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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 마왕족발-121화 (122/204)

<제121화>

땅땅땅땅!

요란한 소리가 한창 축제 중이던 뫼니스 중앙광장에 울려 퍼졌다. 대부분은 이미 분위기에 취해 이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잊은 듯 보였다.

“아주 난리가 났네요. 마시고 먹고 두드리고.”

팽달수도 마찬가지였다. 경계병들이 요란하게 울려대는 이 소리를 마치 장단을 맞추려는 소리 정도로 생각했다.

“이건 신나서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야.”

“다들 신나서 춤추고 난리가 났는데 뭐가 아니라는 겁니까, 형님? 엥? 렉스 대장이랑 기병대들이 왜 저러지? 급히 뛰어가는데요? 어디 가는 거야?”

하지만 다행히 모두 팽달수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역시 렉스였다. 렉스는 경고음을 듣자마자 기병대를 이끌꼬 서둘러 목책으로 향했다.

“‘그놈’들이 나타난 걸 거야.”

“그놈들이 도대체 어떤 놈들인데요?”

“오크 놈들.”

한창 들떠있던 뫼니스에 찬물을 끼얹은 이들은 오크들이었다. 유진은 그들이 오크들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미리 알았다는 눈치였다.

“오크요? 에이, 난 또 뭐라고. 여기 사람이 몇 명인데 겨우 오크 몇 마리 못 막아내겠습니까?”

뫼니스를 위협하는 것들이 겨우 오크라는 팽달수는 코웃음을 쳤다. 그가 아는 오크들이란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일 뿐이었다.

“게이트 안에서 돌아다니는 몇 마리를 본 게 전부일 테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은갈기늑대 모가지 꿰듯이 꿰면 될 걸 가지고 왜 형님까지 긴장하고 그러십니까? 코끼리물소 잡은 덕에 마력도 채웠는데 그 정도면 오크 몇 마리야 개미새끼 잡는 것만큼 쉽게 해치울 수 있잖아요? 형님한테는 새 발의 피 아닙니까?”

“십여 마리 정도라면 그럴 테지.”

어찌 된 영문인지 유진은 긴장감을 감추지 않았다. 팽달수가 알고 있는 허접하기만 한 오크를 상대하는 그런 눈빛이 아니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러세요? 형님답지 않게?”

“오크는 원래 혼자 다니지 않아. 코끼리물소처럼.”

“그럼 설마 코끼리물소들처럼 수백,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다닌다는 말씀입니까?”

“이 정도로 땅이 흔들릴 정도면 아무리 적어도 수백 마리는 될 거야.”

유진이 걱정하는 바는 바로 오크들의 수였다. 팽달수의 말대로 마왕 시절의 그였다면 오크 정도야 새 발의 피조차 되지 못할 것들이었을 터.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번 코끼리물소 사냥의 성공으로 적지 않은 마력을 모았다고 해도 수백 마리 오크들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저놈들이 아무리 미련해도 그렇지 이렇게 방어 태세를 완벽히 갖추고 있는 곳을 공격할까요?”

“이미 쳐들어오고 있는데 뭘 그런 걸 물어?”

“하지만 도대체 왜요? 왜 굳이 우리를 공격한다는 겁니까?”

“지금 우리한테 무지 화가 났을 게 분명하거든.”

“화가 왜 납니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우리한테 왜……?”

팽달수는 쉬이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이곳 뫼니스가 비록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정규성은 아니라고 해도 제법 촘촘한 방어선을 구축해둔 곳이었다. 고작 오크들이 이렇게 이유도 없이 넘볼 곳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유진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그는 오크들이 뫼니스를 노리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다는 표정이었다.

***

뫼니스 북쪽 목책 근처. 목책을 따라 도열한 기병대가 어둠 속에서 번쩍거리는 오크들의 벌건 눈동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많이도 몰려왔군.”

“오백 마리는 족히 넘을 것 같습니다, 대장님.”

