아는 별 탈이 없어 보였다. 그저 화가 더 난 정도였다. 그 모습에 다리언은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기필코 이 장면을 영웅시로 남기고 말겠다는 듯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 정도야 뭐. 그나저나 이 돌대라기 녀석 어디 숨어 있는 거야?”
“와! 누가 돌대가리인지 모르겠네. 진짜 안 아프세요?”
“듣기 거북한 건 그냥 기분 탓인가?”
“에이, 제가 칭찬에 서툴러서 그럽니다. 위대한 드래곤이 아니면 누가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를 머리로 깨부수겠습니까?”
“칭찬 맞지?”
“그럼요. 제가 카스카디아 님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잘 아시면서.”
팽달수 또한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다리언과는 그 감흥이 좀 달랐다. 다리언은 일행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회피하지 않는 카스카디아의 영웅적인 행위에 감탄한 것인 반면 팽달수는 말 그대로 그의 이루 말할 수 없이 단단한 돌 머리에 탄성을 내지른 것이었다.
“야, 돌대가리! 너 진짜 안 나올래?”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 그만 나오시지?”
지금 팽달수와 쓰잘머리 없는 대화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카스카디아도 그 점을 잘 아는지 서둘러 그 요주의 돌대가리를 불렀다. 유진도 이 모든 것이 그의 짓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쿠르르릉.
그들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내 그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숨어 있었네.”
“오우씨! 저…… 저게 뭐야? 설마 저것도 엘프는 아니죠? 생긴 게 완전 충격인데요?”
팽달수는 실례임을 알면서도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절벽에서 튀어나온 자의 외모 때문이었다. 엘프 특유의 외모는 그대로인데 달라도 너무 많이 달랐다. 멋들어진 머리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반들반들한 자갈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진짜 말 그대로 돌대가리였던 것이다.
“쟤만 그래.”
“쟤가 누군데요?”
“이곳 판데리아의 주인, 골로디아.”
그자의 이름은 바로 골로디아. 삼원왕 중 막내이자 이곳 판데리아의 주인이 바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