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나도 좀 끼워줘.”
“네가 거기를 왜 껴? 네가 그게 왜 필요한데? 그냥 가만히 잠이나 처자면 알아서 나을 거 아니야?”
“그럼 심장을 돌려주든가. 아픈 걸 어쩌라고. 그리고 우리 헤르미오스 몸도 챙겨야 하고.”
카스카디아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심장이 반쪽이 나 버렸으니 몸이 온전할 리 없었다. 예전에 유진에게 당한 부상의 여파도 아직 남아 있었다.
게다가 이블리스에게서 구해낼 헤르미오스도 성할 리가 없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만병 통치약이나 다름없는 ‘푸른 숲의 정령수’를 손에 넣으려는 것이었다.
“누구한테 두드려 맞기라도 했대?”
“이블리스 그놈이 가만히 놔뒀겠어?”
“몰라. 갈 거면 너 혼자 가.”
“정말 이럴 거야? 너 혼자 ‘죽은 엘프들의 늪’을 지나가겠다고? 나랑 가는 게 여러모로 낫지 않겠어?”
카스카디아 또한 엘프들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푸른 숲’으로 들어가려면 ‘죽은 엘프들의 늪’을 건너야 했다. 유진으로서도 전력을 쏟아부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왜 혼자야? 달수도 있고 샤이언도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 데리고 가서 괜히 개죽음당하게 하지 말고 나랑 가지?”
“형님, 이게 뭔 소리입니까? ‘죽은 엘프들의 늪’은 또 뭐고요?”
“별로 중요한 거 아니니까 알 거 없어.”
“제 목숨이 달린 무지 중요한 내용 같은데요?”
‘죽은 엘프들의 숲’ 이야기를 처음 듣는 팽달수는 이게 뭔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얼떨결에 사지로 내몰린 샤이언도 마찬가지 표정이었다.
***
“그러니까 ‘푸른 숲의 정령수’가 있는 ‘푸른 숲’이라는 곳으로 가려면 반드시 다크 엘프들이 산다는 그 ‘죽은 엘프들의 늪’을 지나야 한다는 거네요?”
“그렇지!”
카스카디아가 주둥이를 바삐 놀렸다. 잔뜩 겁먹은 달수 녀석은 ‘죽은 엘프들의 늪’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카스카디아의 말이 이어질수록 자꾸 눈을 흘겨댔다.
“그리고 거기를 무사히 지나더라도 ‘푸른 숲’을 에워싸고 있는 세 부족의 땅 중 한 곳을 또 통과해야 하고요?”
‘죽은 엘프들의 늪’은 다크 엘프들의 땅. 그들은 자신들의 땅을 크나슈라고 불렀다. 엘프들의 언어로 ‘죽음의 늪’이라는 의미였다.
그곳에는 이블리스 못지않게 위험한 에모렙이 있었다. 다크 엘프들의 왕 에모렙. 이블리스가 어둠의 힘을 사용한다면 에모렙은 죽음의 기운을 다루었다.
게다가 운 좋게 ‘죽은 엘프들의 늪’을 무사히 통과한다고 해도 그 너머는 화이트 엘프들의 땅이었다. 그들의 세 왕국이 ‘푸른 숲’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야. 재수가 좋아서 ‘푸른 숲’으로 들어갔다고 치자. 거기가 어디 보통 장소야? 엘프들이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곳이라고. 그런 곳을 설렁설렁 관리하겠어? 그것도 다른 것도 아니고 영생의 근원인 ‘생명수’를 훔쳐가겠다는데 가만히 두겠냐고?”
무엇보다 ‘푸른 숲’은 모든 엘프들의 성지였다. ‘푸른 숲의 정령수’는 엘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생명수. 결코 외인들에게 내어줄 물건이 아니었다.
그곳을 지키는 여섯 장로들은 화이트 엘프들의 세 왕국인 ‘신성한 강’ 하우릴과 ‘어머니의 대지’ 판데리아, ‘나무 위 정원’ 가이아스의 옛 왕들이었다. 결코 허투루 볼 상대들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너 엘프였냐?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가봤으니까 알지.”
“이미 가봤으면 정령수도 얻어먹었겠네? 그런데 거기를 왜 또 가겠다는 거야? 그것도 꼽사리 붙어서.”
