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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 마왕족발-129화 (130/204)

<제129화>

드베르그는 과거를 회상했다. 유진과의 인연은 짧지만 강렬했다. 레드 드래곤 카스카디아의 날개를 뜯어 튀겨 먹는 그의 모습은 실로 엽기적이었다. 그날 현장에 있었던 드베르그는 그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물론 덕분에 한동안 반송장이 된 카스카디아의 수발을 들어야 했지만.

“저… 그러니까…….”

“스읍! 눈 안 깔아? 어디 난쟁이 똥자루 새끼들이 감히…….”

유진을 알아본 드베르그는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드래곤을 무슨 고추잠자리 잡듯 가지고 노는 인간이었다. 이런 인간과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언제 튀김옷을 입을지 몰랐다.

“달수야, 그만해라. 듣는 난쟁이 똥자루 기분 나쁘겠다.”

“형님, 이것들 때문에 아까 마음 졸인 것만 생각하면 진짜 이 망치로 뒤통수를 다 갈려 줄……! 헉! 더럽게 무겁네.”

“그거 아무나 드는 거 아니야. 아까 말했잖니? 얘들이 무식해도 힘은 장사라고.”

게다가 오늘은 유진 혼자가 아니었다. 생긴 것으로는 유진보다 백 배는 더 독해 보이는 놈이 함께 있었다. 바로 궁극의 노안의 자랑하는 팽달수였다.

“저…….”

“어떤 놈이 아직도 주둥이를 나불거려!”

팽달수는 마치 제가 마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세등등했다. 드워프를 도발하는 유진을 미친 형님 새끼라며 뜯어 말리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됐어, 적당히 해. 드베르그, 왜? 이 하찮은 인간 새끼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하… 하찮다니요? 감히 유진 님을 누가 하찮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끔 만든 너희들이 괘씸한 거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드베르그는 유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유진의 말이 곧 법이고 진리라는 것. 그렇게 믿고 행동해야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마왕님이라는 사실을 함구하라고 하시는 건지……?”

“형님, 이놈 눈깔 보세요. 어떻게 해서든 약점 잡으려고 그 돌아가지도 않는 맷돌 굴리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저는 그저 상세히 그 이유를 알아야 실수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여쭤본 겁니다.”

그런데 정말 물어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 하나 있었다. 유진이 다른 인간들에게 그가 예전에 마왕으로 불렸었다는 사실을 함구하라고 한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아들이 마왕이면 넌 어쩔 건데?”

“그야 당연히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드워프의 명예를 걸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죽이려고 달려들겠죠.”

“그럼 쟤들은? 그렇지 않아도 케아스 제국이라면 치를 떠는 놈들인데 내가 마왕인 걸 알면 가만히 두겠니? 귀찮게 굴겠지.”

“그냥 죽여 버리시면 될 것 아닙니까?”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잘 알면서.”

“…….”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드베르그는 섣불리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마왕의 저 말. 양심이 드베르그를 침묵하게 했다. 명백한 의미가 담긴 침묵이었다.

“형님, 얘 전혀 모르는 눈빛인데요?”

“알아, 몰라?”

“아… 압니다! 절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거 알고말고요!”

살아 있어야 양심도 챙길 수 있을 터. 드베르그는 유진의 질문에 전혀 망설임 없이 양심을 버렸다.

“그런데 걔는 어디 있냐?”

“걔라면 카스카디아 님 말씀입니까?”

“그래. 솔직히 내가 너희들이랑 말 섞을 군번은 아니잖아. 내 친구 카스카디아 정도라면 모를까.”

“카스카디아 님이 어디 어떻게 계신 줄은 저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직도 그러고 있어? 날개 한쪽 뽑혔다고 아직까지 골골거리기는.”

사실 유진이 카스카디아를 반송장으로 만든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날개 한쪽과 함께 눈과 혀가 뽑히고 손발 뼈가 다 뭉개졌으니 아무리 치유 능력이 뛰어난 드래곤이라고 해도 회복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터였다.

“골골거릴 만하죠. 날개 한쪽 뽑히면 많이 아픈 거 아닙니까, 형님?”

“나야 모르지. 안 뽑혀봐서.”

“친구라면서 너무 남 일처럼 얘기하시네요. 그런데 친구분은 어쩌다가 그리되신 건데요? 누구랑 대판 싸우셨나?”

