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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 마왕족발-132화 (133/204)

<제132화>

울창한 숲을 지나 암석지대로 들어섰다. 겁도 없이 뒤따라오던 은갈기늑대 무리는 나를 향한 반발심을 보란 듯이 표출한 달수 녀석에게 고스란히 마력을 헌납해야 했다. 물론 드베르그와 샤이언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혀… 형님!”

“유… 유진!”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라 칠흑같은 동굴 속을 횃불에 의지해 겨우 통과했다. 동굴을 빠져나오고 보니 달수와 샤이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얘들 얼굴이 왜 이 모양이냐?”

“외눈거미한테 물렸거든요.”

우리가 지나온 동굴은 바로 외눈거미 떼의 보금자리. 그리 대단한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물리는 날에는 온몸이 한동안 마비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너는 뭐 했는데?”

“예……? 아까 외눈거미들 다 제가 처리하는 못 보셨습니까?”

“그러니까 겨우 외눈거미 몇 마리 처리하면서 얘들 이렇게 되도록 뭐 했냐고?”

“아니, 제가 손이 서너 개도 아니고…….”

드베르그만 들볶을 일이 아니었다. 녀석은 제 할 몫 이상을 해주었다. 달수와 샤이언이 외눈거미들에게 물린 후 드베르그 혼자서 고군분투한 끝에 동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내가 일부러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모습을 의심해 볼 법도 하건만, 역시 녀석은 드워프였다. 저 머리로 아니악의 지배자가 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서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거야?”

“유진님께서 조금만 힘을 보태주시면…….”

“얘들 이렇게 된 게 내 탓이라는 거네?”

“그… 그럴 리가요! 제 말씀은 그러니까…….”

그래도 아주 바보는 아닌지 조금씩 의심을 품기 시작하는 눈치였다. 드래곤 하트를 손에 넣기 전까지 더 확실하게 현 상태를 숨길 필요가 있었다. 미련하기 그지없는 드워프 따위 때문에 가리봉에 돌아가지 못하는 불상사를 겪을 수는 없을 테니까.

“카스카디아가 그렇게 빠득빠득 대들라고 가르치든? 그놈 안 되겠네. 도대체 아랫것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확 조져 버리든가 해야지, 원.”

“……!”

드베르그 정도야 직접 상대할 필요도 없었다. 녀석들은 천성적으로 드래곤을 두려워하는 존재다. 카스카디아를 언제든지 짓밟을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지금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며 두려움을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을 터였다.

“형… 형님, 저 죽… 죽는 거 아니죠?”

“죽기는 왜 죽어. 잠시 얼얼한 것뿐이야. 막 경련 일어나고 그러지는 않지?”

“겨… 경련이요? 이… 이렇게 마… 말입니까?”

이제 혀까지 마비되어 가는 달수가 불안한 듯 나를 찾았다. 그렇게 징징거리면서도 믿을 건 나뿐인 모양이었다. 외눈거미 독이라는 게 사실 그리 대단할 게 없었다. 내 경험상 손발이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한두 시간이면 증상이 없어졌다. 물론 경련이 일어난다면 더 길어질 테지만.

울상인 된 채 나를 바라보는 달수의 얼굴 근육이 욱실거렸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다리가 사정없이 덜덜거렸다. 분명한 경련이었다.

“어? 이러면 오래 가는데……. 너 진짜 똑바로 안 할래?”

“……!”

그 덕에 드베르그 녀석만 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드래곤의 날개를 뽑아 튀겨먹었다는 그 전설의 마왕이 침을 튀겨가며 화를 내는 모습을 면전에서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자갈지대가 눈앞에 펼쳐졌다. 카스카디아의 고봉에 더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헉헉!”

