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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 마왕족발-158화 (159/204)

<제158화>

며칠 뒤 밤, 게슴츠레한 그믐달이 소피아 왕궁 근처 이블리스 신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전 안에서는 이블리스 신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어둠의 의식이 한창이었다.

“아직도 그대로인가?”

“예, 주교님.”

“오호, 이블리스 신이시여! 제발 저 어린 양을 굽어살피소서.”

카인 주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타니스 후작이 이끄는 토벌대와 함께 카이언 백작령에 갔다가 겨우 혼자 살아서 돌아온 데얀 사제장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이블리스 신을 향한 신심만큼은 거짓이 없던 아이였다. 그래서 별 인연이 없었음에도 한눈에 그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데얀이 사제장의 자리에 오르도록 물심양면 돕지도 않았을 터.

그를 이곳 소렐 왕국에 데리고 온 것도 바로 카인 주교였다. 데얀 사제장은 종교적인 이유로 독신으로 살아온 카인 주교에게 자식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실성하여 돌아온 데얀 사제장도 걱정이지만, 참패의 후폭풍을 견뎌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토벌대가 전멸하면서 졸지에 소렐 조정 내 우호 세력이 모두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케아스에서도 이번 일을 추궁하고 나설 터. 소렐 왕국에 파견된 사제들을 지휘하는 주교인 카인 또한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사실부터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인할 게 뭐가 있나? 드래곤? 마왕?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카인 주교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소피아로 돌아온 이후 데얀 사제장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용사와 드래곤, 그리고 마왕. 모두 믿기 힘든 이야기들뿐이었다. 카이언 백작령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만은 사실일 터. 하지만 데얀 사제장이 늘어놓은 말들은 터무니없는 것들뿐이었다.

드래곤이 멸족했다는 사실은 아리아스 대륙 전체가 다 아는 일이었다. 근래 대륙 어디에서도 드래곤을 목격했다는 보고는 없었다.

게다가 마왕은 이미 용사 드웨인 하인라이트에 의해 죽은 것으로 공식 확인되지 않았던가. 마왕을 이블리스 신의 화신으로 믿는 카인 주교야 마땅히 마왕이 살아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미 죽은 마왕을 다시 살려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드래곤이 아직 남아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죽었다던 마왕님도 마찬가지고요.”

“데얀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고. 드래곤과 마왕은 모두 어둠의 기운 속에서 태어난 존재들이야. 그들이 어째서 위대한 이블리스 신의 권능에 도전하겠는가?”

데얀 사제장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드래곤과 마왕은 빛 보다는 어둠에 가까운 존재들. 이블리스 신의 편에 서는 것이 마땅했다.

그런데 그런 존재들이 이블리스 신의 의지를 따르는 사제들을 죽였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누군가 드래곤과 마왕을 참칭하며 간계를 부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거야… 하지만 불과 단 한 번의 전투로 타니스 후작과 토벌대 삼천이 전멸했습니다. 이 소렐 왕국에 그럴만한 세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알렉세이와 그 잔당들이 그랬을 리도 만무하고요.”

“그건 그렇지. 뭔가 있기는 있다는 건데…….”

하지만 카인 주교는 끝내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수하의 말도 일리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려 삼천이었다. 삼천에 달하는 토벌대를 흔적도 없이 전멸시킬 전력이 카이언 백작령 같은 곳에 있을 리 없었다. 혹여 카디즈 강 건너로 도망친 알렉세이 무리가 합류했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를 따르는 전(前) 붉은 장미 기병단의 규모는 기껏해야 수백. 이런 압도적인 승리를 얻어내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전력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사들뿐입니다.”

“용사들이 출현했다면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용사들이 어디서 뜬금없이 솟아났다는 건가?”

“로디우스가 있지 않습니까? 로디우스 제국이 이번 일에 깊숙이 관여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놈들이 벌써 이곳 소렐 왕국에까지 말인가?”

