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123화 (124/204)

<제123화>

눈이 풀린 채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오크들 틈을 비집고 달려간 곳은 야트막한 언덕 위였다. 비록 높지는 않았지만, 뫼니스 북쪽 목책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그곳에 놈이 서 있었다.

“와, 눈깔 튀어나오겠다!”

시뻘겋게 충혈된 채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 부어 있는 눈. 오크로드가 확실했다.

[ 인간? 어떻게 우리말을 할 줄 아는 거지? ]

“뭐 그런 사연까지는 네가 알 거 없고.”

놈은 놀란 눈치였다. 인간이 마물들의 언어인 케란어를 듣고 말할 줄 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뭐 그리 대단한 재주도 아니었다. 지난 십 년 동안 때려잡은 몬스터들의 수가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그 녀석들에게 한마디씩만 배웠어도 진즉 케란어에 통달하는 게 당연했다.

[ 놀랍군. 우리말을 할 줄 아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혼자서 용케 나를 찾아내다니. ]

“용케는 아니지. 네 눈깔을 봐라. 네가 이것들 우두머리인 걸 누가 모르겠니?”

마력이 부족한 탓에 좀 허둥대기는 했어도 ‘용케’라고 말할 정도로 그리 찾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눈깔에서 핏빛 레이저를 뿜어내는 광경이 눈에 띄기 쉽지 않은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 그럼 내가 어떤 권능을 가졌는지도 잘 알겠군. 두렵지 않은가? ]

“꼴에 오크로드라고 거들먹거리기는. 내가 너 같은 허접쓰레기까지 두려워해야 하나?”

[ 허… 허접쓰레기? 그게 뭐지? ]

“뭐 그런 거 있잖아. 먹다 남은 찌끄레기 같은 거.”

[ 나약한 인간이여! 네놈이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내가, 이 유진이 오크 따위한테 나약하다는 소리를 듣는 날이 오다니. 너 나 누구인지 모르지?”

[ 오크로드인 내가 너 같은 인간 찌끄레기까지 일일이 알아야 하나? ]

“오! 그래도 오크로드랍시고 바로 받아치는 거 보게? 너 진짜 유진이라고 몰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아니냐?”

딴에는 오크로드라고 말발이 제법이었다. 받은 대로 곧잘 받아치는 모습이 역시 한 무리의 수장다웠다.

[ 유진? 무엄하구나. 감히 인간 따위가 어둠의 제왕이시며 모든 오크의 어머니이신 이블리스 신의 이명(異名)을 사용하다니! ]

미련한 오크답지 않게 마왕 유진의 명성도 들어본 눈치였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름만 들어봤다뿐이지 얼굴은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깨뿔! 나 서서 오줌 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아무리 열성인자만 긁어모았다고 해도 이 얼굴에서 너 같은 몰골이 나왔다는 게 말이 되니?”

[ 죽는 게 소원이라면 그리해 주지. 네놈 목을 가장 먼저 뽑아주마. 어차피 이곳의 인간들은 오늘 모두 죽는다. ]

“내 말 안 들려? 내가 진짜 그 유진이라니까! 아, 됐다. 너 같은 찌끄레기가 뭘 알겠니?”

모르겠다는 놈을 붙들고 자꾸 떠들어봤자 내 모양새만 이상하고 그냥 후딱 해치우는 게 상책이었다. 하긴, 이런 조무래기들이 나를 알아볼 리가 없지.

[ 이놈! 저놈의 목을 당장 뽑아라! ]

오크로드의 명이 떨어지자 주변에 있던 오크들이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몽둥이들이 쉴 새 없이 바람을 갈랐다.

빡!

이성을 잃은 채 달려들던 오크들이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대지를 울리는 엄청난 타격음이 오크로드의 마력에 지배당하고 있는 그들의 두려움을 일깨운 것이었다.

[ 오크 전사를 한 방에 물리치다니! 무기가 특별한 건가? ]

돌보다 더 단단하다는 오크 머리통이 바짝 마른 호두 으깨지듯 뭉개진 채 널브러져 있는 모습에 오크로드 녀석도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아직도 나를 하찮은 인간쯤으로 여기는지 나보다는 내가 들고 있는 무기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이거? 코끼리물소 새끼발가락 뼈야. 너 코끼리물소 발가락이 여섯 개인 거는 아냐?”

