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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 마왕족발-147화 (148/204)

<제147화>

같은 시각, 베른 호수에서는 아직도 아침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으레 음식 하나를 요리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들이는 유진이었다.

“캬! 바로 이 냄새죠!”

간장과 유사한 코티노스가 졸아붙으면서 내는 향이 식욕을 자극하자 자연스레 팽달수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가리봉 왕족발’ 주방장이 직접 요리한 코뿔멧돼지 족발의 향은 이런 감탄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코뿔멧돼지 고기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마터면 그 쫄깃한 식감을 느껴보지 못했을 터. 어제 엄청난 식욕을 자랑한 카스카디아로부터 용케 코뿔멧돼지 고기 일부를 지켜낸 팽달수의 공이 컸다.

“밥 안 하니까 좋지?”

“아리아스 대륙 최고의 주방장 앞에서 저 같은 게 어디 감히 요리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마력은 그대로이고 어째 그 입담만 나날이 느는 것 같다?”

“뭐든 하나만 잘하면 먹고사는 시대 아닙니까? 마력이 전부라는 편견을 버리십시오.”

팽달수는 아주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유진이 직접 실력을 발휘한 덕분에 애초 밥 짓는 일을 맡았던 자신은 먹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흔치 않은 휴식 기회였다. 유진이 계속해서 요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장단만 맞춰주면 그만이었다. 워낙 맛있는지라 본인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오니 그리 고된 일도 아니었다.

“훗! 하여간 뭔 말을 못 해요. 그건 그렇고 아직이야?”

“거… 거의 다 됐습니다.”

“재료는 제때 시간 맞춰서 넣어야 맛있는데…… 그러니까 달수 네가 그냥 하라니까. 다음부터는 쟤 시키지 마.”

“형님, 이제 겨우 허드렛일에서 벗어났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영 손발이 안 맞잖아.”

그러나 이런 여유도 잠시. 잔심부름을 대신에 맡은 드비어스 자작이 굼뜨게 구는 통에 팽달수는 오랜만에 맛보는 휴식을 고스란히 토해내야 할 판국이었다.

“이 미꾸라지 같은 새끼!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이제까지 옆에서 지켜보지 않으셨습니까? 허리 한 번 안 펴고…….”

“그러니까! 하라는 거 열심히 안 하고 농땡이를 피우니까 허리를 그렇게 오래 안 펴고도 멀쩡한 거지!”

졸지에 다시 잔심부름꾼이 될 위기에 처한 팽달수가 드비어스 자작을 나무랐다. 이제 허튼짓은 포기했는지 고분고분해진 드비어스 자작이었지만, 팽달수의 이번 꾸중에는 정말 억울한 듯할 말이 많은 눈치였다.

“예? 그… 그게 무슨 억지입니까?”

“억지? 이 새끼가 아주 도끼눈을 뜨고 덤비네? 그래서 지금 네가 잘했다는 거야? 몽둥이찜질 해달라고 아주 발악을 하는구나. 형님, 이 새끼 몽둥이로 잘근잘근 타이르면 분명 다시 잘 할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에이, 정신 사납게. 달수 네가 얼른 손질해서 가지고 와. 둘 다 굶기 싫으면.”

“너 이따가 보자.”

결국 드비어스 자작이 하던 일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된 팽달수. 표정이 환할 리가 없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겨우 벗어난 잔심부름꾼 신세로 돌아와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분통이 터지는지 팽달수는 드비어스 자작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건 고약한 냄새가 안 나네? 향기도 좋고.”

“마력삼이라는 거야. 여기서는 파낙스라고 부를걸?”

팽달수가 넘겨받은 일거리는 다름 아닌 마력삼을 손질하는 일이었다. 족발로 다시 태어난 코뿔멧돼지 고기를 개똥민들레를 이용해 독성을 제거하는 것과 달리 히포하데스 고기는 제독을 위해 마력삼이 필요했다. 카스카디아는 마력삼이 생소한지 실뿌리를 집어 씹어 먹었다.

