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한편 카이언 성 중앙광장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유진 일행이 보란 듯이 수문장과 병사들을 때려눕힌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세! 만세!”
“이거 완전 아이돌 수준인데요?”
만세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사람들은 샤이언이 황금빛 마력을 뿜어내자 더욱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케아스에 빌붙은 드비어스 자작 같은 이들이 늘어나도 이들을 단죄할 힘조차 없는 소렐 왕국이었다. 카이언 백작령의 사정도 마찬가지. 사람들은 그저 용사가 나타나 이 모든 역경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을 품고 있었다.
그 희망마저 반쯤 포기하고 있던 찰나 샤이언이 양손에서 용사의 상징인 황금빛 마력을 뿜어대며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니 모두 이렇듯 광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그만큼 그동안 지독하게 시달려왔다는 거지.”
“유진, 일단 카이언 백작부터 구해야 해.”
이 분위기를 즐길 법도 하건만, 샤이언은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카이언 백작부터 구해야 한다며 의지를 다지는 모습이 적어도 용사라는 위명에 도취하여 사람들의 희망을 배신할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런데 그놈 이름이 뭐라고? 그 매국노 놈 말이야.”
“드비어스 자작. 원래 백작 직속 기사단인 카스란디르 기사단 단장이었던 자야.”
“카스란디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네 역린으로 만들었다는 그 검 이름이잖아.”
이곳 카이언 백작령은 변경 지역인만큼 별도의 기사단을 두고 있었다. 카스란디르 기사단. 소렐 왕국 사람이라면 그 위대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레드 드래곤 카스카디아를 베고 그 역린으로 만든 검 카스란디르를 휘두르며 소렐 왕국과 이곳 카이언 백작령의 초석을 다진 전설의 검사 키릴 백작이 만들었다는 바로 그 기사단이었다.
카스란디르 이야기가 나오자 카스카디아가 자연스레 관심을 보였다. 그에게 소렐 왕국의 영웅 키릴 백작은 멀쩡히 불어 있는 자신의 역린을 떼어다가 검을 만들었다고 소문낸 파렴치한 사기꾼일 뿐이었다.
“내 역린? 내 역린이 어디 또 있었나? 여기 잘 있는데?”
“오우씨!”
“좀 가려.”
“여자애, 아니 여자분이 가슴을 어디 그렇게 훌렁 뒤집어 까고 그럽니까?”
“내가 내 가슴 뒤집어 까는데 네가 뭔 상관이야?”
“아이, 진짜! 인간들은 안 그런다고요!”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억울한 마음에 역린이 달린 가슴 한복판을 까 보이는 카스카디아.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덕분에 역린은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직 어려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남자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한 완연한 가슴골이 다른 이들의 시선을 민망하게 했다.
유진과 팽달수, 샤이언까지 모두 황급히 고개를 돌린 상태로 카스카디아를 말려보지만, 이들이 왜 고개를 돌리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그녀는 여전히 앞섶을 풀어헤친 채였다.
“인간들은 네가 오래전에 죽은 줄 알고 있어. 카릴이라는 인간에 의해서 말이야.”
“푸하하하! 카스란디르 기사단인지 뭔지는 내가 쓸어 버리지. 나 카스카디아가 인간의 손에 죽었다고? 푸하하하! 근래 들은 말 중 가장 어이가 없는 말이군.”
게다가 자신이 그 못생긴 드워프보다도 더 하찮게 여기는 인간의 손에 죽었다는 소리에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카스카디아의 말처럼 농담이 아니고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체면이고 뭐고 따질 것도 없이 이리 허리가 끊어지라 웃음이 터져 나올 법도 했다.
“꽃 더 꺾어 올까요?”
“됐어. 더 꽂을 데도 없어.”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유진과 팽달수는 걱정이 앞섰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딱 실성한 것으로 보이기에 십상이었다.
그렇게 다른 모두가 그녀가 배꼽을 잡고 웃는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그때. 주변이 고요해졌다. 광장이 떠나가라 울려 퍼지던 만세 소리가 멈췄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만세를 대신했다.