[ 코끼리물소는 이블리스 신께서 우리 오크 종족을 위해 빚어주신 것이다. 인간이 넘볼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그래? 그런데 어째 좀 이상하지 않아? 그 이블리스라는 녀석이 코끼리물소를 빚어 줄 정도로 너희들을 아낀다면 왜 이깟 새끼발가락 뼈에 한 방에 나가떨어지게 놔둘까? 이건 뭐 족발 뜯어먹다가 뱉어낸 뼈다귀에 꿀밤 얻어맞고 죽는 꼴이잖아.”

오크 머리통을 한 방에 날려 버린 일격필살의 병기(兵器)는 바로 한창 발라먹다가 나온 코끼리물소 새끼발가락 뼈였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뒤로 자라 있는 여섯 번째 발가락. 코끼리물소의 거대한 덩치가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자라난 것이라서인지 유독 뼈 조직이 단단했다. 오크 대가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 신의 뜻을 어찌 너 같은 하찮은 것이 가늠할 수 있겠느냐! ]

“그럼 너도 그 신의 뜻이 뭔지 모른다는 거잖아? 허접쓰레기 맞네. 제 어미라는 것한테도 무시당하는 찌끄레기.”

[ 모두 저놈부터 죽여라! ]

고작 이 정도 도발에 흥분하다니 실망이었다. 어쨌거나 녀석이 굳이 나를 지목한 덕분에 오백 마리에 달하는 오크들 눈동자가 모조리 내게로 향했다.

빡! 빠박!

“형이 지금 얘랑 얘기 중인 거 안 보이니? 너희들은 좀 이따가 상대해 줄게.”

좀 더 속도를 내야 했다. 녀석들이 한꺼번에 엉겨 붙기라도 한다면 떨구어내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 네놈, 보통 인간이 아니구나! ]

“누가 오크 아니랄까 봐 미련하기는. 보통 인간이면 너랑 이렇게 대화하고 있겠니?”

[ 이블리스 신께서 내게 허락하신 권능으로 네놈을……. ]

“됐고. 일단 그 주둥이부터 좀 닥치자.”

빡!

일단 오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저 주둥이부터 닫게 해야 했다. 손에 들고 있던 코끼리물소 뼈 몽둥이로 여지없이 녀석의 주둥이를 내리쳤다. 손끝에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짜릿한 충격량이 녀석의 상태를 짐작하게 했다.

[ 으으으! 으그므스느……! ]

앞니가 다 허물어져 내려앉은 채로 뭐라 떠들어대는 오크로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크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걸 그대로 두고 볼 수야 없을 터.

“뭐라는 거야? 그리고 아까부터 왜 자꾸 삿대질이냐? 기분 나쁘게. 그 손가락도 겸손하게 만들어줄게.”

우드드득.

다음은 손가락이었다. 코끼리물소 새끼발가락 뼈에 강타당한 녀석의 오른손 손가락이 피부에 간신히 달라붙어 너덜거렸다.

[ 으으! 스… 스르즈……. ]

이제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일까. 오크로드 녀석이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 도망부터 치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야! 얘기하다 말고 어디 가? 다리가 마음대로 안 움직여?”

빠각!

대화를 나누다 말고 내뺀다? 이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예의가 뭔지 모른다면 친절하게 가르쳐주면 될 일. 그렇게 녀석의 두 다리가 으깨졌다. 겨우 새끼발가락 뼈에 의해.

[ 으으으으으! ]

“아프지? 그래, 나도 마음이 아파. 네가 자꾸 나를 그런 눈깔로 쳐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막 팔을 휘두르게 되잖니.”

그렇게 예의가 뭔지 가르쳐줬건만, 아직도 녀석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고로 강한 자 앞에서는 눈을 내리깔아야 한다는 강호의 법칙을 모르는 풋내기 녀석이었다.

[ 흐… 흐즈! 흐즈흐느그 으뜨? ]

“휴전하자고? 아직도 분위기 파악이 안 되나? 내가 너랑 한가롭게 악수나 하자고 불러낸 줄 알아?”