헐떡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힘으로는 아니악 광산에서 그 누구도 덤빌 수 없다는 드베르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맞닥뜨린 몬스터들을 거의 혼자서 상대한 탓도 있겠지만, 꼼짝없이 굳어 버린 달수와 샤이언을 양쪽 어깨에 둘러메고 걸어야 했기에 쉬이 지칠 수밖에 없었다.

“빨리 좀 가자.”

“유진 님, 좀 쉬었다가 가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 아니, 드워프가 나이 들었다고 운동을 게을리하면 안 되는 거야. 명색이 아니악의 주인이라는 녀석이 그 둘을 메고 오지 못해서 낑낑대는 게 말이 되냐?”

“저 그냥 그렌델이라도 한 마리 잡아서 둘러메고 가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웬만해서는 내게 감히 이런 말을 꺼내지 못했을 드베르그였지만, 힘들기는 무지 힘든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땅딸막하고 목도 짧은 드워프가 숨을 헐떡대자 여간 불쌍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힘 좋은 그렌델이라도 한 마리 잡으면 금방 해결될 일이었다.

“그래? 그럼 잡아 오든가.”

“제… 제가요? 제 말을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당연히 유진님께서 나서주셔야…….”

아니악의 왕인 드베르그가 고작 그렌델 한 마리 제압할 능력이 없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열 마리라도 잡아 죽일 수 있을 테지만, 녀석들을 압도적인 마력으로 굴복시키는 건 다른 문제다.

아예 전의를 상실하게 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마물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야 했다. 예전의 마왕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내심 내 마력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도 있을 터. 드워프치고는 꽤 머리를 굴린 셈이었다.

“이제 막 나를 부려먹으려고 그러네.”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배고프다. 밥 먹자.”

“예……? 식사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스읍!”

“아…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점심을 먹은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서둘러 화제도 바꿀 겸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

‘어째서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거지? 그렌델 정도야 쳐다보기만 해도 벌벌 떨 텐데…….’

드베르그가 슬쩍 다시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마왕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쯤 시끄럽게 징징거렸다며 자신을 흠씬 패주었든가, 아니면 이미 온몸이 엉망이 된 그렌델이 팽달수와 샤이언을 메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마왕이 그새 착해지기라도 한 건가.

“뭘 그렇게 쳐다보냐?”

“오늘따라 잘 생겨 보이셔서요. 헤헤.”

“실없는 소리는. 얼른 뭐라도 잡아와봐. 뱃가죽이 등에 붙겠어.”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드베르그가 언제 이렇게 마왕 유진과 말을 많이 나누어본 적이 있던가. 카스카디아도 동네 똥개 취급하는 마왕에게 드워프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유진의 모습이 더 낯설 수밖에 없었다. 마치 친한 친구를 대하듯,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못 했을 드베르그의 농담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상해. 이 정도로 배가 고프다면 직접 잡아서 바로 구워 버리면 될 거 아니야? 설마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게다가 드베르그가 아는 마왕 유진은 그렇게 인내심이 많은 존재가 아니었다. 배고프면 일단 드래곤의 날개라도 뜯어서 튀기고 봐야 하는 존재가 바로 마왕이었다.

그런 그가 배고픔을 참고 있었다. 직접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서인지는 몰라도 예전 같으면 절대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인 것만은 확실했다.

드베르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유진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지금 유진의 모습은 그가 알던 마왕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유진 님. 직접 손질하시겠습니까?”

“아니. 요리는 내가 할 테니까 내장 제거하고 가죽만 벗겨서 나한테 줘. 요즘 영 손에 힘이 없어서 말이야.”

잠시 뒤. 붉은목쥐 두 마리를 사냥해 온 드베르그는 일부러 유진에게 그것들을 내밀었다.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는 것부터가 예전과는 달랐다. 사냥감 손질이나 하라며 붉은목쥐를 내미는 것을 용납했을 마왕이 아니다.

‘손에 힘이 없다고? 마왕이? 음…….’

