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카디즈 강을 건너겠다는 말에 드비어스 자작의 수하가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전쟁을 벌이겠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카디즈 강을 건너시겠다니요?”
“말 그대로네. 카디즈를 건너 저 역적들을 처단하겠다는 거지.”
“은둔자들과 전쟁을 벌이시겠다는 겁니까?”
드비어스 자작은 뻔뻔하게도 역적들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적어도 케아스 제국에 조국을 팔아먹은 그가 지껄일 만한 말은 아니었다.
“나라를 등지고 국왕을 배신한 자들이야. 자네는 그런 자들을 은둔자라고 부르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자작님. 하지만 정녕 저들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저들 대부분은 왕실 근위 기병 출신입니다. 우리 같은 소규모 영지군이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수하가 놀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전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드비어스 자작이 무슨 이유로 은둔자들을 공격하려는 것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전혀 가망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은둔자들 대부분은 알렉세이 소렐이 소피아를 떠나올 때 그를 따라온 왕실 근위 기병들이었다. 소렐 왕국의 최정예라고 봐도 무방했다.
반면 카이언 백작령에 있는 병력이라고 해봤자 기사 몇몇을 제외하고는 영지 내에서 차출한 농꾼들이 전부였다.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살육이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
“그만큼 성공만 한다면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 황실과 조정에서 직접 나서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리해야 해.”
분명 드비어스 자작에게 작위를 수여한 것은 소렐의 현 국왕 드미트리어스였지만, 드비어스의 마음은 소렐의 수도 소피아가 아니라 케아스 제국 쪽에 가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우리 병력만으로는 무리입니다.”
“나약하군. 왜 싸워보지도 않고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 그리고 우리에게는 친구들이 있지 않나?”
“마물들을 이용하자는 말씀입니까?”
“못할 것도 없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마물을 이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드비어스의 모습은 분명 악신 이블리스를 신봉하는 케아스 제국민의 그것과 같았다.
***
다음날. 어떤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지 모르는 뫼니스는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목책 주위로 여전히 우두머리를 잃은 오크들이 서성거렸지만, 하나같이 유진과 팽달수의 손에 목이 잘려나갔다.
“용사, 용사, 용사!”
빠바박!
“으…….”
반면 샤이언은 오크들을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 얼얼한 뒤통수를 매만지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안나는 샤이언이 째려보든 말든 유진 앞에서 더 깐족거렸다.
“나도 나지만, 네 인생도 참……. 형님, 이제 그만 하시죠? 얘 눈깔 튀어나오겠습니다.”
“그걸 왜 나보고 그만하래? 쟤를 설득해야지.”
보다 못한 팽달수가 유진을 말려보았지만, 애초에 유진을 말리는 게 먼저가 아니었다. 대공녀라는 신분이 무색하게 밉살맞고 짓궂게 유진을 놀려대는 안나부터 어찌해야 했다.
“저 어린 애랑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어요?”
“내 말이! 저 어린 게 나를 끝까지 가지고 놀려고 하잖아.”
“아니, 형님도 참. 그놈의 용사 소리 좀 들으면 또 어떻다고…….”
빡!
“아,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형님, 이럴 게 아니라 알렉세이랑 담판을 짓고 오세요.”
안나에게 다가갔다가 괜히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봐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하는 팽달수는 계속 유진만 붙들고 사정했다. 오죽 샤이언이 불쌍해 보였으면 저럴까.
그러다 본의 아니게 또 ‘용사’ 소리를 꺼내고 만 팽달수. 그 덕에 샤이언은 또 뒤통수를 부여잡아야 했다.
“벌써 다녀왔어.”
“뭐랍니까?”
“쟤가 아직도 저러고 있는 거 보면 몰라?”
“역시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네요.”
“나도 나중에 저런 자식 낳을까 봐 걱정이다.”
부모도 포기할 정도인데 더 할 말이 뭐가 있을까. 유진도 이제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전직 마왕답게 여자이든 애든 상관없이 쥐어박으려고도 해봤지만, 그래도 알렉세이 딸인데 그럴 수도 없고 보통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저렇게 놔둬도 될까요? 우두머리가 없다고 해도 오크도 엄연히 몬스터인데 저러다가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샤이언이 알아서 하겠지. 내가 쟤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해?”