[ 그… 그르 으브르 으르르……? ]

“이제 좀 감이 오나 보네. 너 만나려고 코끼리물소도 일부러 잡은 거고, 다 제쳐두고 일부러 우리 셋이서만 온 것도 다 너 만나려고 그런 거야.”

[ 느… 느르 으에……? ]

“왜 너 만나고 싶어 했냐고? 네가 와야 이놈들도 딸려 올 테니까. 내가 네놈들 목이 필요하거든.”

[ ……? ]

녀석의 눈빛이 변했다. 아까의 도끼눈이 아니었다. 정말 이유가 뭔지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내가 그 목이 필요하다고 하니 궁금할 수밖에.

“이유?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내 맘이지.”

이유는 간단하다. 왕년의 마왕 체면에 좀 모양 빠지기는 한다만 당장 내가 마력이 필요하거든. 오크든 뭐든 가릴 것 없이. 그냥 너희들은 재수 없이 걸린 거야. 그러니까 왜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고 그래. 코끼리물소가 왜 너희들 거니? 뭐 물론 그렇게 나올 줄 다 알고 그런 거지만.

[ 느… 느느 느그느? ]

참으로 오래 걸렸다. 녀석이 드디어 내 진짜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제 진심으로 나를 대할 생각인가 본데…….

“나 누구냐고? 아까 말했잖아. 유진이라고. 그런데 아직도 눈깔이 왜 그 모양이냐? 눈깔도 좀 손봐줘야겠네.”

[ 으으으으으! ]

아쉽게도 아직도 그 눈깔이 문제였다. 마력이 풀린 오크들은 제 주인이나 다름없는 오크로드가 눈깔이 뽑히는 모습을 어찌할 줄 모르고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목책 너머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일방적인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살육을 당하고 있는 쪽은 오히려 오크들이었다. 전혀 예상 밖의 전개였다.

오크의 피를 뒤집어쓴 세 사람. 그중에서도 유진은 실로 마왕이라는 옛 호칭이 어울려 보였다.

“저… 저럴 수가!”

“저게 정말 사람이야?”

그러나 그 모습이 뫼니스 사람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자신들을 공격한 오크 떼를 물리치기 위해 역투(力鬪)하는 용사의 모습으로 보인 것이다.

“대공 전하, 보고 계십니까?”

“그래, 렉스. 보고 있네.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군. 저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어찌 사람의 힘으로……!”

이번에도 렉스의 눈이 젖어 들었다. 알렉세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두렵고 무섭던 마물들을 신들린 듯 으깨고 있는 유진의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대공 전하, 이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카렌 신께서 저런 무지막지한 용사를 전하의 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소피아로 향하자는 것인가?”

“유진이 앞장서 준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를 반드시 곁에 두셔야 합니다.”

새 희망이 움트고 있었다. 비단 뫼니스의 문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은둔자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소피아를 케아스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영웅으로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렉스는 유진과 함께라면 이 바람이 결코 헛된 공상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유진이 합류해 줄까? 군대라면 치를 떨지 않았나?”

“지금 저 모습을 보십시오. 이곳 뫼니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목숨 바쳐 싸우고 있습니다. 저런 영웅이 설마 도탄에 빠진 소렐의 국민을 모른 척하겠습니까?”

“하지만 유진은 나를 대공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무슨 수로 그를 내 옆에 두겠는가?”

그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은 알렉세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소렐로부터 버림받은 몸. 유진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하사한 작위마저 뿌리치지 않았던가.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대공녀님이 그의 마음을 돌려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안나 말인가? 유진이 그 철부지 녀석을 마음에 들어 할까?”

“아직 때 묻지 않은 점이 매력인 분 아닙니까?”

렉스는 대공녀 안나를 이용해 유진의 마음을 훔칠 생각이었다. 알렉세이도 그 방법이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그러다 오히려 유진을 멀어지게 하는 건 아닐지…….”

다만 대공녀 안나가 걱정이었다. 멀리서 보면 얼굴도 예쁘장하고, 여러모로 뭇 사내들의 마음을 끌만큼 매력적이었지만, 왈가닥이라는 게 문제였다.

“만세!”

“유진 용사님 만세!”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목책 너머 유진의 전투 모습을 바라보는 알렉세이. 그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뫼니스 전체가 유진을 찬양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