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그날 저녁, 유진 일행은 카이언 성으로 돌아와 있었다. 유진이 결국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사정하는 길리언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마왕 놈아!”
영주관 구석에 마련된 유진 일행의 처소는 아까부터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당장 케이아도스로 가자는 카스카디아의 절규 때문이었다.
같잖은 인간들 때문에 헤르미오스를 만날 날이 늦춰진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카스카디아였다. 카이언 성에 잠시 더 머무르겠다는 유진의 결정이 얼토당토않은 행동으로 보였을 터. 그러니 저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은데요?”
“그냥 놔둬. 사람들 겁먹지 않게 꽃 꽂아주는 거 잊지 말고.”
유진은 굳이 카스카디아를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면 애초에 머리에 꽃을 꽂아줄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드비어스가 그래도 제 몫은 하나 보네?”
“아니요, 걔는 벌써 지하 감옥에 갇혔죠. 그게 아니라 카스카디아 님이 새 친구를 사귀셨거든요.”
“새 친구? 별일이네. 그게 누군데?”
“직접 보세요. 저기.”
드비어스 자작은 감옥행을 면하지 못했다. 이곳은 카이언 성. 그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오히려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이 그로서는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카스카디아에게 네잎방울꽃을 찾아주는 수고는 다른 몫이 되었다.
“아, 안나? 둘이 꼭 자매 같네. 생긴 것도 비슷하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건만, 대공녀 안나가 그 수고를 자처했다. 둘이 나란히 머리에 네잎방울꽃을 꽂고 웃는 모습이 친자매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대공녀님을 모욕하지 마.”
“카스카디아랑 비슷하다는 게 욕인가? 방금 그 말 카스카디아한테 말해줘도 되냐?”
“그런 뜻이 아니잖아.”
“카스카디아가 무섭기는 한가 보네?”
“드래곤이니까. 마음만 먹으면 이 카이언 성 정도는 한순간에 모조리 태워 버릴 수 있는 존재.”
샤이언은 막상 유진의 발을 붙잡아놓고도 자신이 잘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타니스 후작을 막겠다고 드래곤을 성안에 들인 것이 영 찜찜했던 것이다.
드래곤이 어떤 존재인가. 트림하듯 별생각 없이 내뱉은 플레어만으로도 카이언 백작령을 모두 불태울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 물론 유진이 옆에 있으니 안심이 된다고는 하더라도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워낙 예측불허이다 보니 자꾸 신경이 쓰일 수밖에.
“내가 쟤 날개 튀겨 먹은 건 알지? 그럼 쟤가 아니라 나한테 존댓말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너는 식구잖아. 우리 식구.”
“어떤 후레자식이 아버지한테 반말 까디?”
“우리는 형제니까. 마물들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는 같은 목표를 가진 형제 말이야.”
“너는 형한테 반말해?”
“우리는 형제라기보다…… 영혼이 하나로 이어진 쌍둥이라고나 할까?”
사실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라면 응당 드래곤이 아니라 마왕이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샤이언은 유진을 전혀 스스럼없이 대했다. 그의 말처럼 정말 친형제라도 되는 것처럼.
이미 뫼니스에 머물던 시절부터 샤이언은 유진을 형제로 받아들인 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병대장 렉스와 알렉세이 대공 또한 그를 전장에서 피를 나눈 전우이자 형제로 여겼다. 아예 유진이 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안나도 있었고, 주방장님이라고 부르는 길리언도 있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유진은 그들에게 다가서기 어려운 용사도, 무시무시한 이력을 자랑하는 마왕도 아니기를 바랐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인지 샤이언 또한 한사코 유진에게 친근한 반말을 사용했다.
“드비어스보다 네가 더 능글거리는 거 아냐?”
“쑥스러워하기는. 아무튼 고마워. 이곳에 남아줘서 말이야.”
유진도 오글거리는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샤이언의 모습이 결코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그리고 이내 샤이언의 감사인사가 이어졌다.
