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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 마왕족발-179화 (180/204)

<제179화>

본체로 돌아온 카스카디아는 레드 드래곤 특유의 날 선 위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백구, 아니 바게스트는 그보다 더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크아아앙!”

마치 맹수 앞에 놓인 강아지가 덜덜거리듯 마몬은 일부러 더 애써 괴성을 질렀다. 누가 보더라도 기죽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보였다.

“날파리 새끼가 어디 이 카스카디아 님 앞에서 주둥이를 벌리고 입 냄새를 풍기고 있어!”

카스카디아도 내심 자신마저 압도하는 바게스트를 앞에 두고 더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은 듯 보였다. 지난 십 년간 유진과 함께 산전수전 다 겪어 온 백구였다. 그만큼 풍기는 기운 또한 마왕 못지않았다.

“조심해!”

“크아아앙!”

일부러 더 마몬을 윽박지르는 카스카디아. 궁지에 몰린 듯 보였던 마몬이 그 순간 기운을 뿜어냈다. 날갯죽지에서 쏘아져 나간 검은 기운이 이내 카스카디아의 목을 노렸다. 가장 먼저 이를 눈치챈 유진이 급박하게 카스카디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으윽!”

“조심하라니까.”

피한다고 피했건만, 어느새 시커먼 죽음의 기운이 카스카디아의 목덜미에 생채기를 내버렸다. 유진은 그런 카스카디아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여간 다크 엘프 놈들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니까. 에모렙 이 새끼 언제 만나기만 해 봐.”

“에모렙 만나기 전에 저 날파리나 해결하시지?”

“내가 이놈 하나 해결 못 할 것 같아서 그래?”

“지금 네 그 꼬락서니를 봐라.”

불의에 일격을 당한 카스카디아가 마몬을 노려보았다. 당장에라도 드래곤 플레어를 뱉어낼 표정이었다. 씩씩거리며 에모렙을 탓했지만, 당장 마몬부터 처리하는 것이 급해 보였다.

“날파리 새끼, 너 오늘 죽었어.”

“깝죽거리다가 모가지 날아갈라. 그냥 너는 여기 가만히 있어. 백구야!”

“컹!”

“간식 먹자.”

“컹!”

결국 유진이 백구를 불렀다. 범접할 수 없는 마력이 백구의 본체 여기저기서 아지랑이 피듯 피어올랐다. 간식 소리를 들은 백구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마몬을 옥죄었다.

“크아아앙!”

“비켜! 걔는 내 꺼야! 카오옥!”

화르륵.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괴성을 내지르며 버텨보는 마몬. 백구가 슬슬 입맛을 다시며 녀석에게 다가가자 오히려 카스카디아가 몸이 달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구만도 못한 존재로 보인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주저 없이 드래곤 플레어를 뱉어내는데.

“오우씨! 이렇게 갑자기 화염방사기를 쏴 재끼면 어떻게 합니까?”

“걸리적거리지 말고 다 저리 비켜! 야, 바게스트! 너 끼어들지 말라니까!”

신나게 싸움 구경 중이던 팽달수가 느닷없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카스카디아의 드래곤 플레어에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카스카디아는 발악하듯 백구를 밀어내려고 했다.

“컹!”

“백구가 먼저 침 발랐단다. 남의 간식 넘보지 말래.”

“하여간 뭐든 일단 구워 먹고 보는 저 마왕 새끼 졸개 아니랄까 봐 죄다 먹는 것으로 보이지? 난 저런 날파리는 줘도 안 먹어.”

“컹!”

“걱정하지 말래. 안 줄 거라고.”

이 정도로 간식거리를 포기할 백구가 아니었다. 물론 드래곤을 겁낼 녀석도 아니었다. 지난 십 년간 강해진 것은 비단 유진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바싹 구워줄 테니까 잘 받아 처먹기나 해. 카오옥!”

화르륵.

“조준이나 잘 해! 애먼 데 태우지 말고!”

