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122화 (123/204)

<제122화>

“이제부터 우리 셋이 할 일은 저놈들 모가지를 베는 거야.”

“……?”

이번에도 계획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너무 간단했던 모양인지 샤이언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뭐 이런 어이없는 놈이 다 있냐는 표정은 덤이었다.

“그게 답니까?”

“계획이라는 게 원래 심플해야 하는 법이거든.”

“아오, 진짜! 저것들이 제발 잘라 달라고 모가지 내밀고 기다려준답니까? 지금 그걸 계획이랍시고…….”

달수는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꽉 움켜쥔 주먹을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한 대 쥐어박으려는 표정이 분명 진심이었다. 요즘 너무 풀어줬나.

“저 오크들을 봐. 뭔가 이상하지 않아?”

“당연히 이상하죠. 오크 새끼들인데.”

“아니, 평소 저놈들 모습하고 다른 점을 찾아보라고.”

“평소 오크들이 뭘 어쩌고 사는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 정도면 놀려먹을 만큼 놀려먹었으니 이제 제대로 설명해줄 시간이었다. 적어도 같이 사지를 누빌 전우들인데 이 정도 배려는 해야 할 터.

“잠깐!”

“왜?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저것들이 왜 저러지?”

“뭐가?”

그 순간 샤이언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달수의 어깨를 짚었다. 사방을 둘러보는 모양새가 이제 좀 내가 의도하는 바가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저 일사불란한 움직임 말이야. 전혀 오크답지 않다고!”

“바로 그거야.”

오랫동안 몬스터들을 상대해 온 경력이 무색하지 않게 샤이언이 단박에 평소와는 다른 오크들의 움직임을 알아챘다. 저것들은 지금 전혀 오크답지 않았다. 미련하기로는 몬스터들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놈들이 군무(群舞)를 추듯 조직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게 지금 반길 만한 소식입니까? 저놈들이 무지 잘 싸운다는 말이잖아요!”

“저놈들이 뭔지 벌써 잊었어?”

“뭐기는 뭡니까? 오크지.”

“그러니까. 오크가 저렇게 정예병들처럼 움직일 수 있는 이유가 뭘까?”

“훈련을 무지 빡세게 했나 보죠.”

샤이언과 달리 달수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눈치 하나는 무지 빠른 달수인데 그렇다고 이해력이 매번 좋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오크 못지않은 늑대 대가리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때도 간혹 있었다.

“뒤돌아서면 제 부모 얼굴도 까먹는 저 단순한 오크들이 그렇게 빡세게 훈련했을 리가 없잖아. 훈련했다고 해서 이렇게 확 달라질 리도 없고.”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이제 보니까 눈깔도 풀린 것 같은데요? 단체로 약이라도 했나?”

“약이 아니라 마력이야.”

모여 봤자 전혀 득 될 것이 없는 오크들을 이렇게 정예병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바로 마력이었다. 누군가의 마력이 저들을 마치 한 몸처럼 조종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대단한 놈이기에 저 많은 오크를 다 마력으로 홀렸다는 겁니까?”

“설마……!”

“왜? 그놈이 누군데 그래? 나도 좀 알려줘.”

이쯤 되자 샤이언은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챈 듯 보였다. 달수는 여전히 맑고 깨끗한 영혼을 자랑했다. 사실 달수를 미련하다고 탓할 일이 아니었다. 녀석은 그 주인공을 아직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테니까.

“오크로드!”

“오크로드?”

“오크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 놈이지. 쉽게 말하면 마력으로 무리를 조종하는 주술사 같은 놈이야.”

“잠깐만요. 그럼 그놈만 죽여 버리면 저것들이 다 원래 그 늑대 대가리 달린 오크로 돌아온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뭘까?”

“오크로드인지 뭔지 하는 놈부터 찾아야죠.”

이제 좀 눈치 빠른 평소의 달수다웠다. 달수가 정확히 짚어낸 것처럼 수백 마리 오크를 전부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녀석들을 제 몸 움직이듯 조종하고 있는 오크로드를 찾아내 목을 베 버리면 그만이었다.

