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161화 (162/204)

<제161화>

“고기 타는 거 안 보여? 정신을 어디에다 팔고 있는 거야? 그리고 지금 그거 걱정할 때냐? 이블리스 녀석을 어찌 처리할지부터 고민하시지?”

모닥불 위에서 지글거리던 코뿔멧돼지가 금세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에모렙 얘기를 하느라 정신줄을 놓고 있던 달수 탓이었다.

“그건 내가 생각해 둔 바가 있어.”

“그게 뭔데?”

“비밀.”

카스카디아 녀석이 이블리스를 상대할 계책을 마련해두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성격상 그런 걸 미리 생각해보고 그럴 녀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비밀이라는 걸 보니 둘 중 하나였다. 애초 계책이란 게 없었거나, 아니면 계책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것이 분명했다.

“한 편인데 비밀은 또 뭐냐?”

“모두를 완벽히 속이려면 어쩔 수 없어.”

“내가 이블리스를 상대하는 동안 헤르미오스만 쏙 빼내서 도망치려는 건 아니고?”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저런 놈을 믿고 내가 이블리스에 엘프들까지 상대하려고 하고 있으니…….”

그러면 그렇지. 잠시라도 이 녀석에게 뭔가를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하긴, 내가 그동안 해온 게 있으니 카스카디아만 탓할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순진하게 이렇게 따라와 주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하나라도 살아야 할 거 아니야. 네 그 숭고한 뜻은 결코 잊지 않을게.”

“오늘 저녁은 코뿔멧돼지 구이 말고 드래곤 날개 튀김 어때? 드래곤 염통구이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카스카디아 네가 희생해라. 그 숭고한 뜻은 두고두고 기억해주마.”

“농담을 뭘 또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식겁하게.”

절대 농담일 리가 없었다. 전에 내가 녀석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여태껏 같이 다니면서 단 한 번도 내 등에 칼을 꽂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니까. 그만큼 드래곤답지 않게 순수한 녀석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카스카디아 너는 최대한 회복에나 집중해. 샤이언하고 달수 너는 최대한 마력을 끌어올리고.”

이블리스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역시 실력뿐. 소피아를 지나 케이아도스에 도착할 때쯤 최상의 상태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쳐두어야 했다.

“차라리 로디우스 쪽에 도움을 청하는 건 어때?”

“로디우스 제국에?”

“대사제 하드리안이라면 뭔가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명색이 대륙의 현자잖아.”

그때 샤이언이 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로디우스 제국의 도움을 받자는 것이었다. 이블리스는 빛의 신을 섬기는 로디우스 제국의 입장에서는 그저 마물일 뿐이었다. 마물 중에서도 감히 신을 참칭한 필멸의 대상이었다. 이블리스를 없애는 것에 그 누구보다도 앞장설 자들이 아닌가.

게다가 로디우스 제국에는 대륙의 현자라 불리는 대사제 하드리안이 있었다. 아무리 타국의 인사라고 해도 샤이언처럼 카렌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인물일 터.

“현자는 개뿔! 그놈 이름은 다시는 꺼내지도 마. 이블리스보다 더 찢어 죽이고 싶은 놈이니까.”

“대사제 하드리안 하고 무슨 악연이기에 그래?”

“멀쩡한 나를 마왕으로 만든 게 그놈이거든.”

문제는 내가 하드리안 녀석을 아주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이블리스보다 하드리안이 더 미웠다. 이블리스는 적어도 나한테 직접적인 피해를 준 적은 없었으니까.

“말은 바로 하랬다고 마왕을 마왕이라고 부른 게 죄는 아니지. 예전의 네가 도대체 어디를 봐서 멀쩡했다는 거야? 그냥 대충 봐도 딱 마왕이었는데.”

“그 주둥이부터 튀겨먹자.”

눈앞에 하드리안이 있었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 주둥이를 뽑아 튀김옷을 입히고 있었을 터였다. 녀석이 당장 눈앞에 없으니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입을 털어대는 카스카디아만 째려볼 뿐.

“저기 쟤들은 어쩌고?”

“괜히 딴소리하지 말고.”

때마침 적당한 화풀이 대상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달려오는 기세가 결코 호의적인 자들은 아니었다. 분명 그들일 터.

***

유진 일행을 발견하자 서서히 속도를 늦추는 일련의 무리들. 모두 흑의를 입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선두에 선 자는 무력 충돌을 원치 않는 듯 백기를 들고 있었다.

“어느 분이 마왕님이십니까?”