“딱 열흘만이야. 열흘 내로 별일 없으면 그냥 떠날 거니까 그때 가서 딴소리하지 마.”
“어차피 소피아로 갈 텐데 뭐.”
“누구 마음대로? 누가 거기 가겠대?”
“소렐 왕국에서 가장 강한 마물이 소피아에 있는데 그걸 그냥 지나치겠다고?”
“그럼 가야지.”
샤이언은 유진 일행이 결코 여유를 부릴 사정이 아니라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더 많은 마물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 그 목적이 역시 용사다웠다. 이 원대한 대의를 가진 이들을 이곳에 붙잡아두는 게 미안할 정도였지만, 샤이언은 부끄러움을 무릅썼다. 그에게는 타니스 후작으로부터 카이언 성을 지켜내는 것이 마물들을 물리치고 아리아스 대륙에 다시 평화를 가져오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형님,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닙니까?”
“너는 또 뭔 헛소리를 하려고?”
“아니, 샤이언은 형님하고 친구처럼 반말하잖아요. 저하고 샤이언도 서로 반말하고. 그럼 저하고 형님도…….”
“그러니까 너도 반말하고 싶다는 거 아니야?”
“뭐 꼭 그러자는…….”
유진과 샤이언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팽달수는 억울한 마음이 솟구쳤다. 어째 관계가 이상하게 꼬인 것이 샤이언은 유진과 팽달수 모두와 반말로 대화하는 반면 팽달수만 유진에게 말을 높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알았다고요? 그럼 이제부터 반말해도 되는 겁니까? 정…… 정말로……?”
팽달수의 응석에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팽달수는 기다렸다는 듯 유진에게 말을 놓았다. 그러면서도 유진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왕 성질이 어디 가는 게 아니었으니까.
“죽고 싶으면 무슨 짓을 못 해.”
“방금 알았다고 하셨잖아요.”
“알았다고 했지 그러라고 했니? 네가 샤이언한테 존댓말 하면 되겠네. 그럼 다 정리되는 거잖아?”
“오호! 역시 유진은 똑똑해.”
고개를 끄덕였던 것은 괜찮은 해법을 찾았다는 의미였을 뿐 반말을 허락한 것이 아니었다. 유진이 내놓은 샤이언은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찬성했다. 그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는 해법이었다.
“그냥 살던 대로 살겠습니다.”
“그래? 그러든가. 그건 그렇고 정리해 놨어?”
결국 유진과 말을 놓으려던 꿈을 이내 접고야 마는 팽달수. 그런 그에게 유진이 미리 시켜둔 심부름은 어찌 되었는지를 물었다. 유진에게 달수는 딱 이 정도인 모양이었다
“이 몰골을 보면 모르시겠어요? 직접 하시면 금방인 걸 굳이 저한테 시키셔서는…….”
유진은 카이언 성에 돌아오는 길에 사냥개로 쓰이던 은갈기늑대들의 은신처를 깨끗하게 비워두라고 명했다. 오후 내내 혼자 그것들을 상대하느라 팽달수는 온몸이 피범벅이었다.
그런 와중에 샤이언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 것이 영 억울하고 속상했는지 유진의 물음에 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무척 퉁명스러웠다.
“그게 다 너를 위한 거야.”
“네네, 물론 그러시겠죠. 그런데 진짜 거긴 왜 정리해두라고 하신 건데요? 보니까 별것도 없던데. 그냥 제가 가만히 있는 꼴을 못 보시는 거죠? 제가 무슨 노비입니까?”
“그럼 열흘 동안 뭐 하려고?”
어째 이어진 유진이 말이 이상했다. 타니스 후작으로부터 카이언 성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열흘 내내 팽달수를 부려먹을 요량으로 이곳에 남은 것 같은 뉘앙스였다.
“타니스인지 타노스인지 상대하실 거라면서요?”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놈을 뭘.”
“그럼 뭐 하려고 남겠다고 하신 건데요? 늑대 육포라도 만들어서 파시게요? 또 다 제가 해야 하는 겁니까?”
