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183화 (184/204)

<제183화>

그렇게 다리언과의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차양 아래 각자 요깃거리를 집어 들고 쉬엄쉬엄 점심 허기를 달래며 대화를 이어갔다. 어차피 날이 저물고 나서야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아무리 마왕에 드래곤, 용사들이라고 해도 자연이 만들어낸 사막의 열기를 이길 존재는 없었다.

“어디 다녀오겠다고?”

“로젠디아. 대사제님 좀 뵙고 오려고.”

“하드리안? 걔는 뭐 때문에 만나려고?”

오랜만에 재회한 기쁨도 잠시. 유진은 드웨인이 느닷없이 대사제 하드리안을 보고 오겠다는 말에 불안감부터 밀려왔다. 드웨인 때문이 아니었다. 대사제 하드리안이 또 뭔 헛소리를 늘어놓을지 걱정이었다.

“뭐는 뭐야. 이제 곧 이블리스를 칠 건데 로디우스 군대도 오라고 하면 좋잖아.”

“로디우스 좋으라고 이블리스 죽이겠다는 거 아니다.”

“다른 곳에도 연락하면 되잖아. 소렐 왕국도 그렇고 동부 7공국 연합도 분명 병력을 보내줄 거야. 중립국 중에도 도움을 주려는 곳들이 적지 않을 거야. 케아스 제국에 원한을 품은 나라가 한둘이 아닐 테니까.”

드웨인은 병력을 부르려는 것이었다. 케아스의 진짜 힘은 바로 순교를 불사하는 제국민 하나하나의 신앙심이었다. 그러니 더욱 보병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드웨인 말대로 보병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가끔 보면 진짜 세상 물정 모른다니까.”

“내가 뭘?”

“그게 싸움 붙이는 거지 뭐냐?”

“케아스 제국을 확실하게 쳐부수자는 거지 그게 왜 싸움을 붙이는 건데?”

“하여간 안 돼. 그리고 걸리적거린단 말이야.”

유진은 각국에 원군 파병을 요청하자는 드웨인의 생각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사실 드웨인의 입에서 대사제 하드리안의 이름이 언급된 이후로 얼굴이 찌푸려진 채였다.

“형님, 그건 유진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싸우게 마련이라고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모인 영웅들끼리 싸울 일이 뭐가 있다고.”

“진짜 사심 하나 없이 악을 멸하기 위해 왔다고 해도 이블리스를 죽이고 나면 마음이 바뀔 걸요?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케아스 제국이 주인 없는 땅이 되는데 다들 욕심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나?”

아름다운 장미가 날카로운 가시를 감추고 있듯 인간의 추악한 탐욕을 감추기에 더없이 좋을 장막은 바로 원초적인 순수였다. 당장 로디우스 제국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절대악 이블리스를 멸하고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로디우스 제국군들조차도 케아스 백성들을 상대로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카렌 신의 의지라는 명목 아래 행해진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중에 누구 손을 들어주실 건데요?”

“진짜 그건 생각 못 해봤네. 그런데 그건 이기고 나서 생각할 문제 아니야? 이블리스한테 지면 어쩔 건데?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좋은 거 아니야?”

“켁! 퉤!”

드웨인은 여전히 순진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그 답답한 모습에 화라도 난 것일까. 팽달수가 갑자기 가래를 긁어모아 뱉었다.

“뭐 하냐?”

“침 뱉으십시오. 얼른!”

“켁! 퉤!”

“형님도요! 카스카디아 님도 뱉으시고요.”

“왜 갑자기 침을 뱉으라는 건데?”

“얼른 뱉으라지 않습니까?”

“켁! 퉤!”

“켁! 퉤!”

그러더니 대뜸 다른 이들 모두에게 침을 뱉으라며 성화였다. 아마도 이블리스에게 질지도 모른다는 드웨인의 말 때문일 터.

“부정 타니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니, 동료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형님 옆에 지금 어떤 사람들이 서 있는지 보십시오. 여기 이분이 누굽니까?”

“누구기는 누구야. 유진이지.”

“유진 형님이 어디 보통 분입니까?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진정한 마왕 아닙니까? 이 형님보다 더 마왕 같은 마왕 새끼가 또 나올까요?”

“나오면 안 되지.”

“그거 칭찬 맞지?”