제법 중후한 목소리가 유진을 찾았다. 대뜸 마왕부터 찾는 것을 보니 유진의 서찰을 전해 받은 카인 주교가 보낸 자들이 틀림없었다.

의외였다. 유진은 서찰을 보내두고도 그들이 분명 믿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유진의 예상을 비웃듯 이렇게 직접 사람을 보내오지 않았는가.

“너희들은 뭐냐? 옷 입은 게 그때 그놈들하고 같네. 그림자 사제들인가?”

“이블리스 신의 충직한 사제들이 마왕님을 뵙습니다!”

유진을 대신해 팽달수가 이들을 맞이했다. 그림자 사제들은 특유의 흑의를 통해 이미 정체를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왕을 찾는 질문에 팽달수가 화답하자 그를 마왕으로 여긴 그림자 사제들이 일제히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장 선두에 선 카인 주교조차도.

“뭐야? 왜 갑자기 이렇게 친절하게 나오지? 이제 방법을 바꾼 거야?”

“대신전으로부터 전해 들은 것과는 많이 다르시군요. 지금부터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마왕님.”

“마왕은 내가 아니고 저쪽.”

카인 주교의 눈동자가 팽달수의 휑한 대머리로 향했다. 사실 그는 그새 케이아도스 대신전으로부터 유진의 용모파기를 전해 들은 터였다.

카인 주교는 사실 유진을 가짜라고 여겼다. 대사제 타렘으로부터 유진 일행을 일단 소피아에 붙잡아두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마왕님을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인지라…….”

이제야 유진을 똑바로 본 카인 주교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풍기는 기세가 자못 대단했다. 그는 유진을 꼼꼼히 살폈다. 대신전에서 보내온 용모파기와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카인 주교. 대신전에서 용모파기까지 기록해두고, 대사제 타렘을 일정까지 앞당겨 달려오게 할 정도로 고약한 가짜 마왕이 틀림없었다.

“드래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나보지? 나 같은 드래곤 따위는 서러워서 살겠어?”

“그…… 그럴 리가요.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카인 주교가 유진만을 떠받들자 질투가 났는지 카스카디아가 일부러 제 정체를 드러냈다. 이미 서찰을 통해 드래곤임을 밝힌 터라 굳이 숨길 것도 없었다. 믿지 않을 것이 뻔하기도 했고.

“너는 누구지?”

“이곳 소렐 교구를 책임지고 있는 주교 카인이라고 합니다.”

카인 주교 또한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타렘 대주교가 도착하면 이 사기꾼들은 모두 신전 앞에서 화형에 처해질 자들이었다. 그때까지 도망치지 않게 하려면 원하는 대로 실컷 마왕 대접, 드래곤 대접을 해줘야 했다.

“우리 소렐 왕국에 어둠을 몰고 온 놈이지.”

“샤이언, 서로 아는 사이야?”

“알렉세이 대공 전하와 우리 기병대를 소피아에서 쫓아낸 놈이 바로 저놈이야.”

“서로 반갑게 악수할 사이는 아니겠네. 어이! 이쪽인 용사인 거는 알지? 미리 서찰로 말해줬잖아.”

“알고 있습니다.”

“저기 쟤도 용사고.”

“아, 그러셨군요?”

“뭘 처웃어? 그쪽도 별거 없으면서.”

“…….”

곧이어 간단한 인사가 오갔다. 원수나 다름없는 카인 주교를 앞에 둔 샤이언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그의 목을 베 버릴 눈빛이었다.

처음 팽달수를 유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멋쩍었는지 팽달수를 소개받자 카인 주교가 하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그의 시선이 팽달수의 시원한 머리에 머물러 있었기에 팽달수는 그의 그런 행동이 대머리인 자신을 비웃는 것이라고 여겼다.

기분이 상한 팽달수도 카인 주교의 머리를 쳐다보며 맞받아쳤다. 카인 주교는 적지 않은 나이를 증명하듯 정수리 부분이 휑했다.

“그런데 내가 언제 너희들보고 마중 나오라고 했지?”

“마왕님께서 직접 서찰까지 보내셨는데 이블리스 신을 모시는 사제인 제가 어찌 이리 달려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개소리를 집어치우고 진짜 이유를 말해 봐. 내가 마왕인 것도 안 믿으면서.”

“아…… 아닙니다. 이블리스 신의 화신이신 마왕님의 말씀을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유진은 이미 카인 주교가 그가 마왕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간파했다. 순간 당황한 카인 주교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의심 안 한다는 놈들이 케이아도스에 내 생김새는 왜 물어봤을까?”

“그거야 어느 분이 마왕님이신지 알아야…….”