“육포는 다음에 만들고. 훈련해야지. 놀면 뭐 해.”
“저 안 놀아요. 노비가 바쁠 틈이 어디 있다고…….”
다행히 열흘 내내 은갈기늑대를 때려잡아야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타니스 후작이 설치고 다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팽달수를 훈련시키겠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과연 일정을 열흘씩이나 미룰 정도로 시급한 일이었든가.
“마력은 늘어난 것 같은데 어디가 꽉 막힌 것처럼 마력만 끌어올리면 가슴이 막 답답하고 그러지 않냐?”
“아니오. 전혀 안 그런데요.”
“그게 다 훈련이 부족해서 그래.”
“안 그렇다니까요!”
사실 팽달수는 마력응축 증상을 보이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곳 아리아스 대륙으로 넘어온 이후 너무 급하게 몬스터 사냥에 매진한 탓이었다.
이미 가리봉 시절 마력 수준을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이미 C 등급을 넘어 B 등급을 바라보는 경지였다.
그러나 B 등급은 결코 만만한 경지가 아니었다. 그것도 처음부터 B 등급으로 각성한 것도 아니고 몬스터 사냥을 통해 마력을 끌어올린 경우였기에 마력응축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바로 첫 번째 벽이지.”
“글쎄 안 그렇다고요!”
“내가 옆에 있다는 걸 행운인 줄 알아. 그 벽을 너 혼자서 깨려면 아마 백 년도 더 걸렸을걸?”
“듣지 않으실 거면 차라리 물어보지를 마세요.”
유진은 타니스 후작을 기다리는 동안 팽달수의 벽을 깨뜨려줄 생각이었다. 곧 닥칠 난관을 미리 돌파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속성 코스로 하자.”
“저는 이대로도 무지 만족스럽거든요.”
“이렇게 훈련에 대한 의지가 강한 걸 보니 내가 더 고마운데? 아무래도 네가 더 강해진다면 나로서는 부담을 많이 덜 수 있을 거야. 고맙다, 달수야.”
“심부름 더 시켜 먹으려고 이러시는 거 제가 모를 줄 압니까?”
“그럼 바로 갈까?”
애초에 팽달수의 의견 따위는 물을 생각도 없던 유진이었다. 경험이 없으니 미리 말해준다고 알아들을 것도 아니고 유진이 옆에 있으니 굳이 그러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카스카디아 님은요?”
“그냥 놔둬. 데리고 가봤자 시끄럽기나 하지. 렉스한테 미리 말해 두었으니까 열흘 동안 잘 돌봐줄 거야. 누가 누구를 돌보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카스카디아 님은 걱정하지 마. 남도 아니고, 내가 특별히 신경 쓸 테니까.”
끌려가다시피 훈련에 돌입하게 된 팽달수가 안쓰러워서였을까. 샤이언은 유진과 팽달수가 훈련하는 동안 카스카디아를 성의껏 접대할 생각이었다. 타니스 후작과의 일전을 목전에 둔 지금 드래곤과 친해져서 나쁠 것이 없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너나 신경 써.”
“나?”
“그래, 너. 너도 가야지. 그렇게 비실비실해서 용사라고 할 수 있겠어?”
“가기는 어디를?”
“못 들은 척하기는. 달수보다 네가 더 빡세게 훈련해야 해.”
하지만 샤이언은 금세 용사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유진이 말하는 바를 다 알아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 부정하고 싶었다. 마왕이 작정하고 들볶을 것이 뻔한 마당에 순순히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형님, 저는 찬성입니다.”
“내가 안 간다니까?”
“좋아. 명색이 용사인데 이렇게 시원한 맛이 있어야지.”
“야! 안 들려? 안 간다고!”
이번 훈련의 주된 목표가 자신이 아니라 샤이언이라는 말에 팽달수는 신이 난 듯 보였다. 유진은 여전히 귀를 닫고 있었고 졸지에 마왕의 장난감이 되어 버린 샤이언만 미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