“잘 아네. 그럼 찾아.”

“예? 뭐 생김새가 좀 다르다든가, 아니면 왕관이라도 쓰고 있다든가 그런 힌트 없습니까? 본 적도 없는데 다짜고짜 찾으라고 하시면 어떤 놈이 오크로드인지 알고 찾아요?”

“눈이야. 눈을 보라고.”

샤이언이 말한 대로 오크로드의 특징은 바로 눈이었다. 수많은 오크를 하나도 빠짐없이 조종하려면 마력을 끊임없이 사방으로 내뿜어야 했다.

“눈? 좀 자세히 말해봐. 오크로드는 눈깔이 어떻게 생겼는데?”

“이 많은 오크들을 모두 조종하려면 아마 온 마력을 다 쏟아붓고 있을 거야. 눈동자가 마치 불이라도 붙은 듯 불타고 있을 거라고. 오크가 마력을 사용하면 눈빛부터 변하는 법이니까.”

“오케이! 그럼 눈깔이 유독 시뻘건 놈만 찾으면 되겠네요?”

“놈을 찾으면 함부로 덤비지 말고 나를 불러. 뭐해? 어서 흩어져 찾지 않고.”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유독 눈깔이 시뻘건 오크를 찾는 것이었다. 그 한 놈만 족쳐 놓으면 나머지는 늑대 대가리를 어깨 위에 얹은 천치들에 불과했으니까.

***

유진 일행이 주도면밀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던 그 순간. 멀리 뫼니스 목책 안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뫼니스를 지키는 마지막 희망, 렉스와 기병대원들이었다.

“대장님, 정말 저들을 저대로 두어도 되겠습니까?”

“유진과 약속하지 않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목책을 넘어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저대로 두었다가는 셋 다 개죽음만 당할 뿐입니다.”

수하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오백 대 삼. 일당백의 기세로도 감당하지 못할 수적 열세였다. 누가 보더라도 필패(必敗)의 부질없는 몸부림일 뿐이었다.

“아직도 유진의 뜻을 모르겠어?”

“유진의 뜻이라니요?”

“유진은 지금 우리 기병대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거야. 저 셋이 오크 무리의 정신을 빼놓는 동안 우리가 완벽한 대비 태세를 갖출 수 있도록 하려는 거라고.”

유진 일행이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는 시뻘건 눈동자의 소유자가 여기도 있었다. 렉스는 그새 눈시울을 붉힌 채 눈물을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저들은 죽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저라도 나가서…….”

“허락할 수 없네.”

“대장님, 정말 저들이 죽는 걸 이렇게 비겁하게 지켜만 보실 겁니까?”

“그것이 유진의 뜻이라면. 어서 전투 대형을 갖추게. 지금은 저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야.”

“대장님!”

수하의 격한 충언에도 렉스는 단호했다. 유진 일행을 구원하는 것 대신 그는 기병대의 방어 태세를 챙겼다. 뫼니스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유진의 뜻을 꺾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유진이 왜 그리 단호하게 우리더러 목책을 넘어오지 말라고 말했을 것 같은가?”

“…….”

“유진은 처음부터 살 생각이 없었던 거야. 방어 태세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축제를 즐기던 도중 갑작스럽게 오크들의 습격을 받은 터라 모두 갈피를 못 잡고 있어. 가장 빨리 모두의 전의를 북돋는 방법은 역시 저것뿐이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우리가 지금 뛰어나간다면 저들의 희생은 허사가 되겠지. 저들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어 버릴 셈인가?”

렉스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렉스는 그 눈물을 닦으려고 하지 않았다. 사내의 뜨거운 눈물이란 감추고 싶은 법이었다.

수하 또한 그가 말하는 바를 알아들었기에 더는 렉스의 말을 끊으려 하지 않았다. 이미 수하는 물론 나머지 기병대원들의 눈시울도 렉스와 마찬가지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정규 훈련을 받은 기사도 아니고 겨우 음식이나 만들던 주방장이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이런 영웅적인 결단을 내린 걸까요?”