백구가 마몬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카스카디아는 더 맹렬한 기세로 드래곤 플레어를 쏘아댔다. 주변에 모여들어 있던 구경꾼들마저 다 태어 버릴 기세였다. 유진이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지금 다른 데 한눈팔 겨를이 없을 텐데?”

그때 침묵하고 있던 남태현 회장이 입을 열었다. 마몬에게 정신 팔린 모두를 향한 경고였다.

휘리리릭!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언가가 공간을 갈랐다. 사방에서 날아온 시커먼 인영 넷이 순간 드웨인을 훑고 지나갔다. 미동도 없이 남 회장 뒤에 서 있던 네 마리 다크 엘프들이었다.

“이것들 봐라?”

“도와줄까?”

“그럼 그냥 구경이나 하려고 했어?”

“아니, 나는 저 잡종 녀석이랑 놀려고 했지.”

“그럼 주둥이만 나불거리지 말고 뭐라도 하든가.”

“네가 이리 허덕이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잖아.”

가까스로 다크 엘프들의 공격을 피한 드웨인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의 시커먼 기운이 곧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카스카디아에 이어 드웨인마저 유진의 안쓰러운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드웨인은 남 일 대하듯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이 이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휘리리릭.

다시 다크 엘프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공격은 드웨인에게 집중되었다. 유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드웨인을 먼저 처리하려는 속셈이었다.

“닥치고 뭐라도 좀 하라고!”

“이제보니 네놈도 제법 먹음직스럽구나.”

남 회장 또한 그 행렬에 가세했다. 죽음의 기운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곧 상대의 마력을 빨아먹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뜻. 백구가 마몬을 바라보던 그 눈빛으로 남 회장이 드웨인을 바라보았다.

“야, 유진! 쟤라도 좀 제대로 막아 봐!”

“어이, 남 회장! 너는 나랑 놀아야지.”

“일단 저놈 마력부터 먹어치우고 나서.”

혼자서 남 회장과 다크 엘프 넷을 상대하게 된 드웨인이 힘에 부치는 듯 유진을 찾았다. 이에 유진은 서운하다는 듯 남 회장을 불러세웠다.

남 회장이 괜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유진을 홀로 상대해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그 또한 모르지 않았다. 드웨인을 서둘러 처리해야 다크 엘프들과 함께 유진을 압박할 수 있을 터. 물론 드웨인의 마력마저 흡수한다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다.

휘리리릭.

“완전 흡협귀가 따로 없네.”

“야! 나한테 다 떠넘길 거야? 야, 이 마왕 새끼야!”

“간다고, 가.”

남 회장과 다크 엘프들의 합공이 이어졌다. 죽음의 기운이 사방에서 드웨인을 난도질하려 들었다. 살짝 닿기만 해도 살이 썩고 핏물이 말라갈 터. 드웨인은 체면 차릴 새도 없이 침까지 튀겨가며 유진을 불렀다.

마지못해 투덜대며 걸어가는 유진. 겉보기에는 무심해 보여도 유진은 진즉 다크 엘프들의 움직임을 꼼꼼히 살폈다. 빈틈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휙!

그리고 이내 몸을 날려 드웨인과 남 회장 일행 사이를 파고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유진은 드디어 상대의 빈틈을 찾은 듯 옅은 미소를 던졌다.

“죽음의 기운이 두렵지도 않은가 보지?”

“그 정도야 마력으로 밀어내면 그만이란 걸 너도 알 텐데?”

“마력은 언젠가 바닥이 나게 마련이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시겠다?”

“마력과 달리 죽음의 기운은 닳는 것이 아니니까.”

유진이 직접 나서자 남 회장과 다크 엘프들도 공격을 멈췄다.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 회장은 유진의 마력이 다할 때까지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한 번 쓰면 장시간 다시 채워야 하는 마력과 달리 죽음의 기운은 회수 가능한 기운이었다. 일거에 많은 기운을 뿜어내야 하는 결투에서는 죽음의 기운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네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어.”

“훗! 그게 뭐지? 설마 네놈도 죽음의 기운을 사용할 줄 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그런 기분 나쁜 기운은 줘도 안 써.”