“우리도 이렇게 손을 뻗었는데 그들이라고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음…….”

가능성은 단 하나뿐이었다. 로디우스 제국. 그들이 이곳 소렐 왕국이 케아스의 차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렐 왕국이 무너지면 힘겹게 유지하고 있는 케아스 제국과의 힘의 균형이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 것이라는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주교님! 주교님!”

“왜 그러는가?”

“서찰입니다!”

“서찰? 누가 보낸 것이기에 이리 호들갑이야?”

그때 지금 한창 신성한 어둠의 의식 중임을 까먹은 모양인지 사제 하나가 촐싹거리며 급히 주교를 찾았다. 아마도 케이아도스 대신전에서 급한 전갈이 온 것일 터.

“마…… 마왕님이요!”

“마왕님? 그럴 리가 있나? 누가 이 서찰을 전했나?”

“떠돌이 골리아드였습니다. 우연히 카이언 백작령 인근을 지나다 부탁받은 것이라는데 웬 대머리 농군이 전해주었답니다.”

“대머리 농군?”

순간 카인 주교의 얼굴이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서찰을 보낸 이가 마왕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돈을 쥐여주기에 서찰을 여기까지 전한 것뿐이라는 떠돌이 골리아드(방랑시인)의 말은 거짓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돈과 함께 서찰을 건네주었다는 대머리 농군의 정체부터 알아내야 했다. 그래야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위험한 장난을 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터.

“하!”

“뭐라고 쓰여 있기에 그러십니까?”

“직접 보게나.”

서찰을 읽어내려가던 카인 주교는 하도 기가 막혀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수하의 물음에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서찰을 넘겨주었다.

“저들을 한꺼번에 일망타진하게 위해 마왕님께서 직접 나서 주신 것 아닙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네.”

“어찌 그리 자신하십니까? 정말 마왕님께서 그깟 드웨인 하인라이트의 손에 소멸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마왕님은 살아계시네. 내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지.”

“그… 그게 사실입니까?”

“절대 밖으로 퍼져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좌우를 살피던 카인 주교가 끝내 수하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마왕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카인 주교였다. 이곳으로 파견되기 전 케이아도스 대신전에서 직접 마왕의 얼굴을 보고 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마왕은 아직 드웨인 하인라이트와의 결투 여파로 인해 몸을 추슬러야 했다. 그런 그가 고작 알렉세이 대공 따위 때문에 이곳 소렐 왕국 카이언 백작령에 모습을 나타냈을 리 없었다.

“그럼요, 주교님. 그럼 카이언 백작령에 계신 분이 정말 마왕님이겠군요?”

“아니, 마왕님은 지금 케이아도스 대신전에 계시다네. 그러니 믿을 수 없다는 게지.”

“그럼 정말 사기꾼이군요? 고작 그런 놈들한테 토벌대가 전멸을 당한 것입니까? 그림자 사제들까지 돌아오지 못한 것도 그렇고 뭔가 이상합니다.”

“나도 그걸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기는 했다. 이 서찰을 보내온 자가 가짜 마왕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럼 도대체 삼천 토벌대를 전멸시키고 데얀 사제장이 이끌고 간 그림자 사제들을 모두 불귀의 객으로 만든 자는 누구라는 말인가. 그 정도의 압도적인 실력자가 카이언 백작령에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건 뭘까요? 근처에 있는 마물들을 모두 모아두라니…….”

“난들 아나. 제가 진짜 마왕님이라도 되는 줄 굳게 믿는 모양이지. 하!”

서찰을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곧 소피아로 갈 터이니 인근에 어슬렁거리는 마물이란 마물은 한 마리도 빠짐없이 모아두라는 당부까지 적혀 있었다. 고작 사기꾼 주제에 카인 주교 휘하 그림 사제단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울 놈이 마물들까지 한꺼번에 상대하겠다는 것인가. 카인 주교는 그저 이 사기꾼 녀석의 끝 모를 자신감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

그 시각, 소피아로 향하는 왕국 가도 한편에서 아직 잠들지 못한 네 여행객이 담소를 주고받고 있었다.