“그걸 얻어먹었으면 내가 거기 또 가겠다고 하겠냐? 드래곤 체면에 창피해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카스카디아 님도 들어가기 힘든 곳인가 보네요?”
“입구도 못 통과했어. 에모렙 놈이 어찌나 완강히 막아내던지…….”
사실 카스카디아는 이미 ‘죽은 엘프들의 늪’에 가본 적이 있었다. 유진에게 완전 개박살이 난 후 기운을 되찾기 위해 ‘푸른 숲의 정령수’를 구하려고 했던 터.
그러나 그 또한 에모렙을 당해내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다. 드래곤마저도 쉽게 볼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다크 엘프들의 왕 에모렙이었다.
“에모렙은 또 누굽니까?”
“다크 엘프들의 왕. ‘죽은 엘프들의 늪’을 지배하는 놈이야.”
“뭔가 이름부터가 으스스한데요. 다크 엘프라……. 그럼 화이트 엘프도 있겠네요.”
“원래 엘프들은 다 화이트 엘프였어. 그런데 그들 중에 정령수의 허락을 받지 못한 이들이 생겨났지.”
“정령수의 허락이요?”
“응. 영생을 얻으려면 ‘푸른 숲의 정령수’를 마시고 다시 태어나야 하거든.”
이제 샤이언도 대화에 가세하였다. 샤이언이나 달수 녀석 모두 엘프들의 세상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인간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엘프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시 태어난다고요?”
“그러니까 그게 우리 드래곤으로 말하면 탈피라고 할까? 여태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거죽을 벗어 버리고 새 몸을 얻는 거야.”
“그거 좋네요. 머리도 다시 자랄 거 아닙니까?”
“아마 그럴걸?”
“무슨 어려움이 있더라도 저는 가겠습니다!”
홀랑 벗겨진 머리가 다시 풍성해질 수 있다는 말에 달수 녀석은 주저하지 않고 동행하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카스카디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푸른 숲의 정령수’는 ‘푸른 숲’의 한가운데 생명수(生命樹)에서 흘러나오는 수액을 의미했다. ‘신성한 강’에서 흘러드는 물의 생명력과 ‘어머니의 대지’가 안겨준 땅의 기운, 그리고 ‘나무 위 정원’에서 흩날려온 생명의 씨앗이 ‘푸른 숲’의 생명수에 맺혀 새로운 영생의 기운을 북돋는 영험한 물이 된 것이었다.
“에모렙이 어떤 놈인 줄 알고?”
“그놈이야 형님하고 카스카디아 님이 처리해주실 거잖아요.”
“여태 뭘 들은 거야? 카스카디아도 그놈 때문에 ‘죽은 엘프들의 늪’을 못 지나갔다니까?”
달수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푸른 숲의 정령수’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자 오히려 카스카디아 말대로 달수나 샤이언을 두고 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를 구하려면 ‘푸른 숲의 정령수’를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달수나 샤이언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보다 더 강해지면 되잖아요? 그래서 그 사제 놈한테 마물들 죄다 긁어모아 놓으라고 하신 거 아니에요?”
“너랑 샤이언은 ‘죽은 엘프들의 늪’ 밖에서 기다려. 나 혼자 들어갔다가 올 거니까.”
아무래도 달수와 샤이언을 엘프들의 땅에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까지 두 사람이 엘프들을 상대로 제 몸 건사할 만한 수준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차라리 카스카디아를 데리고 가는 것이 나을 수도 있을 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 생명수를 한 모금만 마셔도 머리카락이 자란다면서요? 게다가 영생을 누릴 수 있는데 그걸 포기하라고요?”
“머리카락이야 다시 자랄 테지만, 아무리 정령수를 마신다고 해도 넌 영원히 살 수 없어.”
“저만 왜요? 대머리는 영생 안 시켜준답니까?”
“영생은 ‘푸른 숲’에서 살아야만 허락되는 거야. 평생 ‘푸른 숲’에서 살아야 한다고. 엘프들이 네가 거기 살도록 가만히 놔두겠어? 그리고 가리봉으로 안 돌아갈 거야?”
“아! 그런 뭣 같은 조건이 있는 줄 몰랐네요.”
이미 천형(天刑)과 같은 대머리 인생을 끝내고 영생마저 누리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달수 녀석을 설득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푸른 숲의 정령수’는 오직 ‘푸른 숲’에서 그 영생을 허락했다. 곧 영생을 누리려면 영원히 엘프들의 성지인 ‘푸른 숲’에 머물러야 했다. 정령수를 훔친 인간에게 엘프들이 그것을 허락할 리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희들은 ‘죽은 엘프들의 늪’을 통과하기 힘들어.”
