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달수가 고생한 덕에 어렵지 않게 성문을 지난 후. 조심스레 카스카디아를 불렀다.
“카스카디아, 잠깐 이리 와 봐.”
“왜?”
“이거 예쁘지?”
“뭔 개수작이야?”
“그래도 여자애로 폴리모프했는데 이 정도는 꾸며줘야지. 역시 혈통 좋은 드래곤이라 그런지 어떻게 해도 예쁘네.”
“하긴, 내가 혈통 하나는 내세울 만하지.”
그러고는 슬쩍 거리에 핀 야생화를 꺾어 녀석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달콤한 핑계와 함께.
“형님, 형수 생각나세요?”
“죽을래? 그게 아니라 일종의 표지판 같은 거야. 보나마나 아무나 붙들고 반말 막 지껄일 텐데 저렇게라도 해 놔야 귀찮은 일이 안 생기지.”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달수가 다가와 이유를 물었다. 나는 카스카디아가 듣지 못하게 귓속말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인간 마을에 이런 모습으로 들어가는 것은 처음일 카스카디아가 무슨 황당한 짓을 벌일지 몰랐다. 일일이 설명하느니 이렇게 미리 대비를 해두는 것이 나아 보였다.
“아, 하긴 그렇겠네요! 그건 그렇고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한 사람도 반겨주지를 않네요. 애써 은갈기늑대에 성문지기들까지 처리해 줬건만.”
카이언 성안은 썰렁했다. 마치 버려진 도시처럼 거리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진짜 모두 이곳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분명 집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모두 숨어 창밖을 주시할 뿐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겁이 나서 그럴 거야.”
“그새 소문이 퍼진 거야? 우리 마왕 형님 진짜 십 년 동안 어떻게 사셨기에 이 정도입니까?”
“유진 때문이 아니야.”
“그럼 뭐가 겁이 난다는 거야?”
“드비어스 자작. 카이언 백작령 영지민들에게는 마왕보다도 더 무서운 자가 바로 그니까.”
샤이언의 말처럼 이곳 카이언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언제든 드비어스 자작의 말 한마디면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가 사람들을 모두 숨어들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동네 이장 놈 하나 어쩌지 못할까 봐 간 보고 있다는 거잖아?”
“너는 뭘 또 말을 그렇게까지 하고 그러냐? 다 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제 말이 틀렸습니까, 형님? 성문에서 그 소란을 떨었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요.”
달수가 성문 수문장과 병사들을 초주검이 되도록 시끌벅적하게 패준 덕에 이미 성안에 소문이 파다할 터였다. 곧 드비어스 자작과 그 수하들이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진짜 상대는 아직 등장도 안 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렇게 몸을 사리며 눈치를 살피는 것일 터.
“어?”
그때 누군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모두 일부러 숨기 바쁜 와중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목숨을 살려주셨는데 당연히 제가 감사드려야죠. 그런데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혹시 붉은가지 숲에서 오셨나요?”
“예, 어르신.”
“역시! 그런데 이게 다입니까?”
조금 전 사냥꾼에게 쫓기던 그 노인이었다. 본인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우리 걱정을 해 준 사실에 고마움을 표하자 노인은 오히려 목숨을 빚졌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우리의 정체를 물었다. 우리가 성문지기 병사들을 손쉽게 제압하자 뫼니스 기병대일 것이라고 짐작한 눈치였다. 제대로 된 뫼니스 기병대원이라고는 샤이언 혼자뿐이었지만, 카디즈 강을 건너온 것은 사실인 만큼 대답을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이내 그가 우리의 뒤를 살폈다. 달랑 네 명이 전부라는 사실에 적잖이 실망한 것 같았다. 고작 이 인원으로 드비어스 자작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결론 내린 모습이었다.
“왜? 누가 더 와야 하나?”
“카스카디아, 어르신께는 존댓말을 해야지.”
“너 몇 살인데?”
“이제 예순둘입니다만…….”