“이래저래 샤이언만 죽어나네요.”
“팔자가 드센 거지.”
안나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유진 앞에서 그놈의 ‘용사’ 소리를 쉬지 않고 해가며 혀를 날름거리다가도 금세 겁도 없이 오크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그 뒤치다꺼리는 당연히 샤이언의 몫. 여러모로 샤이언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진! 훈련은 잘 되어가나?”
“마침 잘 왔네. 쟤 좀 어떻게 하지? 저러다 죽어도 상관없어? 나중에 내 탓 하지 마라?”
때마침 렉스가 유진 일행을 찾아왔다. 아직도 목책 주위를 맴돌고 있는 오크 잔당들 처리 상황을 살피러 온 터. 물론 대공녀 안나가 어찌 지내는지도 확인하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 대공녀님 좀 예쁘게 봐 줘. 자네가 오죽 좋으면 저러시겠나? 그리고 여기 황금빛의 서임을 받은 용사들이 셋이나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 용사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렉스는 진짜 걱정 하나 없는 표정이었다. 그 찾기 힘들다는 용사가 이 자리에 셋이나 있었다. 카렌 신의 선택을 받은 신장(神將)들이 셋씩이나 안나를 에워싸고 있는데 걱정할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무서울 것 없다는 용사들이 안나에게 나가떨어질까 봐 그게 걱정일 뿐.
“참고로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빠. 괜히 형님과 안나, 두 사람 기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고.”
이미 두 사람은 두 손, 두 발을 다 든 것처럼 보였다. 유진은 그 불편한 심기를 고함으로 표현했고, 팽달수는 진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안나와 선을 그었다.
“기 싸움? 내가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하고 기 싸움 하는 거로 보여?”
“어쨌거나요.”
“하하하! 아무튼 이거 우리 기병대도 분발해야겠는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주위를 좀 둘러보라고. 저 많은 사람들이 왜 여기 모여 있겠나?”
안나를 유진에게 보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위였다. 렉스는 혹여 속내를 들킬까 봐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오크 때려잡는 거 구경 온 게 뭐?”
“저들이 단지 구경만 하려는 거라고 생각해? 생각보다 눈치가 없네. 아마 대공녀님하고 다 같은 마음일걸?”
목책 주변으로 숱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모두들 유진 일행이 오크들을 때려잡는 모습을 감상하던 터였다. 그들에게 용사란 희망과도 같은 존재. 유진처럼 어엿한 용사가 되어 영웅시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심부름꾼은 샤이언 하나로 충분해. 쟤도 그렇고 저 사람들도 당장 안 치우면 나 진짜 어디로 튈지 몰라.”
그러나 유진은 단호했다. 더는 혹을 달고 다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안나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 대공 전하도 어찌 못하는 대공녀님을 나보고 어쩌라고. 그건 그렇고 언제 시간 날 때 코끼리물소 우리 좀 봐 줘. 아무리 새끼라지만, 덩치가 덩치이다 보니 우리를 어느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야 할지 감이 와야 말이지. 나무 기둥을 어느 정도 높이로 해야 할까?”
“그걸 뭘 나무로 짜려고 그래? 바위로 사방을 막아 버리면 될 걸 가지고.”
“나무 베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바위는 무슨 수로 옮기고?”
“저 사람들 데려가면 되겠네. 쟤도 데리고 가고.”
“바위로 사방을 막는 게 가장 확실하기는 한데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까? 아니지, 그래도 명색이 코끼리물소인데 바위 정도는 되어야…….”
쉽사리 유진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한 렉스는 또 은근슬쩍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당장 안나를 데리고 꺼지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야! 쟤도 데리고 가라니까!”
잰걸음으로 유진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렉스의 등 뒤로 유진의 앙칼진 목소리가 따라붙었지만, 렉스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걸음을 재촉했다.
***
그날 저녁,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차에 자연스레 안나가 옆에 달라붙었다. 그녀의 입은 온종일 지칠 줄을 몰랐다.
“요리도 잘하고. 역시 용사는 다르네.”
“그래, 네 마음대로 불러라. 그런데 쪼그만 게 자꾸 아저씨한테 반말할래?”
“너도 나한테 반말하잖아?”
“네 부모는 예의범절도 안 가르치든?”