“괜한 짓을 한 게 아닐까요? 미리 적들에게 얼굴을 까 보인 꼴이잖아요?”

“믿지도 않을 텐데, 뭘.”

“믿을 수도 있잖아요.”

“안 믿어.”

“그걸 형님이 어떻게 아세요?”

“마왕이 친절히 편지 쓰는 거 봤어?”

“그럴 마왕 새끼가 아니죠.”

“죽을래?”

“아니, 이미지가 그렇다는 거죠.”

카인 주교에게 친절하게 서찰까지 전달한 인물은 역시 유진이었다. 그가 휘갈겨 적은 서찰은 팽달수의 손을 거쳐 왕국 가도에서 만난 떠돌이 골리아드에게로 전해졌다. 서찰의 내력을 모르는 방랑시인은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소피아에 있는 이블리스 신전에 전해주었을 터. 지금쯤 서찰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만한 놈들이었다면 저런 양아치 짓을 하고 있겠니?”

“그것도 그러네요. 그리고 미리 좀 알면 어떻습니까? 드래곤과 용사, 거기에 마왕까지 가세한 이 조합을 누가 막을 수 있겠어요?”

찜찜해 하던 팽달수가 이내 근심, 걱정을 훌훌 털어 버린 듯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드래곤에 마왕까지 옆에 끼고 있으니 세상 두려울 것이 없는 표정이었다.

“이블리스라면 또 모르지.”

“그놈이 그렇게 셉니까?”

“몰라. 붙어보지를 않아서. 그래도 명색이 신인데 물러터지지는 않았을 것 아니야.”

그러나 유진의 생각은 달랐다. 예전의 마왕이었다면 모를까 지금 상태로는 이블리스와의 대결에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모양이었다. 단 한 번도 맞붙어 본 적 없는 적수였기에 더욱 긴장할 수밖에.

“하긴 세상에 신이 어디 있다고……. 그런데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요?”

“뭐가?”

“진짜 마왕은 케이아도스에 있다는 말이요.”

“그냥 헛소리겠지. 나 같은 놈이 어디 또 있든가.”

“그럼 헛소리겠네요. 형님 같은 놈이 어디 또 있을 리 없잖아요.”

“너 오늘 좀 맞을 것 같다?”

게다가 반쯤 정신줄을 놓아 버린 데얀 사제장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케이아도스에 진짜 마왕이 있다는 그 말. 아무래도 유진이 모르는 또 다른 흑막이 있는 듯 보였다.

“유진! 유진!”

“너는 또 왜?”

“그거 진짜야? ‘푸른 숲의 정령수’를 찾으러 간다는 거.”

그때 어디서 들었는지 카스카디아가 불현듯 ‘푸른 숲의 정령수’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도 입 싼 팽달수에게서 들은 모양이었다.

“네가 왜 내 계획에 관심을 갖는 건데? 불안하게.”

“나도 누구 덕에 비만 오려고 하면 여기저기 안 쑤신 데가 없으니까 그렇지. 그거 바르면 좀 시원하게 나을까 싶어서.”

“‘푸른 숲의 정령수’가 무슨 파스냐? 맨소래담이야? 너까지 몰려가면 괜히 일만 커져.”

“파스? 맨소래담이 뭔데? 먹는 거야?”

“됐고, 신경 꺼.”

카스카디아는 ‘푸른 숲의 정령수’가 동네 의원들이 파는 고약인 줄 아는 눈치였다. ‘푸른 숲의 정령수’를 얻으려면 엘프들과 일전이 불가피했다. 그들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카스카디아가 동행한다면 큰 힘이 될 것은 분명했지만, 유진은 혹여 일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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