“그러니까 거짓말이라는 거야. 내가 마왕이라는 말을 믿었으면 너희들이 달려올 게 아니라 케이아도스 대신전에서 누군가 튀어왔겠지. 죽었다고 전해진 마왕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고작 너 같은 조무래기를 보냈겠어?”

“…….”

그가 케이아도스 대신전에 유진의 용모에 대해 물은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카인 주교는 마치 속내를 다 들킨 것 같아 말문이 막혔다.

사실 놀랄 것도 없었다. 이미 스스로 모든 것을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팽달수를 유진으로 오해하면서 대신전으로부터 전해 들은 바를 언급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이상하네. 당장 튀어오지 않은 걸 보면 대신전에서도 내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건데 그럼 왜 당장 나를 죽이라고 하지 않을까?”

“마왕님,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아무리 우리가 타니스 후작과 그 수하 삼천을 한 번에 쓸어 버렸다고 해도 대륙 최강 암살집단의 주교씩이나 되는 놈이 여기 있는데 이렇게 순순히 소피아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마치 카인 주교의 속내를 떠보듯 유진이 그를 노려보며 추리를 이어갔다. 유진 일행을 어서 빨리 소피아로 데려가 잡아둬야 하는 카인 주교는 입술이 바싹 말라갔다.

“너무 늦게 찾아뵈어 노여우신 거라면…….”

“케이아도스 대신전에 나를 산 채로 보고 싶어 하는 놈이 있다는 얘기인데…….”

“…….”

유진이 결론은 이거였다. 케아스 제국의 심장부인 케이아도스에 유진을 산 채로 만나보려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카인 주교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언의 긍정으로 유진의 말에 동의하고 만 셈이었다.

“이블리스가 뭔 냄새를 맡은 거 아니야? 우리가 자기 보러 간다는 거 말이야.”

“걔가 그럴 어떻게 알아? 이제 얘들 앞에서 떠들었느니 네 덕에 알게 되겠네.”

“왜? 얘들 살려 보내려고? 제 발로 걸어온 놈들을?”

카스카디아가 어김없이 눈치 없는 짓을 했다. 카인 주교의 면전에서 다음 행선지가 케이아도스라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물론 카인 주교는 이들이 곧 소피아에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주교 타렘이 직접 오는 이상 유진 일행을 살려둘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연히 이들이 케이아도스롤 향할 것이라는 말을 그리 귀담아듣지 않을 터였다.

“마물들은 다 모아놨고?”

“그게 아직…….”

“살려 둬. 아직 마물들을 덜 모았다잖아.”

그냥 다 죽여 없애자는 카스카디아의 말에 유진이 엉뚱한 것을 물었다. 서찰에 적어 두었듯이 소피아 주변에 퍼져 있는 마물들을 다 불러모았는지를 물었다. 그것이 마력 수련을 위한 재료들임을 알 리 없는 카인 주교는 얼떨결에 대답하는 자신의 모습이 참 궁색하다고 여겼다.

“그깟 마물들은 네가 직접 불러 모아도 되잖아!”

“너 같으면 오겠니? 다리 뜯어먹고 머리 뽑아 버리던 내가 부르면 오겠냐고?”

“당연히 안 오지.”

“그러니까 살려주라고. 아니면 네가 다 불러오든가.”

“그러고 보니까 인상이 좋네. 카인이라고 했나? 마물들 불러 모으는 거 잘 할 수 있지? 나 귀찮게 하지 말고.”

카인 주교는 좀처럼 유진 일행의 진짜 정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용사라는 놈 중 하나는 평생 뙤약볕에서 일하느라 머리까지 벗겨진 눙사꾼이 틀림없었다. 자신을 드래곤이라고 소개한 버릇없는 어린 여자애는 아무래도 정신이 온전치 못해 보였다. 머리에 꽂은 꽃이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감히 마왕을 사칭하고 있는 녀석은 마치 세상 모든 마물들 뜯어 먹어 본 것처럼 거들먹거렸다. 진짜 마왕이라면 모를까. 이 촌뜨기는 붉은목쥐 모가지도 못 비틀 것처럼 가냘팠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기는. 소피아로 가고 있잖아.”

“지금 나보고 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들과 손을 잡고 웃으며 소피아로 들어가라는 건가?”

그나마 샤이언이라고 불리는 이 녀석 하나만 제대로 된 사람 같았다. 사실 이들 중 진짜 용사가 끼어 있다면 응당 샤이언과 같은 반응이 나와야 했다. 빛의 신을 모시는 용사가 이블리스 교단의 주교인 카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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