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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 마왕족발-142화 (143/204)

<제142화>

영주성 대연회장에서 곧 이곳에 올 타니스 후작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는 드비어스 자작.

“훗! 용사라니. 어이가 없군.”

연회장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살피던 그가 뜬금없이 실소를 머금었다. 용사가 출현했다는 실없는 보고를 새삼 곱씹고 있던 것이다.

용사라는 존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마지막 용사였던 드웨인 하인라이트가 잠적한 이후 더 이상의 용사는 출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카렌 신이 세상을 버렸다고도 했다. 드비어스 자작이 조국 소렐을 버리고 케아스에 붙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신마저 버린 소렐 왕국에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끼이이이.

“자… 자작님!”

“루베른,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그때 대연회장의 커다란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들고 입술이 터져 피를 흘리는 루베른이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루베른이 누구인가. 이곳 카이언 백작령의 실질적인 주인인 드비어스 자작의 오른팔이었다. 사실상 이곳 카이언 성에서만큼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그를 이리 형편없이 패 줄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머… 머리에 꽃……!”

“머리에 꽃이라니?”

눈두덩이 하도 부어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실틈으로 겨우 드비어스를 찾은 루베른의 눈동자는 겁에 질려 있었다.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이 거의 실성한 사람의 모습 같았다.

쾅!

그때 누군가 대연회장 문을 걷어찼다. 국왕 드미트리어스 소렐 8세조차도 이제 눈치를 봐야 하는 타니스 후작을 맞이할 장소였다. 한창 꾸미느라 바쁜 이곳의 문을, 그것도 드비어스 자작이 그 안에 있음에도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카이언 백작령에 존재했던가.

“드비어스! 어떤 새끼가 드비어스야? 알아서 기어 나올 것이지 꼭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요.”

“루베른을 이리 만든 것이 네놈인가?”

“누가 드비어스냐고! 너야?”

마침내 문제의 인물이 얼굴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휑한 대머리로 보아 제법 나이가 있어 보였다. 행색은 초라했지만, 드비어스를 보자마자 말을 놓아 버리는 것을 보면 귀족인 것이 분명했다.

드비어스 자작은 굳이 상대의 정체를 묻지 않았다. 대머리 뒤로 따라 들어온 녀석의 수하는 겨우 셋. 상대가 누구든 몬스터 먹이로 던져 버리면 그만이었다.

“루베른을 쓰러뜨리다니……. 하긴 용사랍시고 떠들고 다니려면 그 정도 실력은 있어야겠지. 하지만 네놈 혼자서 카스란디르 기사단 전체를 상대할 수 있을까?”

수족인 루베른을 저리 만든 것은 괘씸했지만,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루베른을 꺾은 것은 분명 운이 좋았던 것일 터. 이런 뜨내기 정도야 카스란디르 기사단원 몇이면 충분했다.

“카스카디아 님, 이 새끼 혼자 자꾸 떠드는 거 보니까 얘 맞는 것 같은데요.”

그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다른 이를 부르는 대머리. 아마도 실질적인 우두머리는 카스카디아라고 불린 인물인 듯 보였다.

“카스카디아? 훗! 보아하니 그 알량한 검술 실력으로 여기저기 떠돌면서 사기나 치고 다니는 모양인데 꼴에 드래곤 이름을 갖다 붙인 건가?”

카스카디아라는 인물이 어찌 생겼는지 살펴볼 것도 없었다. 그 이름만 들어도 대충 어떤 인물인지 짐작이 되었다. 인간이 드래곤의 이름을 훔치다니. 미천한 오크가 어둠의 제왕 이블리스의 이름을 도둑질하는 것과 같았다. 실력은 없으면서 허풍으로 사람들 심리를 자극하는 것들이라는 의미였다.

“얘 맞아? 머리에 꽃 없는데?”

그때 한 아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겨우 열예닐곱이나 되었을까. 그러더니 느닷없이 드비어스의 머리를 살폈다. 이유는 모르지만, 꽃을 찾는 눈치였다.

‘저 아이가 두목인가? 의외군. 그런데 이 아이도 귀족인 건가? 도대체 어디서 온 놈들이지?’

드비어스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 우두머리가 이렇게 어린 여자일 줄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어린 것이 꼬박꼬박 반말을 던져 댔다. 드비어스가 자작 작위를 가진 귀족임을 모를 리 없음에도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반말을 내뱉는 것을 보면 저 아이 또한 귀족임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자작에게 서슴없이 하대할 수 있는 꽤 높은 신분일 터.

“어중간해서 그래.”

“하긴. 이런 촌동네 하나 다스리는 게 뭐 대수라고.”

그 우두머리와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녀석까지 등장했다. 저놈도 고위 귀족이라는 말인가. 드비어스 자작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들이 자신을 어찌 비하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였다.

“도대체 기사단은 뭘 하고 있기에 이런 별 볼 일 없는 것들을 영주성 안까지 들어오게 놔두는 건가!”

소피아 중앙 정계에 이런 인물들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드비어스 자작이 아무리 이런 촌구석에 박혀 있는 신세라고 해도 저들이 소렐의 귀족이었다면 얼굴 정도는 본 적이 있어야 했다.

어쩌면 로디우스 제국에서 온 자들일 수도 있었다. 거물급 인물을 사로잡아 타니스 후작에게 눈도장을 찍을 기회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욱 짜증이 났다. 허무하게 당하고 돌아온 루베른도 지금쯤 모습을 보였어야 할 카스란디르 기사단도 불만이었다.

드비어스 자작은 일부러 꾸짖듯 카스란디르 기사단을 찾았다. 어서 이곳으로 와 저 정체 모를 자들을 에워싸라는 명령이었다.

