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바란 황태자의 말을 대놓고 비웃는 타니스 후작의 작태에 대해 그 누구도 불편한 낯빛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들을 살피는 바란 황태자의 눈동자가 축축하게 젖어왔다. 그 또한 이것이 소렐 왕국이 처한 진짜 현실이라는 사실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동부 7국 연합이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승자의 여유가 담긴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건네는 타니스 후작. 그 내용이 이제까지 속내를 숨겨온 가증스러운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동부 7국 연합처럼 망국이 되어 사라지고 싶지 않으면 케아스 제국에게 머리를 조아리라는 의미였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타니스 경?”

“베냐스는 완전히 불타 폐허가 되었고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던 선제후 가문은 일족이 모두 도륙당했다더군요.”

“지금 나를 겁박하는 겁니까?”

애초에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동부 7국 연합 또한 소렐 왕국과 마찬가지로 동맹국 로디우스 제국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로디우스 제국은 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대륙 최강의 기사라는 드웨인 하인라이트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컸던 것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동부 7국 연합의 수도 베냐스는 잿더미로 변해 버렸고, 선제후 파에얀 대공의 일족은 산 채로 그렌델의 먹이로 던져지는 치욕을 당했다.

“그럴 리가요. 제가 혹시라도 그런 불충한 마음을 품었다면 이리 공손하게 황태자 전하를 대하고 있었겠습니까?”

“부왕께서 직접 황태자로 삼으신 나를 인정하지 않고 페이런을 앞세워 멋대로 왕국의 운명을 결정하려는 건 불충한 마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타니스 후작은 이황자 페이런 소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할 속셈이었다. 바란 황태자는 반 케아스 귀족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루빨리 소렐 왕국이 케아스의 차지가 되기를 바라는 타니스 후작은 바란 황태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저 왕좌는 신께서 정하시는 자리입니다. 동부 7군 연합은 그런 신의 뜻에 반하였기에 멸망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현실이라는 거죠.”

타니스 후작이 다시 한번 바란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신하된 자가 망령되이 황태자를 겁박하며 멸망을 거론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던가. 봉신(封臣)이 아니라 흡사 적장을 마주한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만큼 소렐 왕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동부 7국 연합이 무너진 이상 다음은 소렐 왕국이 화를 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훗! 경이 믿는 그 잘난 신께서는 소식이 좀 늦는 모양입니다?”

“소식이라니요?”

그렇게 오늘도 천인공노할 매국노를 앞에 두고도 맥없이 고개를 숙여야 할 것 같던 바란 황태자가 오히려 그를 비웃고 나섰다. 로디우스 제국에서 뒤늦게라도 원군을 보내주기로 한 것인가.

“카이언 백작령에 용사가 출현했다는 소식 말입니다.”

“지금 용사라고 하셨습니까? 하하하!”

로디우스 제국이 아니라 용사였다. 카렌 신의 대리자들이라는 용사. 어둠의 신 이블리스를 신봉하는 케아스 제국으로서는 결코 달갑지 않을 존재였다. 그것은 타니스 후작 또한 마찬가지.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타니스 후작은 용사가 출현했다는 바란 황태자의 말에 숨이 넘어갈 듯 폭소를 터뜨렸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용사가 출현했다면 당장 케아스 제국에 보고해야 할 급보였다. 은둔자들을 의식해 특별히 카이언 백작령으로 보내 둔 드비어스 자작이 벌써 소식을 전해 왔을 터. 잠잠하다는 것은 바란 황태자의 말이 헛소리라는 의미였다.

평소였다면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타란 황태자였다. 신하인 타니스 후작이 황궁이 떠나갈 정도로 삿대질까지 해가며 황태자를 비웃는 상황에 버티고 있을 재간이 없었을 터.

“그리 마음 편히 비웃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아파서 운신조차 못 한다던 카이언 백작이 직접 전해왔더군요. 경에게도 안부 전해 달라더군요. 정녕 모르셨습니까? 그 잘난 이블리스의 화신이라는 마왕조차 용사 드웨인 하인라이트의 손에 목이 잘렸죠. 현실이 어떠한지 이제 좀 감이 오십니까?”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바란 황태자는 어디 한 번 실컷 웃어보라는 듯 여유롭게 타니스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웃음이 그치기가 무섭게 카이언 백작의 안부 인사를 대신 전했다. 이래도 믿지 않을 것이냐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

잠시 뒤, 소피아 왕궁의 대문을 가로막듯 마주 보고 서 있는 타니스 후작의 저택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서둘러 궁에서 돌아온 타니스 후작의 목소리였다.

쾅!

“새파란 애송이가 감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탁자를 내려치는 타니스 후작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신들이 다 지켜보는 앞에서 애송이라고 여겼던 바란 황태자에게 조롱당하는 치욕을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후작 각하, 고정하십시오.”

“아까 그 깐족거리는 태자의 얼굴을 보고서도 지금 그런 말이 나오나!”

“…….”

수하들이 말려보려고 했지만, 한 번 벌게진 낯빛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란 황태자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그 앞에서 이렇게 기세등등하던 적이 없었다.

“그게 사실인가? 드비어스가 카이언을 빼앗겼다는 게 사실이냐는 말이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어낸 이야기일 테지요. 카이언 백작이 직접 서신을 보내왔다는 게 사실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자는 코데린에 중독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각하.”