렉스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오크들을 상대하는 게 처음일 리 없는 그였다. 오크들이 얼마나 미련한 존재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분명 긴장하고 있었다. 이제껏 이렇게 많은 오크 무리가 한꺼번에 뫼니스를 에워싼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것들이 왜 갑자기 무리를 지어 우리를 공격하는 겁니까? 이곳 뫼니스의 목책을 뚫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요. 아무리 미련하다고 해도…….”

“나도 그게 의문이야.”

수하의 말처럼 의외의 상황이었다. 오히려 인간들을 피해 붉은가지 숲 북쪽으로 마을을 이동시킬 정도로 인간들을 경계하는 오크들이었다. 뫼니스에 반발할 것이었다면 진즉 몰려왔어야 했을 터. 렉스는 이렇게 뒤늦게 느닷없이 대규모로 몰려온 오크들의 의중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똥개라도 제 밥그릇을 걷어차면 눈깔을 뒤집어 까고 덤비는 법이니까.”

그 이유를 들려준 것은 유진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간들이 오크 무리의 먹잇감을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밥그릇? 우리가 언제 저것들 밥그릇을……! 설마 코끼리물소가 저놈들 밥인가?”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사실 밥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렇지. 아무튼 저것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코끼리물소야. 수십 마리가 달라붙어 겨우 한 마리를 사냥하지. 코끼리물소 한 마리면 오크 수십 마리가 충분히 배를 채울 양이니까.”

“그렇다고 코끼리물소가 오크들 것은 아니잖아?”

“물론 그렇지만 쟤들 생각은 다를걸? 우리가 코끼리물소를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잡은 걸 두고 마치 제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할 거야.”

오크들이 앞뒤 재지 않고 뫼니스로 몰려온 것은 바로 코끼리물소 때문이었다. 그들이 마음껏 사냥하지도 못하는 별미 중의 별미를 인간들이 싹쓸이하듯이 마구잡이로 잡은 것이 화를 북돋아 놓은 셈이었다.

“그럼 저것들이 저리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유진 자네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야?”

“응. 일부러 그런 건데?”

역시 유진은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오크들이 이렇게 몰려든 것조차 그가 계획한 바였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지금 그게 할 소리인가? 너 때문에 뫼니스 전체가 위험에 빠진 게 안 보여!”

렉스는 유진 덕에 식량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도 잊은 채 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뫼니스 전체를 위험에 빠뜨려놓고 마치 소꿉놀이라도 하듯 건들거리는 유진의 모습에 화가 치민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 저놈들은 우리 셋이서 해결할 테니까.”

그런 렉스를 진정시키려는 듯 유진이 곧바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간단하고 명료한 해법이었다.

“그 셋에 저도 포함되는 건 아니죠?”

“내가 너를 두고 어디를 가냐?”

“그냥 두고 가셔도 되거든요.”

“그래? 그럼 가리봉으로 돌아갈 때도 혼자 간다?”

“아흐. 달수야, 팽달수! 너 전생에 나라라도 팔아먹었어? 도대체 뭔 죄를 지었기에 저런 진드기 같은 형님 새끼를 만난 거냐고!”

“혼잣말은 혼자만 들을 수 있게 하지?”

렉스는 유진이 내놓은 해법을 듣자마자 기가 차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코끼리물소 떼를 상대로 보여준 유진의 놀라운 기지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그것이 통할지 의심하는 눈치였다.

유진의 해법에 의문을 품은 사람은 렉스뿐만이 아니었다. 팽달수는 그 해법 속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사실에 느닷없는 자책을 늘어놓았다.

반발은 팽달수에서 그치지 않았다. 뫼니스를 위해서라면 코끼리물소 오줌 세례도 마다하지 않던 샤이언조차 슬글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더는 유진과 엮이기 싫은 눈치였다.

“어이, 샤이언! 너는 어디 가냐?”

“아니, 그게… 벌꿀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지 볼일 좀 보려고.”

“그럴 시간 없으니까 가면서 대충 아무 데나 싸. 설마 도망치려는 건 아니지?”

“그게 아니라… 이건 너무 무모하잖아!”

