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128화 (129/204)

<제128화>

저 거침없는 어투와 행동. 안나를 탓할 일이 아니다. 하필 안나가 머리에 꽃을 꽂은 날 찾아온 드베르그의 잘못이었다.

“쟤는 또 왜 저러는 거냐? 상태가 더 심해진 것 같은데?”

이제 눈빛마저 섬뜩해 보일 정도였다. 자꾸 엮여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새삼 뇌리를 스쳤다.

“샤이언, 쟤를 여기 왜 데리고 왔어?”

“내가 데리고 왔겠니?”

“하긴. 휴! 하여간 너랑 나는 여기서 꼼짝없이 죽을 팔자인가 보다. 이 대책 없는 형님 새끼에다가 쟤까지 저러니…….”

요즘 달수 녀석과 샤이언은 부쩍 가까워졌다. 동병상련이라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다른 사람 손에 이끌려 다닐 안나가 아니었다. 본인 의지로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의미였다. 저 숱한 드워프들이 노려보는 가운데서도 이렇게 용기를 내 달려와 드베르그를 도발하는 그 이유가 내가 아니기를 빌 뿐이었다.

쿵!

“이 인간들이 감히 이 몸이 누구인 줄 알고……! 내가 바로 아니악의 지배자 망치왕 드베르…….”

드베르그가 거대한 망치로 재차 땅바닥을 내리쳤다. 안나에게 농락당한 자존심을 다시 세어보려는 의도였다.

“못 들었어? 난쟁이 똥자루 드베르그라잖아. 누가 지었는지 그 별명 하나 잘 지었다. 망치왕이라……. 머리 나쁘다고 하도 망치로 두드려 맞아서 뒤통수가 그렇게 판판하다며?”

“이……!”

“하! 우리 형님 새끼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네. 우리는 이제 진짜 죽었다.”

그러나 드베르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녀석의 유독 평평한 머리 모양에 얽힌 역사가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드베르그는 숨기고 싶은 치부라도 들킨 듯 당황했다. 뭐라고 반박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치켜들어 나를 가리켰다. 그의 눈동자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달수와 샤이언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안나 하나로도 벅찬데 나까지 나서서 드베르그를 일부러 더 자극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터였다.

***

투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아니악의 지배자 드베르그의 사촌이었다. 드베르그와는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란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저것들이 어떻게 저걸 알고 있는 거지?”

“뭐? 왜 망치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말이야?”

“그래. 망치로 하도 두드려 맞아서 머리통이 판판해진 걸 저놈들이 어떻게 아는 거냐고?”

드베르그와 가까운 다른 드워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비밀을 인간이 알고 있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해.”

“아니, 이상하잖아. 저것들이 그걸 알 리가 없는데…….”

“그만하라니까!”

“……!”

인간 따위가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죄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베르그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마치 발가벗겨진 채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놀림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저놈들 대갈통을 모조리 이 할디르로 으깨주겠어. 욤버그, 당장 가서 저것들을 다 이리 끌고 와라.”

“예, 아버지. 가자!”

“뀌뀌.”

좌중을 침묵하게 한 후 드베르그는 곧바로 아들 욤버그에게 저 오만한 인간들을 자신 앞으로 끌고 오라고 명했다. 이미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어깨에 둘러멘 망치왕의 상징 할디르로 녀석들의 머리를 으깨 버릴 생각뿐이었다.

욤버그를 태운 철갑피그가 잰걸음으로 달려나갔다. 뒤뚱거리는 모습이 마치 오리 궁둥이 같았지만, 의외로 철갑피그는 인간들이 탄 말만큼이나 빨랐다.

“이 오만한 인간들! 당장 말에서 내려서 고개를 숙이지 못해? 어디서 감히 인간 따위가 우리 드워프족을 내려다 봐!”

욤버그는 인간들에게 다가가자마자 고함부터 쳤다. 기를 눌러 버리려는 의도였다. 대개 보통의 인간들은 고함만 듣고도 벌벌 기었다.

“말에서 내려도 내려다보일 것 같은데? 그게 싫으면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쑥쑥 커서 다시 오든가.”

“형님, 제발 이제 그만하세요. 쟤 도끼 든 거 안 보이십니까? 제 키보다 더 큰 도끼라고요.”

“하여간 무식한 놈들이 힘은 또 우라지게 세요.”