“그럼 무슨 수로 죽음의 기운에 맞서겠다는 것이냐!”

궁극의 힘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죽음의 기운을 맞닥뜨린 유진은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표정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자신감은 분명 죽음의 기운에 대항할 비책을 숨겨두었다는 방증이었다.

“‘죽음의 기운’이라……. 이름은 제법 거창하다만 따지고 보면 너희들도 죽으면 끝이잖아? 죽은 엘프들의 왕이라는 에모렙도 말이야.”

“같은 말을 또 하게 하는군. 그래서 우리를 죽일 비책이라도 있다는 것이냐!”

남 회장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여 유진이 정말 죽음의 기운을 파쇄할 비책을 가지고 있다면 너무 빨리 유진 앞에 모습을 드러낼 꼴이 되었다. 제 발로 죽여 달라고 목을 들이민 형국이랄까.

“내가 말 안 했었나?”

“뭘?”

“지난 십 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거.”

“저 멀대 같은 용사 놈하고 아옹다옹한 것이 꽤나 자랑스러운 모양이구나?”

“아니, 드웨인을 만나기 전을 말하는 거야.”

“여기저기 먹을 것 없나 기웃대던 때 말인가? 비렁뱅이도 아니고.”

“맞아. 그때는 참 배고팠지. 그래서 닥치는 대로 다 먹어치웠어. 마물이든 뭐든 닥치지 않고.”

그런데 유진이 느닷없이 과거를 회상했다. 아리아스 대륙에서 보낸 지난 십 년. 그에게는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은 기억일 터였다.

맥락 없이 과거사를 읊조리는 유진을 비웃는 남 회장. 대단한 비책이라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던 유진이 죽음을 앞두고 인생을 돌아보듯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 내심 안심이 된 탓도 있었다.

“타고난 거지 근성인 게지. 왜 적선이라도 해줄까?”

“그때 내가 안 먹어 본 게 없거든.”

“하하하! 마왕이 아니라 거지왕이었던 게로군. 당장 내게 머리를 조아리고 충성을 맹세하다면 다시는 배곯지 않게 해주지. 이 남태현의 명예를 걸고 말이야.”

“너한테 명예라는 게 남아 있었나? 아무튼 과거에 그랬다는 거야. 지금이 아니라. 그때 신기한 걸 꽤 많이 먹어 봤거든.”

“죽기 싫어 시간을 끌려는 모양인데 이쯤이면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군.”

남 회장은 유진이 도망칠 궁리를 하느라 시간을 벌어보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경계했던 유진이 이리 궁색한 모습을 보이자 남 회장은 점점 더 자신만만해졌다. 대놓고 머리를 조아리라며 모욕감을 선사하기까지 했다.

이쯤이면 화가 날 법도 하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유진은 더 침착해 보였다. 남 회장은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대단해 보이던 유진도 결국 별것 아니었음을.

“마저 들어봐. 너한테도 중요한 이야기니까.”

“훗! 그 시간에 차라리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지 그래?”

“그건 좀 곤란한데……. 애원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서 말이야.”

“끝까지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대는구나. 이 몸이 좀 바빠서 말이야. 이제 계산을 끝내볼까?”

남 회장 말대로 제대로 된 비책도 없이 나불거린 것이라면 당장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원을 해도 시원찮을 판국이었다. 목숨을 구하려면 무슨 짓을 하지 못할까.

하지만 유진은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남 회장을 바라보는 눈빛 또한 여전히 날카로웠다. 결코 이 상황을 모면할 쥐구멍을 찾는 눈빛이 아니었다.

“이게 모두 네 그 오만함이 빚은 결과일 터! 다시는 살아 숨 쉬지 못하게 만들어주마!”

유진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남 회장이 결국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네 명의 다크 엘프들도 죽음의 기운을 날렸다.

“유진!”

“혀… 형님!”

“뭐야? 유진이 죽은 거야?”

“컹!”

순식간에 시커먼 연무 속에 갇혀 버린 유진. 죽음의 기운이 만들어낸 저 끝 모를 심연이 그를 영원한 죽음으로 이끌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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