유진에 대한 감정을 떠나서 단 셋이서 오백이 넘는 오크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어리석기 그지없는 대응책이었다. 샤이언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진이 오크보다 더 미련해 보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코끼리물소 사이를 휘젓고 다니던 그 기백은 어디 갔어? 용사가 꿈이라는 녀석이 편한 상대만 골라서 싸울 생각이었어?”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하지만 유진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미 승리를 자신하는 유진 앞에서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유진, 그건 샤이언 말이 맞네. 셋이서 저들 모두를 상대하겠다는 건 누가 봐도 무모하다고. 왜 굳이 셋이서 싸우겠다는 거지?”

샤이언을 대신해 렉스가 유진을 질책했다. 기병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셋이서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었다.

“우리 셋이서 불러온 적들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건 뫼니스 사람들 전체가 먹을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였지 않나. 그러니 우리 기병대가 함께 싸우겠네.”

“우리 셋이면 충분하다니까.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목책 밖으로 나오지 마.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역시 유진은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절대 목책 밖으로 나오지 말라며 렉스에게 엄포를 놓았다.

렉스가 슬픈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유진이 본인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을 생각했다. 스스로 희생해 기병대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어주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유진, 이건 그렇게 고집피울 일이 아니야.”

렉스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비록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뫼니스를 아끼는 유진의 마음만큼은 진심임을 그는 결코 모르지 않았다.

“한 사람이라도 목책 밖으로 나오면 그때는 코끼리물소고 뭐고 다시는 못 먹을 줄 알아. 알았어?”

“하지만…….”

“달수야, 샤이언! 가자!”

그새 목책을 넘어 멀어져가는 유진의 뒷모습이 여간 외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렉스는 죽으러 가는 길임을 알면서도 유진 일행을 막아 세우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남몰래 눈시울을 붉혔다.

***

“무모하고.”

“고집불통에.”

“성질까지 더러운 데다가.”

“못생겼어.”

마치 끌려가듯 유진와 함께 오크 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팽달수와 샤이언. 그들의 생각은 렉스의 그것과는 극명하게 달라 보였다. 유진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이들은 대놓고 그를 헐뜯었다.

“그만하지? 그리고 솔직히 여기서 생긴 건 내가 제일 나은 것 같은데?”

“하! 게다가 뻔뻔하기까지.”

“그러니까. 내 말이.”

“너희들이 그런다고 내 마음은 안 바뀌어.”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지만, 유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전의를 불태우는 듯한 눈빛이었다.

“형님, 어차피 죽는 거 이유라도 좀 알고 죽읍시다. 굳이 이렇게 일부러 개죽음당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다는 듯 팽달수가 유진에게 이유를 물었다. 겨우내 먹을 식량까지 애써 장만해 둔 마당에 이렇게 개죽음을 자처하는 이유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투가 무지 반항적이다? 마력이 생겼으면 써먹어야 할 거 아니야. 그래야 더 쌓일 테고. 굴러들어온 호박 덩어리들을 남들한테 다 나눠줄 거야?”

이유는 간단했다. 마력. 유진의 머릿속에는 온통 마력 생각뿐이었다. 애초에 위험을 무릅쓰고 코끼리물소를 사냥한 것도 마력 때문이었던 것처럼.

“호박에 파묻혀 죽게 생겼으니까 그렇죠! 이제 겨우 E 등급인 마력으로 뭘 어쩌자는 겁니까?”

“내가 설마 아무 계획도 없이 여기까지 왔을까.”

다행히 유진은 다음 계획까지 세워둔 눈치였다. 유진의 말에 팽달수와 샤이언은 그나마 불안감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었다.

“설마 나보고 오크 오줌까지 뒤집어쓰라는 건 아니겠지?”

“또 하라면 할 거야?”

“아니! 절대! 못 해! 안 해!”

“이제 그런 거 안 시켜.”

“그럼 어쩔 생각이신데요?”

“잘 들어. 내 계획은…….”

팽달수와 샤이언은 귀를 쫑긋 세웠다. 자칫 한눈을 팔다가는 그렇게 무시했던 오크 몽둥이에 머리통이 으깨질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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