절대 질래야 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유진과 함께였다. 진정한 마왕. 예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유진과 같은 마왕은 다시 나타나지 않을 터.

“그리고 카스카디아 님은 또 어떻습니까? 입만 벌렸다 하면 그냥 주변을 모조리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분 아닙니까? 일격필살!”

유진의 질문을 듣지 못했는지 팽달수가 이번에는 카스카디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드래곤 플레어를 뿜어내는 존재였다. 아무리 절대악 이블리스라고 할지라도 쉽게 볼 수 없는 상대임이 분명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너는 입 다물고 그거나 타지 않게 잘 구워. 대신 통구이 되기 싫으면.”

“……!”

틈을 노리던 다리언이 잽싸게 목소리를 보탰다. 유독 카스카디아를 우러러보는 그였다. 카이언 성에서의 활약상 때문이었다. 아직 그 이후 이야기는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팽달수도 있지 않습니까? 외모는 이리 천사 같아도 한 때 오류동 혈귀라고 불리던 저입니다. 이래도 이블리스가 두려우세요?”

“아니, 두렵다기보다…….”

그 잔인한 손속으로 구로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오류동 혈귀도 함께였다. 드웨인은 팽달수의 어이없는 마지막 말에 말끝을 흐렸다.

“아리아스 대륙 최강의 용사가 간이 그렇게 콩알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누가 간이 콩알만 하다고 그래?”

“그러니까 괜히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고 우리끼리 한 번 해보자고요. 저만 믿으십시오, 형님!”

“또 설레발친다.”

사실 팽달수가 이리 자신감 있게 드웨인을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유진이었다. 유진이 없었다면 결코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터. 팽달수는 유진을 전적으로 믿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유진이었기에 내심 멋쩍었는지 설레발 친다며 팽달수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대사제님께서 분명 화내실 텐데…… 에이, 나도 몰라. 그럼 그러든가. 그런데 에모렙이 가만히 있을까?”

“가만히 안 있겠지. 제 수하가 넷이나 죽었는데.”

“그럼 어쩌지?”

아무튼 그렇게 드웨인은 대사제 하드리안을 만나러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서일까. 드웨인은 근심이 많아 보였다. 이블리스와 에모렙이 서로 힘을 합쳐 덤비지는 않을지 우려했다.

“방금 달수 말 못 들었어? 담대하게 가슴을 쫙 펴고…… 달수만 믿어. 달수가 다 처리한다잖아.”

“아니, 그게 꼭 제가 다 처리하겠다는 게 아니라…….”

“오호!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 겁니까? 아리아스 대륙의 구원자 팽달수 용사! 그의 손에 다크 엘프왕 에모렙 나가떨어지다!”

유진의 농담에 다리언이 추임새를 넣었다. 그의 영웅시 속에서는 이미 팽달수가 에모렙을 무너뜨린 뒤였다.

“제목 좋네. 에모렙 표정이 볼 만하겠다. 당장 달수 찾아오겠는걸? 어이, 네가 만든 노래를 크나슈에서도 들을 수 있겠지?”

“저 다리언입니다. 저 진짜 모르세요? 크냐슈는 물론이고 아리아스 대륙에서 가장 은밀한 곳이라는 푸른 숲 그레아레임까지 금방 퍼질 걸요?”

진즉 눈치챈 사실이었지만, 다리언은 허언이 심한 편이었다. 죽은 엘프들의 땅인 크나슈나 정령수가 흐르는 엘프들의 천국 그레아레임에 인간들의 영웅시가 전해질 리가 없었다.

“형님, 얘 진짜 데리고 다니실 겁니까? 막말로 이블리스가 보낸 놈일 수도 있잖아요.”

“설마.”

자신을 놀리려는 유진 말에 박자를 맞추는 다리언이 얄미웠는지 팽달수가 그를 간자로 몰아갔다. 아예 밑도 끝도 없는 의심은 아니었다. 유진 일행 모두 다리언에 관해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이들 앞에 나타난 것부터가 의심 투성이기는 했다.

“누구? 저요? 와! 천하의 이 다리언이 겨우 이블리스 졸개 취급이나 받다니……! 맞장구 좀 쳐주니까 제가 우스워 보입니까? 궁전 광대도 아니고 댁들도 겨우 떠돌이 신세면서 진짜 너무 하시네. 같은 업계 사람들끼리 이러는 거 아니라고요.”

“같은 업계?”