“난 삼천팔백… 얼마였더라? 아무튼 그 정도. 반말해도 되지?”
“아! 그… 그럼요.”
심심했던 모양인지 카스카디아가 그에게 흥미를 보였다. 드래곤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없다는 본인 설명과 달리 카스카디아는 노인의 실망스러운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손녀뻘 외모의 카스카디아가 반말을 찍찍 싸지르는데도 노인은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그녀의 머리에 미리 꽃을 꽂아두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는 왜 나한테 반말하냐?”
“존댓말 하면서 눈깔 뽑고 날개 뜯어 튀겨먹으면 너무 무섭잖아.”
“힘없으면 닥치고 있으라는 거네? 인정. 그런데 그거 따지고 보면 내 힘이잖아?”
“이제는 내 거지. 헤르미오스 보기 싫어?”
“아, 이 마왕 새끼!”
그간 내게 반말을 들어온 것이 새삼 억울했는지 카스카디아가 도끼눈을 뜨고 따져 물었다. 하긴 태어나서 이제껏 살아온 세월만 따진다면 삼천 살을 훌쩍 넘긴 그녀는 감히 반말을 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이제 와서 존댓말을 해줄 생각은 없었다. 녀석은 인간이 아니고, 나도 드래곤은 아니니까. 좀 치사하기는 하지만, 서로 얽힌 과거도 그렇고 지금 처한 상황도 어른 대접을 해주기에는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았다.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방금 왔는데 어디를 또 가라는 거야?”
“곧 자작의 수하들이 몰려올 겁니다. 그들은 성문지기들하고는 다르다고요.”
아무튼 그건 그렇고. 노인은 한결같이 반말을 뱉어대는 카스카디아에게 어서 몸을 피하라고 조언했다. 물론 그것은 카스카디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냥꾼이나 은갈기늑대 무리, 그리고 성문지기들과는 비교하기 힘든 진짜 적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말이었다.
“걱정 마세요. 여기 이분이… 아니다. 이쪽은… 이쪽도 아니고. 참, 누구 하나 마음 놓고 소개할 수가 없네. 샤이언, 이리 와 봐.”
“갑자기 왜?”
그런 노인을 안심시키려는 듯 앞으로 나선 달수. 그러나 달수 녀석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마왕인 나를 소개하기도 그렇고, 드래곤인 카스카디아가 우리 편이니 안심하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샤이언을 부르는 달수.
“어르신, 얘가 좀 비리비리해 보여도 ‘황금빛의 서임’인가 뭔가를 받은 용사예요, 용사.”
“이… 이분이 용사님이라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오히려 이편이 나아 보였다. 마왕이나 드래곤보다는 용사가 대접받는 세상이니까. ‘가리봉 왕족발’ 주방 설거지 보조 드웨인 하인라이트가 마왕 유진을 한 방에 정리하고 조용히 초야에 묻혀 지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에게 ‘용사’라는 말의 무게는 마왕보다 절대 가볍지 않았다.
“뭐해? 보여드리지 않고?”
“뭘?”
“뭐라도 보여드려야 믿을 거 아니야?”
“굳이?”
“얼른!”
고오오오.
샤이언은 결국 달수 성화에 못 이겨 두 팔에 마력을 끌어모았다. 녀석의 주먹에 맺힌 형형한 황금빛 기운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신성해 보였다.
“오호, 카렌 신이시여! 정녕 이 카이언을 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노인은 감탄사를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카렌 신을 찬양했다.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존재를 애타게 기다려왔던 것일 터였다.
“저게 뭐 대단하다고. 나도 보여줄까?”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드래곤 체면이 있지. 이거 하나 더 꽂아줄게.”
“거추장스럽게 이런 건 왜 자꾸 꽂는 거야?”
“원래 가장 높은 사람은 뭘 주렁주렁 매달고 꽂고 하는 거야.”
“내가 여기서 대장이라는 표식인가?”
“그렇지.”
“아하!”