“좀 그만하시라니까요!”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간은 드워프를 두려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옆에서 아무리 말려도 들은 체 만 체였다. 아예 드워프를 깔보는 눈빛이었다.

“걱정하지 마. 친한 애들이니까.”

“누구요? 저 드워프들하고요?”

“응.”

“진짜로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하도 오랜만에 봐서 얼굴이 가물가물한가 봐.”

“친한데 얼굴이 왜 가물가물해요? 그럼 안 친한 거지.”

“그런가? 듣고 보니까 섭섭하네.”

게다가 친한 척까지 했다. 욤버그는 아니악의 주인 드베르그의 아들이었다. 고귀한 드워프 왕족의 순수 혈통이라는 의미였다. 인간 따위와 친할 이유도, 가능성도 없었다.

“진짜 형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형님도 머리에 꽃 꽂으셨어요?”

“내가 안나냐?”

“상태만 봐서는 둘이 아주 천생연분인데요, 뭘.”

“너 자꾸 끔찍한 소리 하다가 끔찍하게 죽는다.”

“지금 누가 진짜 더 끔찍한 소리하고 있는 줄 모르세요? 저도 좀 살자고요!”

“죽여달라고 아주 애원하는구나. 오냐, 그 모가지는 내가 직접 잘라주마!”

욤버그는 코웃음을 쳤다. 역시 인간다웠다. 금세 죽을 줄도 모르고 혀를 놀려대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그것도 얼토당토않은 거짓말까지 지어내 가면서.

“형님, 어떻게 좀 해봐요! 친하시다면서요!”

“이상하네. 진짜 까먹었나? 어이, 욤버그! 네 이름 욤버그 맞지?”

“어? 네 녀석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인간이 욤버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미 인간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그의 아버지 드베르그라면 모를까 욤버그의 이름까지 아는 인간이 흔할 리 없었다.

“나 못 알아보겠어? 진짜 섭섭하려고 그러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잖아!”

“아니까 아는 거지. 그런데 이것들이 아까부터 왜 자꾸 소리 지르고 지랄이야!”

“……? 진… 진짜 날 알아? 너 인간이잖아?”

“인간이지. 널 아주 잘 아는 인간. ‘잘’까지는 아니구나. ‘조금’ 아는 인간.”

“그러니까 네가 뭔데 날 조금 아는 거냐고?”

욤버그는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집착했다. 사실 이름 말고 다른 것들까지 알고 있을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드베르그가 망치왕이라는 별명이 어찌 붙게 되었는지를 숨기고 싶었듯 욤버그도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었다.

“너 똥꼬 두 개지?”

“……!”

그때 인간의 입에서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세상에 항문이 두 개인 존재가 있을 리 없었다. 마물들조차 그런 기이한 신체 구조를 가진 녀석은 없었다.

“형님, 그게 말이 됩니까? 아무리 저렇게 생겼어도 똥구멍이 두 개일 리가……? 뭐야? 왜 갑자기 조용해져? 설… 설마 진짜 두 개야? 대박!”

당연히 그냥 시답잖은,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저급한 음해라며 무시해 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욤버그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인간의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심장이 멎어 버린 듯 얼어붙었다.

“아니야! 그냥 똥꼬 옆에 상처가 난 것뿐이라고!”

“그게 그거지, 뭘. 옛날에 바게스트한테 까불다가 물린 자국이잖아.”

“그… 그걸 네놈이 어떻게! 네놈 정체가 도대체 뭐야?”

사실이었다. 욤버그는 항문 바로 옆에 아직도 채 아물지 않은 깊은 상처가 있었다. 지금도 상처를 입은 그날과 마찬가지로 비가 오기라도 하면 썩은 고름이 피똥처럼 흘러내렸다.

욤버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드워프도 아니고 인간이라면 절대 알 수 없는 비밀이었다.

“오우씨! 역시 백구 녀석 가리는 게 없다니까. 형님, 어떻게 그런 데를 물 수 있습니까? 더럽게. 일부러 그러라고 시키신 거예요?”

“뭐! 더… 더러워? 내 엉덩이가 더럽다는 거야!”

“아…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멀뚱히 서 있던 다른 인간마저 이제 욤버그를 깔보기 시작했다. 욤버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나를 못 알아본다고? 아, 이 돌대가리 드워프들 진짜.”