팽달수가 의혹을 제기하자 펄쩍 뛰며 손사래를 치는 다리언. 억울한 것보다는 서운해하는 표정이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다리언은 애초 유진 일행을 광대들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대중들의 인기를 얻는 영웅들만을 연기하는 광대들이라고 본 것이다.

“나는 시인, 당신들은 광대. 다 거리 밥 먹는 처지 아닙니까? 그러니 서로를 깎아내리는 짓은…….”

“우리더러 광대라는데요?”

“솔직히 이런 식으로 꾸며진 극단은 처음 봅니다. 영웅들을 흉내 내는 극단이라…… 신선한 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하고 같이 다니시는 건 어떨까요? 영웅시와 광대가 있는 극단! 캬! 생각만 해도 뭔가 제대로 된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다리언은 이미 구상을 마친 듯 보였다. 세간에 가장 회자되는 영웅들을 그대로 흉내 내겠다는 신박한 아이디어와 엄청난 연기력까지 뒷받침되는 광대들. 거기에 자신의 노래 실력이 합쳐진다면 선풍적인 인기를 끌 것으로 확신한 것이었다.

“얘 뭐라는 거냐?”

“동업하잡니다.”

“동업? 얘도 용사야?”

“와, 하여간 이 몰입감 쩌는 연기력만큼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이래서 내가 동업하자는 겁니다. 이 다리언과 동업한다는 게 무슨 뜻인 줄은 알죠?”

“형님, 그러니까 제가 제육볶음이나 해 먹자고 했잖아요. 이게 뭡니까? 광대 취급이나 당하고.”

당연한 반응이 흘러나왔다. 졸지에 광대 취급을 받았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다리언은 유진 일행이 이쪽 바닥에 아직 어두워 자신의 명성을 듣지 못한 탓이라 착각했다. 어찌나 기가 차던지 팽달수는 차라리 다리언 목살로 제육볶음이나 해 먹자며 지금의 심정을 토로했다.

“광대가 뭐 어때서? 그냥 놔둬.”

“얘 진짜 계속 데리고 다니실 겁니까?”

“솔직히 다른 분들 연기력에 비해 이분은 좀…….”

“내가 뭐?”

“교체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머리 용사가 어디 있습니까? 얼굴도 좀 정도껏 생겼어야지.”

어투라든지 분위기상 연장자로 보이는 팽달수가 우두머리가 아닌 것을 직감한 다리언은 방해가 되는 그를 배제할 생각이었다. 영웅들의 활약상을 말로만 전해 들은 탓에 진짜 팽달수의 외모까지는 잘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야! 이거 완전 어이가 없네! 너 이 새끼 내가 오늘 네 놈 창자로 내장탕을 끓여 먹든가, 순대 볶음이라도 해 먹고 만다. 너 이리 안 와!”

그렇지 않아도 대머리 소리를 싫어하는 팽달수는 다리언의 말에 제대로 눈이 뒤집혔다. 진짜 배를 가를 작정으로 애병인 도축용 단검을 꺼내 들기까지 했다.

***

팽달수가 다리언을 찢어 죽이겠다며 사막을 뛰어다니는 사이. 케아스 제국 수도 케이아도스 남문에서는 성문 수비병들끼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소문이 사실이야?”

“무슨 소문?”

“대사제께서 죽었다는 소문 말이야.”

얼마 전부터 성내에 퍼지기 시작한 소문이 화젯거리였다. 대사제 타렘이 목이 잘린 채 돌아왔다는 소문이었다.

“그 헛소문을 믿나? 동부 7공국 연합 놈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대사제님을 막아내나?”

“하지만 베냐스로 간 점령군 중 돌아온 병사들의 수가 겨우 수십이라잖아.”

“거기 일이 바쁜가 보지. 점령군이 다 돌아오면 동부 7공국 연합은 누가 지키나?”

“그런가…….”

베냐스에서 돌아온 귀환병들에게는 철저하게 함구령이 내려졌다. 외부와의 접촉 또한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베냐스에서의 참패 소식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저기 저게 뭐지?”

“뭐가? 어? 저게 뭐야?”

“헉! 저들은……!”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던 수비병들은 성문 저 멀리에서 느껴지는 낯선 기운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말을 몰아 달려오는 일련의 무리들이 보였다. 그들을 발견한 병사들은 순간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기운이 그들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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