“파낙스라고? 파낙스라면 만병통치약이잖아?”

“약효가 좋기는 하지. 카이언 백작이 바로 기운 차린 거 봐.”

카스카디아와 달리 샤이언은 파낙스라는 이름을 듣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리봉은 물론 이곳 아리아스 대륙에서도 마력삼의 약효는 여전했다. 그 신기한 약성으로 인해 당연히 이곳에서도 만병통치약으로 통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드래곤과 같은 존재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풀떼기일 뿐이었다.

“이건 그냥 이렇게 생으로 먹으면 돼?”

“아니, 이건 저거 독성 없애는 데 쓰일 거야.”

“히포하데스 고기? 진짜 저걸 먹겠다고?”

“마력삼만 있으면 못 먹을 게 없거든. 이거로 도가니탕이나 끓이려고.”

“도가니탕? 그게 뭔데?”

“음……. 그냥 몸에 좋은 거야. 관절에도 좋고.”

유진은 카스카디아가 뽑아낸 히포하데스 앞다리로 도가니탕을 끓일 생각이었다. 도가니탕이 무엇인지 알 리 없는 카스카디아가 오히려 더 관심을 보였다. 내심 코뿔멧돼지 족발 냄새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챈 그였기에 유진이 만들어줄 다른 요리에도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잘됐네. 어떤 놈 때문에 비만 내리면 날개에서부터 팔, 다리는 물론 혓바닥, 눈깔에 이르기까지 안 아픈 데가 없거든.”

“그렇지 않아도 너 먹으라고 끓이는 거야. 겸사겸사 우리도 먹고.”

사실 유진이 굳이 다른 요리도 아닌 도가니탕을 끓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다니고 있지만, 과거 자신이 카스카디아에게 했던 일들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세상 그 어떤 존재가 눈과 혀를 뽑고, 사지를 부러뜨려 뽑아내 튀겨먹기까지 한 상대와의 동행이 즐거울까.

“나? 진짜? 몸보신시킨 다음에 잡아먹게?”

“세상에 드래곤 잡아먹는 사람이 어디 있냐?”

“입에 침이나 좀 바르시지? 어쨌든 챙겨준다니까 싫지는 않네.”

“이리 와서 간이나 봐. 싱거우면 말하고.”

농담인 듯 마음을 표현한 유진의 진심이 싫지 않았는지 카스카디아도 농담으로 고마움을 에둘러 표현했다. 멋쩍은 유진은 괜스레 카스카디아에게 간을 봐달라며 말을 돌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살갑던지 과거의 악연이 상상이 가지를 않았다.

후르릅.

“캬! 이거 완전 맛있는데!”

기분이 좋아진 카스카디아는 주저 없이 국물을 떠먹었다. 처음 맛보는 도가니탕 맛은 환상적이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드래곤의 입맛을 이렇게 완벽하게 맞춘 것을 보면 유진이 주방장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도가니탕은 이쪽. 그건 아까 달수 발 닦은 물이고.”

“우욱!”

“무좀은 거의 다 나았고요. 그냥 살짝 발가락만 담갔다가 뺀 물입니다. 제가 애기 피부라 꼭 따뜻한 물에 씻어야 해서요, 헤헤.”

그런데 카스카디아가 떠먹은 국물은 사실 도가니탕이 아니었다. 팽달수가 천형(天刑)처럼 달고 다니는 무좀 치료를 위해 한참 동안이나 발을 담그고 있던 물이었다. 겸사겸사 발가락 사이에 낀 때까지 벗겨가면서.

“유진!”

“용사님!”

그때 어디에선가 유진 일행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에서 일련의 무리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다행히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어? 형님, 저기 렉스 대장 아닙니까? 베론도 보이고. 다들 여기까지 웬일이지?”

“입이 늘었으니 마력삼 좀 더 손질해야겠다. 개똥민들레도.”