이내 인파가 반으로 갈라졌다. 적의(敵意) 가득한 눈동자를 가진 이들이 다가섰다.
“네놈들인가? 용사라는 것들이?”
“그러는 너는 누구냐? 네가 찾는 그 ‘용사들’이 우리가 맞는 것 같기는 하거든?”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와 유진 일행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눈빛에 제법 위엄이 서려 있는 것이 어중이떠중이나 다름없던 수문장과는 확연하게 달라 보였다.
다짜고짜 반말부터 내뱉으며 다가서는 녀석이 영 탐탁지 않은지 팽달수가 똑같이 반말로 되받아쳤다. 이런 기 싸움에서는 이제 좀처럼 밀리지 않는 팽달수였다. 마력이 붙으면서 더 기세가 오르던 참이었다.
“성문을 어찌 통과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 하나에 기력도 없어 보이는 대머리 노인네 하나, 그리고 삐쩍 마른 촌놈 둘이라……. 도대체 어디 용사가 있다는 거지? 하하하!”
이에 질세라 우두머리 녀석은 볼품없는 외모를 지적하며 유진 일행의 기를 꺾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녀석은 자신도 모르게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달수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대머리를 운운한 것이었다.
“야! 너 이게 대머리로 보여? 와, 이런 억울하고 황당한 경우는 평생 처음이네!”
“…….”
진심으로 억울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우두머리 녀석을 바라보는 팽달수. 만세를 외쳐대던 사람들도 어이가 없는지 할 말조차 잃은 채 팽달수의 휑한 머리를 새삼 한 번씩 살폈다. 어찌 된 것인지 그 눈빛이 우두머리 녀석의 그것과 같아 보였다. 심지어 유진과 카스카디아, 샤이언조차도.
“이렇게 숱 많은 대머리 봤어?”
“도대체 어디 숱이 많다는 거야?”
“눈깔이 삐었나. 똑바로 보라고 이 동태 눈깔아!”
“동태가 뭔데?”
“동태가 뭔지도 모르는 돌대가리가 감히 누구더러 대머리라는 거야!”
팽달수는 다른 사람들 시선이야 어떠하든 목소리부터 높였다. 자신이 대머리라는 사실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치고. 너는 뭐냐?”
대화가 길어지자 유진이 끼어들었다. 결론이 명백한 대머리 논란은 이제 끝내자는 의미였다.
“나?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여기 발을 들인 것이냐?”
“그러니까 너 누구냐고? 아니다, 조무래기들 이름까지 일일이 알 거야 없지.”
“감히 나를 조무래기라고 하다니!”
우두머리 녀석은 우두머리 녀석대로 억울한 빛이 역력했다. 카이언 백작령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 없는 자신을 유진 일행이 몰라보자 기분이 몹시 상한 듯 보였다.
“네가 드비어스야?”
“자작님이 네놈들 친구인 줄 아느냐!”
“드비어스인지 뭔지 아무튼 걔는 아닌가 본데요?”
하지만 이 녀석은 유진 일행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드비어스 자작이 아니었다. 이미 손을 봐준 사냥꾼이나 수문장처럼 단지 그의 하수인일 뿐.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앞선 자들보다 제법 형형한 눈빛과 제대로 된 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조무래기 맞네. 달수 네가 해결해.”
“또 접니까? 저보고 밥하라면서요? 이런 잡일은 분담해야죠.” “자… 잡일? 이것들이 감히 카스란디르 기사단 부단장인 나 루베른을 뭐로 보고……!”
드비어스 자작의 오른팔 루베른은 여기서 또 대머리 발언보다 더 커다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카스카디아 앞에서 카스란디르라는 말을 내뱉은 것이다. 물론 이번에도 루베른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카스란디르 기사단? 카스카디아 님, 얘 카스란디르 기사단이라는데요?”
“어이! 네놈이 그 대단하다는 카스란디르 기사단이야?”