무엇보다도 마지막 말이 드베르그의 의심에 불을 지폈다. 마력이 철철 넘치는 마왕이 손에 힘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붉은목쥐 고기를 다시 넘겨받아 손질하는 동안 드베르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상대는 마왕. 자칫 잘못 판단했다가는 당장 목이 달아날 수 있었다. 아니악의 드워프들을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존재. 판단은 신중해야 했다.

“소금으로 밑간을 좀 하고 달짝지근하게 코티노스도 좀 바르고 초피가루로 매콤한 맛도 내면…….”

손질을 깔끔하게 끝낸 붉은목쥐를 받아 든 유진이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요리를 시작했다. 그를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드베르그.

‘어딘가 이상이 있는 게 틀림없어. 한 번 슬쩍 떠보자.’

그가 위험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감히 마왕 유진을 떠보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어이, 달수. 괜찮나?”

“으… 으게 그… 그앤츠안아 브이냐?”

그 전에 먼저 다른 인간들부터 건드려 보는 드베르그. 팽달수는 이게 괜찮아 보이냐며 드베르그에게 반문했다.

“샤이언 너는?”

“으… 읍 득츠.”

샤이언은 입 닥치라며 모욕을 안겨 주었다.

‘이런 조무래기들한테까지 멸시를 받아야 하다니! 두고 보자.’

드베르그는 그러나 자존심을 굽히며 화를 삼켰다. 이들은 저 마왕의 수하들. 마왕의 상태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들을 자극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유진님이 어디 많이 불편하신가 봐?”

“으… 으프지. 그긋드 마이.”

“아파? 정말? 어디가 아픈데?”

드디어 원하던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팽달수의 입을 통해 마왕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순간 드베르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므… 므리. 브… 븐믕히 므츤 그야. 즈 그… 그애믈 흥님 스끼 내가 은즌가는 므… 므츨 줄 으릇어. 므츠지 으… 은크스야 으른 그애고생을 스키긋냐고!”

대충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개고생을 시키겠냐는 말로 들렸지만, 확실치가 않았다. 아무튼 원하던 대답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뭐라는 거야? 안 되겠어.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겠군.’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한창 요리 중인 마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드베르그. 그가 할디르를 움켜쥐었다. 직접 할디르를 휘둘러 마왕의 상태를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다. 일이 틀어질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너 자꾸 꼼지락거리면 모가지 꺾어 버린다?”

그때 누군가 드베르그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뇌까렸다. 할디르를 치켜세우고 조심스럽게 마왕에게로 접근하던 드베르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척추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분명 마왕의 목소리였다.

‘뭐야? 눈치챈 건가?’

유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반신반의하며 눈알을 굴리는 드베르그. 어찌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는 빛이 역력했다.

“오늘따라 다리가 튼실해 보이네.”

‘설… 설마 내 다리? 헉!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어대는 잡식성인 줄은 진즉 알았지만, 드워프까지 잡아먹는다고? 에이, 아니겠지.’

드베르그가 순간 제 다리를 매만졌다. 낮게 깔린 상대의 목소리가 순간 드베르그의 두 다리를 훑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보통 배고픈 게 아니거든. 지금 보니까 가슴살도 두툼해 보이고. 쫄깃쫄깃한 심장을 꺼내서 조물조물…….”

‘헉!’

드베르그는 서둘러 제 가슴을 모로 감추어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지켜내겠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쿵!

결국 들고 있던 할디르를 떨어뜨리고 마는 드베르그. 이제 용서를 구하고 목숨을 구걸할 일만이 남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드베르그는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살려 달라는 말 한마디만을 남긴 채 황급히 유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보는 유진의 표정이 묘했다.

“야! 너 어디 가? 쟤 왜 저래? 아, 매운 거 못 먹나? 초피가루는 조그만 바를걸 그랬나?”

드베르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유진. 뒤돌아선 그의 손에는 초피가루를 잔뜩 바른 쫄깃쫄깃한 붉은목쥐 심장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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