눈치 없이 떠들어대는 카스카디아를 야생화 하나로 진정시켰다. 그리고 느긋하게 중앙 광장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굳이 애써 찾아가지 않아도 알아서 기어올 드비어스인지 뭔지를 기다리면서.
***
그 시각 드비어스 자작은 카이언 영주성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영주관 백작 집무실에서 이러저런 서류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못 진짜 백작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아직 성문에서 벌어진 소란이 이곳까지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작님, 소피아에서 보내온 전갈입니다.”
“타니스 후작 각하께서?”
“예.”
“음…….”
그때 수하 중 하나가 다채로운 수실로 꾸며진 고급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귀족들 간 주고받는 공식 서한에 으레 그려져 있어야 할 쌍사자 문양은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곧 카디즈를 건너시겠다는군.”
서찰의 내용은 놀라웠다. 타니스 후작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 카디즈 강을 건너 대공 알렉세이 소렐을 잡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소렐 왕국이 케아스 제국에 휘둘리기 시작하면서 가장 급부상한 인물이 바로 타니스 후작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케아스 제국의 개가 된 그였다. 드비어스 자작은 매국노인 그의 뒷구멍을 핥는 충복 중 한 명일 뿐.
“직접 이리 오신다는 겁니까?”
“그러실 모양이야.”
“그럼 자작님께는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감축드립니다.”
“감축은 무슨.”
수하의 말대로 이것은 드비어스 자작에게 다시없을 기회였다. 뫼니스를 토벌하려면 분명 타니스 후작은 한동안 이곳 카이언 성에 머물러야 할 터였다. 왕국의 실세인 그에게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였다.
“차라리 미리 뫼니스를 쓸어 버리시죠. 후작 각하께서 이곳에 오시기 전에 다 정리해 둔다면 자작님의 능력을 높이 사실 것입니다.”
“그러시려나?”
“이제 이 촌구석을 벗어나셔야지요.”
“그럴 때가 되기는 했지.”
그뿐이 아니었다. 능력을 제대로 펼쳐 보인다면 이런 시골구석이 아니라 소피아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도 있었다. 타니스 후작은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때 어디에선가 함성이 들려왔다. 비명이라면 모를까 함성이 들릴 리 없는 카이언 성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자작님, 큰일 났습니다!”
“웬 호들갑이야? 방금 그건 무슨 소리고?”
때마침 또 다른 수하 하나가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저 의문의 함성이 어디서 왜 들려오는 것인지 알리러 온 것일 터.
“과… 광장이요!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영지민들이? 훗!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건가?”
드비어스 자작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저 농사나 지을 줄 아는 영지민들이 모여 봤자 별것 있겠느냐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그는 내심 그 용기만큼은 가상하다고 여겼다. 어슬렁거리다 잘못 걸리면 여지없이 은갈기늑대의 먹이 신세가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광장에 모여든 그 무모함도 높이 샀다.
“아직도 그런 불가능한 망상에 젖어 있는 놈들이 남아 있다니 놀랍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누가 개돼지만도 못한 소렐 것들 아니랄까 봐. 쯧쯧.”
비록 대리라고는 하지만, 드비어스 자작은 본인이 다스리고 있는 곳의 영지민들을 개돼지보다 못하다며 업신여겼다. 귀족들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는 우월감과는 좀 다른 것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은 더는 소렐 사람이 아니라는 듯 그들을 비웃었다.
“그… 그게…….”
“왜 그래? 그 미련한 것들이 뭘 할 수 있다고. 뫼니스 기병대 놈들이라도 가세했나?”
그런데 광장 소식을 알리러 온 수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드비어스 자작은 일부러 더 비꼬듯 영지민들을 깎아내렸다.
“용사가 나타났답니다.”
“용사? 하하하! 이런 촌동네에 드웨인 하인라이트라도 탄생했나 보지? 미련한 놈들.”
이어진 보고에 드비어스 자작은 아예 폭소를 터뜨렸다. 카이언 영지민들과 달리 드비어스 자작은 용사의 출현을 그리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