“얘네 찾아?”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은 의외로 카스카디아라는 상대 우두머리였다. 여자애답지 않은 거친 걸음으로 문 쪽으로 향한 그녀가 이내 문밖으로 반쯤 몸을 내민 채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퍽. 퍼벅. 퍼버벅.

그러고는 곧바로 그것들을 대연회장 안으로 집어 던지는데, 정신을 잃은 채 축 늘어진 사내들이었다. 공통점이라면 그들 모두 드비어스 자작이 그토록 신임하는 카스란디르 기사단 복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자애는 지치지도 않는지 끝이 없이 사내들을 집어 던졌다. 얼핏 세어 보아도 기사단 인원의 절반은 돼 보였다. 나머지 절반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십중팔구 달아난 것이 분명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냥 말로 하려고 했는데 꽃 꽂은 애 데리고 오라니까 자꾸 헛소리들만 해 대잖아.”

꽃 꽂은 애를 데리고 오라니? 그저 핑계가 필요했다는 의미였다. 루베른과 카스란디르 기사단원들이 어찌 대처했든 결과는 같았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곳 카이언 성을 찾은 것이 철저하게 계획된 행위라는 뜻이 아닌가. 드비어스는 이렇게 귀족 기사들을 여럿 보내 자신을 치게 할 이유가 무엇일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격은 맞춰 주어야겠지. 내가 직접 상대해 주마.”

차르릉.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곳에서 저런 귀족 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병들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카이언 백작과 드비어스 자작뿐이었다.

검을 뽑아 드는 드비어스 자작의 표정이 그럴듯했다. 자신감이 충만한 표정이었다. 검명(劍鳴)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아마도 저 자신감은 남다른 검에서부터 나오는 듯 보였다.

“오호!”

“자작님께서 카스란디르를 뽑아 드셨어!”

그때 하던 일을 멈추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드비어스 자작이 뽑아 든 저 검이 바로 카이언 백작가는 물론 소렐 왕국의 보물이라고 일컬어지는 명검 카스란디르였다.

“그게 그 유명한 카스란디르냐?”

“그래도 아주 촌놈들은 아닌 모양이구나. 레드 드래곤 일족의 수장이라는 카스카디아의 목을 베고 그 역린을 뽑아 만들었다는 이 카스란디르가 베지 못할 것은 세상에 없…….”

이번에는 대머리와 여자애 뒤에 멀뚱히 서 있던 한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이자 또한 대뜸 반말이었다.

그래도 카스란디르를 알아주자 기분이 좋아진 드비어스 자작의 입이 바빠졌다. 은연중에 이제 자신이 카스란디르의 주인임을 자랑하고 싶은 눈치였다.

휙!

“헉!”

그러나 그는 아직 한참이나 남은 이야기를 끝마칠 수 없었다. 그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가 어찌 움직인지도 모를 정도로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을 가르며 그의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체면도 잊은 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드비어스 자작. 어찌나 당황했던지 여자애가 카스란디르를 만지작거리고 있음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게 무슨 역린이야. 훅훅. 냄새가 딱 그거네.”

“어쨌든 네 비늘이잖아?”

“아닌데?”

“그래? 그럼 헤르미오스 건가?”

검이라도 찔러 댈 줄 알았던 여자애는 의외로 카스란디르의 냄새만 맡고 물러났다. 그러고는 저희들끼리 또 알 수 없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이름이 카스카디아라더니 정말 본인이 드래곤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재질 자체가 드래곤 스케일이 아니라고.”

“빛깔은 맞는 것 같은데?”

“비늘하고 발톱이 빛깔이야 비슷하지.”

“바… 발톱?”

순간 드비어스 자작은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어이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건 거의 모욕에 가까웠다. 어찌 이 전설의 명검 카스란디르를 냄새나고 더러운 발톱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하도 기가 차서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대화에 끼어들기까지 했다.

“그래, 발톱. 겨우 발톱 조각 훔쳐 가서 보검이랍시고 떠받들고 있던 거야? 하여간 인간들은 재미있다니까. 아! 얘만 그런 건가?”

“헛소리하지 마라! 내가 그따위 거짓말에 속을 것 같으냐! 네놈이 뭔데 감히……!”

드비어스 자작은 마치 제가 모욕당한 것처럼 흥분했다. 아무리 소렐 왕국을 버렸다고는 하지만, 드래곤 스케일로 제작한 보검은 아리아스 대륙 어디를 가도 찾을 수 없는 보물임에 분명했다.

그 보물이 이제 그의 손에 있었다. 드비어스 자작은 카스란디르를 깎아내리는 것은 곧 그 주인인 자신을 비하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 그 발톱 주인.”

상대는 심리전의 고수들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같잖은 말로 드비어스 자작을 도발했다. 세상에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가 드래곤이라는 빤한 거짓말로 자신을 희롱할 줄은 생각도 못 한 바였다.

“용사라더니 죄다 사기꾼들이었군. 어떤 요망한 술수를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곧 내 앞에 나타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고오오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드비어스 자작은 이내 이들이 귀족 기사가 아니라 사기꾼들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카스란디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어둠의 힘 특유의 붉은색 마력이 반투명한 카스란디르에 서려 묘한 빛을 발했다. 케아스 제국 마도사를 상징하는 ‘어둠의 핏빛 표식’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하하하! 이 정도 마력은 처음 접해 보는 모양이군. 겁먹은 꼴들이 아주 볼만하구나.”

모두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자 의기양양해진 드비어스 자작. 그는 사실 이미 뼛속까지 케아스의 개였다. 저 ‘어둠의 핏빛 표식’이 그것을 증명했다. 이블리스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어깨에 힘이 실릴 만했다. 자신이 바로 이곳 사람들이 그토록 떠받드는 용사나 다를 바 없는 마도사라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더욱 어깨를 곧게 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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