카이언 성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별안간 모습을 드러내자 팽달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샤이언은 혹시나 카이언 성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너 이번에도 미적거리면 저 코뿔멧돼지 고기랑 너도 같이 삶아 버릴 줄 알아.”

“그냥 달수 네가 해.”

유진은 그저 마음 편히 요리 생각뿐이었다. 자신감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혹시 이번에도 중간에 잔심부름을 넘겨받을까 봐 드비어스 자작부터 들볶는 팽달수. 그러나 유진은 처음부터 드비어스 자작이 아닌 팽달수를 선택했다. 능숙한 그를 부려먹는 것이 속 편한 유진이었다.

“길리언, 이 먼 곳까지 왜 온 거야?”

“주방장님 만나려고요.”

“일단 앉아. 밥 먹자. 다들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아니, 지금 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알았으니까 먹으면서 얘기해. 길리언처럼 성장기 애들은 밥때 놓치면 키 안 커. 자.”

유진은 불청객들 모두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마침 대식가 카스카디아를 위해 적지 않은 양을 요리해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게 뭐예요? 엄청 맛있어요.”

“도가니탕이라는 거야. 우리 길리언 입맛에도 맞는다니까 다행이네.”

도가니탕을 먹어본 길리언은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감탄사를 뱉어냈다. 그 모습이 기특했는지 유진이 길리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괜찮아. 말해 봐, 길리언.”

“주방장님, 우리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버리다니 누가 누구를 버린다는 거야? 베론, 이게 무슨 말이야?”

이번에도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길리언. 버리지 말라며 애원하는 그의 눈동자가 애처로웠다. 불과 하룻밤 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어린 길리언이 이렇게까지 애원하는 것인가.

“타니스 후작님이 무서운 거겠지.”

빡!

“너 왜 갑자기 말이 짧아졌냐?”

“아… 아니, 그러니까 타니스 후작님께서 곧 이리 오실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다들 불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드비어스 자작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흡사 자신을 구해줄 구세주라도 만난 표정이었다.

“타니스 후작이 누군데?”

“친 케아스파 귀족들의 수장. 저놈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매국노지.”

순간 유진의 눈동자가 빛났다. 길리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애원했더라면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였을 리 없는 유진이었다. 팽달수는 타니스 후작이 누구인지조차도 몰랐다.

“네가 불렀냐?”

“부… 부르다니요? 맨날 이렇게 개똥민들레 손질하기 바쁜 제가 무슨 수로 타니스 후작님을 부른다는 말씀입니까?”

“아, 똥 냄새! 그 손은 내리고.”

달수의 추궁이 이어졌다. 드비어스 자작은 일부러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개똥민들레를 집어 들었다. 남들 몰래 전서구를 띄운 사실을 숨기려는 의도였다

“그놈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다들 이러는 거야? 뫼니스 기병대로도 힘들어?”

이번에는 유진이 질문을 이어갔다. 렉스까지 이리 달려온 것을 보면 뫼니스 기병대만으로는 상대하기 벅찬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성을 떠난 유진 일행을 이렇게 다급하게 찾아온 것일 터였다.

“카이언 백작령을 본보기로 삼고 있는 터이니 더 잔혹하게 밟아 버리려고 할 거야. 우리 힘만으로 타니스 후작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제발 도와줘.”

렉스는 자존심도 잊은 채 유진에게 매달렸다. 덥석 손까지 잡는 것이 여간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뭔 상관이야? 우리가 무슨 얘들 부모도 아니고 이제 알아서들 해야지.”

“카스카디아 님, 저들을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너까지 왜 이래? 구질구질하게. 유진, 출발 안 할 거야? 지금 한가하게 전쟁놀이나 할 때가 아니잖아.”

카스카디아는 인간들 일에 끼어들 이유가 무엇이냐며 선을 그었다. 당장에라도 케이아도스로 달려가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샤이언은 그런 그에게 머리까지 숙여 가며 부탁했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뫼니스 식구들이 카이언 성에서 몰살당하는 것만은 막고 싶은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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