“꼬맹이 녀석이 그래도 어디서 들은 것은 있는 모양이구나. 네년은 특별히 살려서 내 몸종으로 삼아주마.”
“그러니까 네가 감히 이 카스카디아 님 역린을 뜯어갔다고 뻥친 그 사기꾼 놈 중에 하나라는 거지?”
루베른은 아직도 카스카디아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그저 아직 젖살이 남아 있는 처녀가 버릇없이 반말을 찍찍 내뱉는 것으로만 보였다.
“엄밀히 말해서 쟤가 뻥친 건 아니지.”
“어쨌든 그 사기꾼 놈하고 아예 연관이 없는 건 아니잖아?”
“연관성을 따지는 건 좀 무리인 것 같다만……. 하긴, 아주 무관하다고 볼 수도 없지.”
“그러니까. 아무도 끼어들지 마. 야! 너 이리 와봐.”
카스카디아의 맥락 없는 논리에 유진이 못 이기는 척 맞장구를 쳐줬다. 이미 답을 정해놓고 묻고 있는 카스카디아에게 반기를 들기 싫었던 것일 터. 아니면 조무래기야 어쨌든 빨리 처리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었다.
“훗! 얘야, 아무리 네가 어리다고 해도 자꾸 그렇게 까불면 이 아저씨가 막 못되지고 싶지 않겠니? 너는 이따가 손봐줄 테니까 일단 빠져 있…….”
“아니다. 그 드비어스인지 뭐시기인지 네 윗대가리 나오라고 해. 그냥 한 번에 끝내자.”
정작 루베른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카스카디아의 말대로 여기서 순순히 드비어스를 부르러 갔다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것들이 정말!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느냐?”
여기서 루베른은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서둘러 드비어스 자작을 부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검을 뽑아 들고 한 발짝 더 카스카디아를 향해 다가가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이거 안 보여?”
“하하하! 아주 잘 보이는구나. 어쩐지.”
“그래, 그러니까 가서 가장 높은 놈 데리고 와.”
“어린 나이에 쯧쯧. 더는 못 들어주겠군. 다 생포해!”
루베른의 반응에 카스카디아가 이내 자신의 머리에 꽂은 꽃을 가리켰다. 그것이 무리의 우두머리를 상징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녀였기에 그것을 보여주며 상대의 우두머리인 드비어스를 찾은 것이었다.
당연히 루베른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말로만 듣던 그 머리에 꽃 꽂은 미친년의 발광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있으니 혀를 찰 수밖에.
“대장 불러오라니까? 귓구멍이 막혔어? 뭔 말을 이렇게 못 알아들어!”
카스카디아는 카스카디아대로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없는 의사전달이 왜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지를 답답해했다. 그렇게 비극이 시작되었다.
검을 빼든 십여 명의 카스란디르 기사단원들이 점점 카스카디아에게로 다가서고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 모두 숨죽인 채 결과를 지켜보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용사들이 정말 드비어스 자작 일파를 몰아낼 수 있는지가 여기서 판가름 날 수 있었다.
휘이익!
그 순간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를 회오리바람이 사람들 사이를 휩쓸고 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회오리바람이 바로 눈으로 좇아가기 힘들 정도로 재빠른 카스카디아였다는 사실을.
빡! 빠바박!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연이은 타격음들. 소리가 채 사람들 귓전을 때리기도 전에 카르란디르 기사단원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헉!”
“뭐야? 갑자기 왜 다 쓰러지는 건데?”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네 눈앞에 걔 솜씨야. 아무래도 살고 싶으면 그 드비어스라는 놈을 불러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구경하던 사람들은 물론 루베른까지도 카스카디아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팽달수와 샤이언도 마찬가지였다. 유진이 나서서 설명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이것이 그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터였다.
“야! 가서 너희들 대장 불러오라니까! 머리에 꽃 꽂은 애 없어?”
이것으로 기선 제압은 확실하게 끝낸 셈이었다. 아직도 그 뜻도 모른 채 꽃 타령을 하는 게 좀 흠이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