기껏해야 진주 나이 또래일 터. 삼촌뻘인 내게 반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역시 귀족다웠다. 이렇게까지 몰아세울 생각은 없었다만, 이제 이판사판이었다. 이 꼬맹이가 쉴 새 없이 재잘대는 통에 귓구멍이 다 헐 지경이었다.
“나는 이게 좋은데? 더 가깝게 느껴지고 좋잖아. 실제 가깝기도 하고.”
“떨어져 앉아라. 아무리 옆구리가 시려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하고는 안 놀아.”
“옆구리가 시려워? 그럼 이렇게 안아줄까?”
“야! 다 큰 애가 어디 남자 품에 그렇게 쉽게 안기고 그래?”
몰아세운다고 흔들릴 애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놓고 나를 희롱하려는 듯 두 팔 벌려 나를 안기까지 했다. 대공녀라는 애가 자존심도 없나.
“아까는 머리에 피도 안 말랐다며? 그리고 내가 안고 싶어서 안는데 뭔 상관인데?”
“얘가 남자 무서운 줄 모르고.”
“유진, 너 무서운 애야? 아니잖아?”
“뭐,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다만 사실 이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야.”
“나는 유진이 하나도 안 무서운데?”
그 무시무시한 마왕 유진이 나라고 내 입으로 말하기도 그렇고 아주 죽을 맛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애를 두드려 팰 수도 없고.
“하! 너 내 앞에서 그런 표정 짓지 마. 어린 게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어린 게 아주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예쁜 척을 했다. 아무리 말 안 듣는 딸이라고 해도 제 딸이 이러는 것을 모르는 척 두고 보는 것을 보면 알렉세이 녀석이 얘를 내게 일부러 보낸 것이 분명했다. 얘를 다그칠 것이 아니라 알렉세이를 주물러주는 게 훨씬 빨라 보였다.
“왜? 이런 표정 지으면 못된 거야? 그러게 왜 너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이런 표정이 나올까? 용사라서 그런가? 그리고 나 안 어려. 스물한 살이면 다 큰 거지. 안 그래? 진짜 까볼까?”
“까기는 자꾸 뭘 까! 얘 진짜 큰일 낼 애네. 야! 샤이언 어디 있어? 얘 좀 데리고 가라고, 좀!”
생긴 건 영락없는 진주 또래로밖에 안 보이는데 스물한 살이란다. 이쪽 애치고 무지 동안이네. 아니지, 아니야! 내가 지금 조카 같은 애를 앞에 두고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샤이언 이놈은 어디 갔어?
“몸 안 좋다고 일찍 들어갔는데요. 쉬라고 두세요. 뒤통수를 그렇게 많이 맞았는데 그럴 만도 하죠. 그런데 이건 뭡니까? 냄새 좋은데요?”
그래도 역시 달수 녀석뿐이었다. 녀석이 계속해서 엉겨 붙는 안나를 떼어놓으려는 듯 나와 안나 사이를 파고들며 화제를 바꿨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훼방꾼 때문일까. 안나는 입술을 빼죽 내밀어 보이더니 잠시 내 곁을 양보했다.
“도가니탕이나 해보려고. 쟤한테 하도 시달렸더니 진이 다 빠져서 보양식 좀 먹어야겠다.”
“마왕도 당해내지 못하는 말괄량이라……. 나중에 크게 되겠는데요?”
“그럼 네가 데려다가 키워보든가.”
앞날이 창창한 애를 달수에게 맡긴다는 게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을 정도로 진심이었다. 온종일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통에 겨우 회복한 쥐꼬리만 한 마력이 도로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에이. 키우기는 뭘 키워요? 이미 다 큰 거 같은데. 그리고 쟤 눈에는 오직 형님뿐인데 제가 끼어들 틈이 있겠습니까?”
“농담이라도 그런 농담하지 마라. 쟤 무서워. 어제는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덤비더니 오늘은 무슨 꽃뱀처럼 살랑거리고. 쟤 진짜 어디 아픈 애 아니야?”
“못 보셨어요? 오늘 머리에 꽃 꽂았잖아요.”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
자고로 남자는 여자를 조심해야 하는 법. 예쁘고 어리고 거기에다가 머리에 꽃까지 꽂았다면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생전 아버지의 말씀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