“그건 또 왜요?”
“그곳은 영생을 허락받지 못한 낙오자들의 땅이야.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들은 영생을 누리고 있지. 왜일까?”
“거기도 생명수가 샘솟습니까?”
“아니, 그들은 다른 걸로 영생을 이어가거든.”
가장 결정적으로 달수가 샤이언이 살아서 ‘죽은 엘프들의 늪’을 건널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곳은 ‘푸른 숲’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다크 엘프들이 모여 사는 곳.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영생의 방법을 터득했다. ‘푸른 숲의 정령수’가 허락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방법으로.
“그럼 그 다른 걸 얻어먹으면 되겠네요.”
“다른 존재의 생명력을 빨아먹으면서 영생을 이어가는 엘프들이 바로 다크 엘프들이야. 우리가 가면 보자마자 생명력을 빨아먹으려고 달려들 거야.”
“카스카디아 님은 살아서 돌아오셨잖아요?”
“네가 쟤하고 같냐?”
“아!”
다크 엘프들이 영생을 누리는 방법은 바로 다른 존재들의 생명력을 빼앗는 것이었다. 즉 남을 죽여야 자신이 사는 존재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죽은 엘프들의 늪’은 지옥이 따로 없는 곳이었다. 영생을 위해 동족마저 죽여야 하는 곳. 그곳에 달수와 샤이언을 데리고 사려고 한 내가 어리석었다.
“됐어. 아직 한참 뒤 이야기인데 뭘 벌써부터 고민하고 그래?”
“뭐가 한참 뒤야? 헤르미오스 구하고 나면 바로 갈 건데.”
“헤르미오스는 뚝딱 구할 수 있고?”
“어쨌거나 나도 끼워줘. 몰라, 무조건 따라갈 거야.”
“그러든가 말든가. 대신 그 주둥이 꽉 다물고 있을 자신 있으면 따라와. 조금이라도 시끄러우면 바로 날개 튀겨 먹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카스카디아가 끼워달라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한결 든든하기는 했지만, 한동안 귀가 고생할 것이 뻔했다. 드래곤이라는 놈이 어찌나 말이 많은지.
***
며칠 뒤, 소피아 이블리스 신전에 또 한 번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대사제께서 이곳을 방문하시겠다는군.”
“대… 대사제께서요?”
이블리스 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대사제 타렘이 직접 소렐 왕국을 방문하겠다는 뜻을 전해온 터였다. 빛의 신 카렌의 사자가 ‘대륙의 현자’로 불리는 로디우스 제국 대사제 하드리안이라면, 어둠의 신 이블리스의 가장 충직한 종복은 ‘검은 그림자’로 불리는 이블리스 신전 대사제 타렘이었다.
“그래, 아무래도 이번 일을 문책하시려는 모양이야.”
“하지만 아무리 사제 여럿을 잃었다고 해도 대사제께서 케이아도스 대신전을 비우시다니요? 그럴 정도로 이곳 소렐 왕국이 대단합니까?”
“나도 그게 이해가 가지를 않는단 말이야. 로디우스 제국이 아직 저렇게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대사제께서 대신전을 비우시다니……. 도대체 무엇 때문이지?”
대사제 타렘이 케이아도스 대신전을 비우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이블리스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그가 아니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신탁을 듣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그였기에 좀처럼 대신전을 나서는 일이 없었다.
“혹시 주교님께서 올린 보고서 때문이 아닐까요?”
“보고서가 왜?”
“마왕을 참칭하는 그놈 말입니다. 그것 말고는 대신전에서 이리 민감하게 반응할 만한 게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대사제께서 직접 오실 필요는 없잖나? 어차피 사기꾼 녀석일 뿐인데 말이야.”
“사기꾼이 아닐 수도 있죠.”
“사기꾼이 아니라고? 그럼 진짜 마왕님께서 저들을 돕고 계시다는 말인가?”
카인 주교는 어쩌면 수하의 말이 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사제가 직접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을 정도라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절대악 이블리스가 마왕의 몸을 빌려 카이언 백작령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 사실이라면 응당 대사제가 달려와 그를 맞이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