막상 소리부터 지르고 봤지만, 타니스 후작 또한 바란 황태자의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바란 황태자의 절대적 지지자인 카이언 백작은 이미 드비어스 자작에 의해 강력한 독약인 코데린에 중독된 상태였다. 뫼니스 기병대가 카디즈 강 건너 은둔자들의 땅으로 숨어든 직후부터 카이언 백작을 제거하려는 공작을 펼쳐온 터.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장기간 서서히 독을 써왔지만, 워낙 장기간에 걸쳐 독을 써왔기에 이미 송장이나 다름없을 카이언 백작이었다. 그런 그가 바란 황태자에게 직접 서찰을 보내왔을 리가 없었다.

“그럼 태자가 대신들이 다 보는 앞에서 헛소리를 했다는 건가? 아니야, 분명 뭔가 있는 눈빛이었어. 당장 카이언에 사람을 보내보게. 은둔자들과 힘을 합쳤을 수도 있어.”

분명 헛소리라는 걸 알았지만, 타니스 후작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자신을 비웃던 바란 황태자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눈빛은 분명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병든 드미트리어스 국왕의 이름을 빌려 내쫓았던 알렉세이 대공이 카이언 백작을 구해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용사가 출현했다는 말은 비유적 표현이었을 터.

“똑똑똑.”

“뭔가?”

“후작 각하, 카이언에서 보내온 전서구입니다.”

“전서구? 카이언에서?”

“그것 보십시오. 드비어스 자작이 용사라는 것들에게 당했다면 이렇게 소식을 전해올 수 있었겠습니까? 다 태자가 꾸며낸…….”

그때 마치 타니스 후작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용사가 나타났다는 바로 그 카이언 백작령에서 날아온 소식이었다.

아무튼 전서구가 도착했다는 것은 드비어스 자작이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정말 용사가 카이언 백작령에 나타났다면 드비어스 자작을 절대 살려두었을 리가 없었다.

쾅!

“후… 후작 각하, 어찌 그러십니까?”

전서구가 전해준 쪽지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타니스 후작이 다시 탁자를 내려쳤다. 아까보다도 더 화가 난 듯 얼굴이 금세 다시 타올랐다.

그의 심기가 불편해진 이유를 묻는 수하들. 카이언 백작령에 예기치 못한 사달이 일어난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카이언 성을 빼앗겼다는군.”

“빼앗기다니요? 누구에게 말입니까?”

드비어스 자작이 전해 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곧 뫼니스 기병대를 토벌하는 전진기지로 삼으려던 카이언 성을 빼앗겼다는 소식이었다.

카이언 성은 그저 흔한 변방의 보잘것없는 성이 아니었다. 케아스 제국의 소렐 정복이 이곳에서 시작되어야 했다. 그것이 타니스 후작의 구상이었다. 그래서 심복 중의 심복인 드비어스 자작을 보낸 것이 아니던가.

타니스 후작에게서 쪽지를 넘겨받은 수하들이 다시 그 내용을 살폈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용사가 출현했다는 말이 사실인 것입니까? 드웨인 하인라이트가 다시 나타나기라도 했다는…….”

쾅쾅쾅!

“당장 카이언으로 출발한다.”

타니스 후작은 참을 수 없었다. 바란 황태자에게 당한 치욕이 문제가 아니었다. 카이언 백작령을 빼앗겼다는 것은 곧 타니스 후작이 구상한 소렐 점령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는 의미였다. 제국에서 그의 능력을 의심할 수도 있었다. 늦기 전에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했다.

당장 모든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카이언으로 가야 했다. 국왕의 재가 없이 병력을 이동시켰다는 질책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카이언으로 향해야 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하, 성급하게 결정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드비어스 자작이 마도사였다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이리 쉽게 당할 드비어스 자작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맞습니다. 황태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실 것입니까? 후작 각하께서 소피아를 비우시게 하려는 계략일 수도 있습니다.”

흥분한 타니스 후작을 수하들이 진정시켰다.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드비어스 자작은 ‘어둠의 핏빛 표식’을 가진 마도사였다. 그의 손에서 뿜어 나오는 검붉은 마력이라면 그깟 은둔자들쯤이야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진짜 용사가 출현한 것만 아니라면 졀대 카이언 성을 빼앗길 리 없는 그였다.

게다가 타니스 후작이 지금 소피아를 떠나 카이언 성으로 향한다면 한창 궁지에 몰려 있던 바란 황태자의 숨통을 트여주는 꼴이었다.

결론적으로 드비어스 자작이 보냈다는 이 쪽지마저 의심해보아야 했다. 바란 황태자도 언제까지 형편없는 대응만 해오지는 않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자는 건가? 내 체면이 뭐가 되냐고!”

수하들의 말에 화가 좀 풀렸는지 체면을 따지기 시작하는 타니스 후작. 이미 바란 황태자의 말을 헛소리라고 결론 지은 눈치였다.

“각하, 먼저 ‘그들’을 보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런 연후에 출발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 ‘어둠의 그림자’들 말인가? 황태자는 어쩌고?”

“황태자가 어디 가겠습니까? 어차피 황태자는 그들 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타니스 후작의 마음에 쏙 드는 해법을 제시했다. 굳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시골 촌구석인 카이언 백작령까지 다녀오는 수고를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어둠의 그림자’들이라면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정리할 수 있을 터. 다만 이런 허드렛일을 맡기기에는 그 능력이 너무나도 출중한 자들이라는 것이 미안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