카스카디아가 사람 이름인 줄 착각한 모양인지 팽달수는 드워프보다도 더 멍청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내가 뽑았지.”

“예? 친구라면서요? 친구 날개를 왜 뽑았는데요?”

“내가 전에 얘기 안 했나? 하도 말 안 들어서 손발을 으깨고 혀랑 눈을 뽑아 버렸다고. 그때 날개도 덤으로 뽑았을걸? 날개를 어쨌더라? 튀겨 먹었던 거 같은데…….”

“친구 맞습니까?”

“친구가 뭐 별건가. 오래 봤으면 다 친구지. 안 그래, 드베르그?”

이게 바로 마왕 유진의 친구 사귀는 법인 모양이었다. 그와 눈동자가 마주치고만 망치왕 드베르그는 자신도 모르게 찔끔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

다음날,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일단 뫼니스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기존에 목책으로 둘러두었던 것보다 배는 커 보이는 땅에 성을 쌓아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드베르그,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

“마왕 새끼가 하라잖아!”

“그냥 확 들이받으면 안 돼?”

투렘은 죽을 맛이었다. 비록 왕위를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그 또한 고귀한 혈통이었다. 고작 인간 따위를 위해 돌덩이나 나를 신분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들이받았다가 다 죽고 싶어? 그놈이 어떤 놈인지 진짜 몰라서 그래?”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우리 드워프들이 저런 하찮은 인간들 살 집까지 지어줘야 하다니…….”

“그놈은 인간이 아니야. 드래곤보다 더 지독한 악마라고. 얼른 일이나 해.”

그러나 마왕이 시킨 일이었다. 마왕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반병신이 된 드래곤이 저 카스카디아 깊숙한 곳에서 골골거리고 있었다. 하물며 드워프가 반기를 듣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보면 몰라? 드워프들이 우리를 위해 성을 지어주고 있잖아.”

“그러니까 드워프들이 왜 이러는 거냐고??”

“소문 못 들었어? 아, 글쎄 유진 주방장님하고 그 드베르그인지 뭔지 하는 드워프 왕하고 친구라잖아.”

그때 어디에선가 인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워프들이 달려들어 성을 쌓는 모습을 구경하러 나온 이들로 보였다.

“그게 말이 돼? 인간이 어떻게 드워프 왕하고 친구라는 거야?”

“아, 이 답답한 사람을 봤나. 주방장님이 어디 보통 분이야?”

“그거야 그렇지만…….”

“저런 분이 어찌 알고 이 뫼니스까지 오셨을까?”

“그게 다 신의 뜻이지. 카렌 신께서 우리를 보살펴주고 계신 거라고.”

뫼니스에서 유진은 전혀 마왕답지 않았다. 마왕이 아니라 오히려 빛의 신 카렌에 가까웠다. 드베르그는 유진의 속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마침 저기 지나가시네. 저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지 않나?”

“아, 대공녀님? 그러고 보니까 요즘 유독 붙어 다니시네. 정말 혼인이라도 하시려나?”

“대공녀님은 좋겠다. 저런 영웅의 마음을 사로잡다니!”

인간들의 대화를 엿듣던 드베르그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마왕 유진이 있었다. 아리따운 금발의 암컷 인간과 함께.

“들었어?”

“응. 놀랍군. 저 마왕 새끼가 여기서 인간들하고 노닥거리는 이유가 겨우 여자 때문이라니.”

인간들이 지나가고. 드베르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서렸다.

“아무튼 마왕한테도 약점이 있다는 거 아니야. 이제 어쩔 건데?”

“어쩌기는. 우리도 그 약점을 파고들어야지.”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마왕에게 여자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바였다. 드베르그는 마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찾은 듯 만족감에 젖어 들었다.

***

잠시 뒤.

“고마워.”

“뭐? 잘 안 들려. 크게 말해 봐.”

“고맙다고!”

“너 뭐 잘못 먹었어? 샤이언 네가 형님한테 그런 말을 다 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떴나?”

그동안 유진과 샤이언 사이에는 좀처럼 따뜻한 말이 오가지 않았다. 유진 덕에 황금빛의 서임으로 불리는 마력을 얻었을 때에도 샤이언은 유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모든 것은 카렌 신의 의지일 뿐 유진에게 고마워할 이유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그토록 유진을 탐탁지 않게 보던 샤이언이 고맙다는 말을 한 것이었다.