“어떻게 내 치부를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만, 너는 오늘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내 입으로 꼭 이렇게 자기소개를 해야 하나? 아이, 쑥스럽게. 나 유진이야. 너 똥꼬 두 개 되던 날 백구, 아니 바게스트랑 같이 있던 유진.”

욤버그의 은밀한 비밀을 폭로한 그 인간 녀석이 결국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유진. 실로 인간답지 않은 이름이었다.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공교로웠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치를 떨 마왕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진인지 뭔지를 내가 어떻게 알……! 뭐? 유… 유진? 유… 유진이라면……! 헉!”

그런데 욤버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인간의 자기소개를 들은 그가 순간 인간의 얼굴 여기저기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내 경악한 표정을 지은 채 굳어 버렸다. 마치 진짜 마왕이라도 본 것처럼.

“이제 좀 생각이 나나 보네. 내가 지금 사정이 있어서……? 응? 쟤 또 어디 가? 야! 하던 말은 다 듣고 가야 할 거 아니야!”

“뀌뀌!”

얼어붙어 있던 욤버그는 재빨리 철갑피그의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꽁무니를 빼는 철갑피그의 돌돌 말린 꼬리가 뒤뚱거리는 엉덩이만큼이나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낑낑거리는 그 표정이 마치 잔뜩 겁에 질린 채 도망치려는 주인 욤버그의 그것과 같아 보였다.

***

“뭐야? 욤버그가 그냥 돌아오는데?”

투렘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달려나갔던 욤버그가 별 소득도 없이 돌아오고 있었다.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허겁지겁 내달리는 모습이 자신감 넘치는 평소와 너무나도 달라 보였다.

“저런 머저리 같은! 이 망치왕 드베르그의 아들이 고작 인간이 무서워 도망쳐 오다니!”

드베르그도 곧바로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이보다 더한 치욕이 있을 수 없었다. 욤버그는 그의 뒤를 이어 아니악의 주인이 되어야 할 몸. 그런 그가 인간이 무서워 도망치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쿵!

퍽!

“아우! 미쳤어? 왜 어린애 머리를 때리고 그래? 그것도 할디르로. 하나뿐인 아들을 정말로 죽일 셈이야?”

“그럼 이 치욕을 당하고도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인간 따위가 무서워 뒷걸음질 치는 아들이라면 없는 게 나아!”

돌아오자마자 허겁지겁 드베르그를 찾는 욤버그.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드베르그는 자신을 부르는 아들의 머리통을 제 몸통만 한 망치인 할디르로 찧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투렘. 그러나 이미 할디르가 욤버그의 정수리에 내리꽂힌 뒤였다.

“아… 아버지, 그…….”

“욤버그! 너 괜찮니?”

“그러니까 저 인간 놈이 그…….”

다행히 욤버그는 아직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꾸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분명 저기 저 인간에 관한 이야기 같았다.

“뭐야? 망치에 맞았는데도 괜찮네? 역시 피는 못 속인다니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나!”

“네놈 목을 으깨 이 치욕을 씻겠다! 네 이놈!”

“아… 아버지, 안 됩니다!”

그새 드베르그 코앞까지 다가온 인간이 다시 한번 그를 자극했다. 그러자마자 곧바로 할디르를 치켜세우는 드베르그. 욤버그가 서둘러 아버지를 막아세웠다.

“저리 비키지 못해! 고작 인간 따위를 겁내는 네놈은 이제 내 아들이 아니다!”

“아… 아니요. 저놈은 인간이 아니라고요!”

“인간이 아니라고?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변명이냐?”

“인… 인간이 아닌 그 인간이요!”

“인간이 아닌 인간이라니?”

욤버그가 이상했다. 하긴 그 육중한 할디르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는데 이상 증세를 보이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어쨌든 드베르그는 욤버그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이, 드베르그. 오랜만이야. 무지 서운한데? 내 얼굴도 못 알아보고.”

“네놈이 뭔데 감히 이 망치왕님에게……? 어? 네 녀석 왠지 낯이 익은데?”

“당연히 익어야지. 네 그 뒤통수를 두르려 준 게 나인데.”

그러나 드베르그는 곧 욤버그의 말 같지 않은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눈앞에 정말 인간이 아는 ‘그 인간’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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