“기사든 주방장이든 카렌 신 앞에서는 모두 한없이 나약한 어린양들일 뿐이야. 신께서는 오직 그 그릇을 보고 영웅을 고르실 뿐이지.”

“부끄럽군요. 당연히 우리 기사들이 나섰어야 할 일인데…….”

“저게 바로 영웅의 그릇이라네. 우리 같은 범인들은 흉내 낼 수 없는.”

“유진, 그는 정말 참다운 용사군요.”

이들의 눈에 유진은 더는 보잘것없는 주방장이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이들은 유진을 영웅이자 용사로 여기고 있었다. 이들에게 유진은 이미 용사 중의 용사라는 드웨인 하인라이트와 다름없었다.

***

마력이 모자라니 눈도 침침해진 것인지 오크로드 녀석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기계처럼 움직이며 달려드는 오크들 틈을 비집고 다니는 것이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여하튼 빨리 오크로드 녀석부터 찾아야 했다.

“형님, 그 오크로드인지 뭐시기 찾다가 우리부터 죽는 거 아닙니까?”

“코끼리물소 떼도 거뜬히 해치웠는데 고작 오크 따위한테 쫄아서 되겠어?”

“코끼리물소는 이놈들처럼 몽둥이 들고 덤비지 않잖아요!”

덩치만 놓고 보자면 코끼리물소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달수 녀석 말대로 코끼리물소는 덩치만 크다뿐이지 몽둥이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미친 듯이 달리기만 해야 했던 코끼리물소 사냥에 비해 무지 성가시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오크들 전체가 오크로드가 뿜어내는 마력에 취해 목이 잘리지 않는 한 아픈 줄도 모르고 덤비는 통에 우리 셋은 점점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체력이 고갈되는 날에는 오크 놈들에게 죽을 때까지 몽둥이찜질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코끼리물소 잡는 건 별거 아니라는 거네? 그럼 앞으로 코끼리물소 사냥은 네가 도맡아서 하면 되겠네.”

“저더러 그 짓을 또 하라고요?”

“별거 아니라며?”

“누가 별거 아니라고 했습니까?”

“오우씨! 뒈질 뻔했네. 이제 그만 말 거세요!”

“내가 말 걸었냐? 네가 걸었지.”

오크들 목을 베는 사이마다 시답잖은 농담으로 달수와 샤이언의 긴장감을 풀어주었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대로 정말 오백 마리 오크를 전부 상대하는 것은 아직 무리였다.

“어쨌거냐요! 어? 형님! 저기요!”

“어디?”

“저기 저 눈깔에서 레이저 나오는 놈이요! 저놈이 오크로드 아닙니까?”

“맞는 것 같은데?”

다행히 오크로드는 멀지 않은 곳에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저 눈깔을 잡아 뽑든, 아예 그 모가지를 날려 버리든 하여간 저놈만 처리하면 이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형님, 그런데 진짜 꼭 이렇게 하셔야 합니까? 저런 눈깔 달고 다니는 놈치고 제정신인 놈들이 없다고요.”

“유진,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기병대에 도움을…….”

“정 겁나면 너희들은 여기 있어. 저놈은 내가 해결할 테니까.”

“형님, 지금 객기 부리실 때가 아니라니까요!”

휙!

정작 오크로드를 찾아내자 겁이 났는지 달수와 샤이언이 주춤거렸다. 지금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었다. 달수의 말을 무시하고 재빨리 몸을 날렸다. 저놈이 우리가 접근하는 것을 알아채고 오백 오크 무리로 겹겹이 제 몸을 감싸기라도 하는 날에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 저 고집불통 형님 새끼! 뒈지려면 혼자 뒈지든가. 형님, 같이 가요!”

“뭐… 뭐야! 왜 나만 두고 가는데? 같이 가!”

등 뒤에서 한층 걸쭉해진 달수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졸지에 홀로 남겨진 샤이언이 서둘러 나와 달수의 뒤를 쫓는 소리까지. 툴툴거리면서도 기어코 내 뒤를 따라오는 저들의 모습이 여간 미더운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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