“네 덕에 이제 나도 그렇고 모두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어. 마땅히 고맙다는 말을 들을 만해.”

“편해?”

“그럼. 이제 저 드워프들 무서워서 벌벌 떨 것도 없고 성까지 생기게 되었으니 몬스터들도 얼씬 거리지 못할 거라고.”

“푹 쉬어둬라. 그 편한 것도 잠시니까.”

그러나 역시 유진은 마왕이었다. 샤이언이 편할 꼴을 봐줄 수 없다는 듯 이내 뜻 모를 경고를 했다. 뭔가 꾸미고 있는 것이 있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곧 알게 될 거야.”

“왜 그러십니까? 사람 불안하게.”

“그건 그렇고 왜 안 와?”

“누구 부르셨어요?”

팽달수까지 가세해 자초지종을 캐묻자 서둘러 화제를 바꾸는 유진. 누구를 이리 부른 모양이었다.

“응, 드베르그. 검이나 하나씩 만들어달라고 하려고.”

“검? 드워프의 검 말이야?”

“그래. 드베르그 걔가 그래도 손재주는 있는 편이거든.”

“그… 그게 정말이야? 드워프가 내 검을 제작해 준다고?”

“고작 칼 한 자루 가지고 호들갑은. 그동안 고생도 했고 좋은 검 한 자루씩은 있어야 어디 가서 칼 자랑이라도 하지.”

드베르그를 부른 것이었다. 셋이 사용할 검을 제작해 달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하려는 눈치였다.

샤이언은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드워프가 만든 검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명검이었다. 방랑시인들의 영웅시에 등장하는 전설 속 용사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명검을 자신도 갖게 된다는 사실에 한껏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정말 만들어 줄까?”

“성도 쌓는데 그깟 검 정도야……. 아, 저기 오네.”

“부르셨습니까, 유진 님?”

“부른 지가 언제인데 왜 이제 와?”

“죄… 죄송합니다. 축성 현장 지휘 때문에…….”

내심 드워프들이 검 제작을 거부하면 어찌할지 걱정하는 샤이언. 그러나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왕의 부탁을 거부할 수 있는 드워프들이 아니었다.

“다른 게 아니……? 그런데 얘는 뭐냐? 아드…….”

“제 하나뿐인 딸 퍼프릴입니다.”

“아… 아들이 아니고 딸이지? 그… 그럴 줄 알았어. 아빠 닯았네?”

“그러게요, 형님. …….”

“저를 닮아서 이렇게 시선을 끌 정도로 제법 봐줄 만합니다.”

“…….”

그런데 감히 늦게 모습을 드러낸 드베르그의 옆에는 부르지도 않은 드워프 한 마리가 더 있었다. 아버지보다도 더 단단하고 우락부락한 아들이라며 칭찬을 하려던 유진이 서둘러 말을 삼켰다.

드베르그는 어머어마한 딸 바보가 틀림없었다. 유진과 팽달수, 게다가 샤이언까지 모두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드베르그는 그들의 시선을 달리 해석했다.

“잘 부탁 드려요. 킁!”

“저 콧바람 소리가 매력인 아이죠. 아비인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좀 민망합니다만, 사내 녀석들이 떼로 따라다닐 정도로 아니악 제일의 미녀입니다. 앞으로 유진 님 수발을 들 겁니다.”

“…….”

게다가 저 묘한 콧소리까지. 마치 심보 고약한 노인네가 코를 푸는 듯 들렸다. 그게 매력이라니……. 아무리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쁜 법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해 보였다.

“풋! 우리 형님은 복도 많으시지. 안나에다가 미스 드워프까지. 전생에 아주 우주를 구하셨나 봅니다.”

앞으로 이 아빠를 쏙 빼닮은 드베르그의 딸이 유진의 수발을 들 것이라는 말에 팽달수는 놀릴 거리를 찾았다는 듯 히죽거렸다.

“야, 드베르그. 너 그 망치 좀 잠깐 줘 봐.”

“예……? 제 할디르는 왜……?”

“얘 당장 데리고 가. 그 대갈통 으깨 버리기 전에.”

“아니,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걸 진짜 몰라서 물어!”

이내 속마음을 드러내는 유진. 그러나 드베르그는 그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 백발의 암컷 인간보다는 제 딸이 예뻐 보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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