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다음 날 아침, 드디어 해가 떠올랐다. 오늘은 유진이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사냥을 떠나는 날이었다.
“앗싸!”
“웬일? 우리 달수 동생께서 깨우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일어나는 날이 다 있네? 너 맨날 봉 여사가 깨워줬다면서?”
“그러게요. 우리 봉 여사는 잘 있나?”
“그런데 진짜 웬일이래?”
“오늘이 그날이잖아요.”
“그날? 마법에라도 걸렸어?”
“아이, 소고기 먹는 날이잖아요. 진즉 말씀하시지. 소 잡는 줄 알았으면 제가 더 열심히 일했을 거 아닙니까?”
“퍽이나 그랬겠다.”
아침잠이 많은 달수 녀석이 벌써 일어나 잠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 뭘 잡을지 몰래 귀띔해준 탓이었다.
오늘 우리가 잡을 놈은 바로 코끼리물소였다. 달수와 샤이언이 힘들게 퍼온 오줌의 주인들. 이들이 이번 겨울 뫼니스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줄 터였다.
“꽃새우살을 소금하고 올리브 오일로만 살짝 마리네이드를 한 다음에 뜨겁게 달군 그릴에 각종 채소와 같이 미디엄 웰던으로 익혀서 와인 한 잔이랑 같이 먹으면… 캬!”
“평생 막걸리만 먹었을 것 같이 생긴 네가 와인도 먹어봤나 보네.”
“형님, 저 강남 삽니다.”
“가리봉이 언제부터 강남구였냐?”
“가리봉도 엄연히 한강 남쪽이라고요.”
달수는 벌써 고기 먹을 생각에 한껏 마음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뭐 잡기만 한다면야 코끼리물소만큼 맛있는 고기가 또 드물었다. 떼로 몰려다니는 탓에 게이트 안에서는 좀처럼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 항상 아쉽던 놈들이었다.
“괜히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라. 코끼리물소를 한 마리라도 잡아야 꽃새우살을 먹든 꼬리곰탕을 먹든 하지.”
“소 잡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십니까? 저 왕년에 코뿔맷돼지도 잡던 놈입니다, 형님.”
말하는 것으로 봐서 달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코끼리물소를 본 적이 없는 것이 확실했다. 코뿔멧돼지하고는 급이 다른 녀석이었다. 말 그대로 코뿔멧돼지가 돼지라면 코끼리물소는 소였다. 체급이 다르다는 뜻이었다.
“너 코끼리물소 한 번도 본 적 없지?”
“없죠.”
“E 등급 몬스터라고 우습게 볼 놈들이 아니야. 특히 지금 우리한테는 거의 일반인이 백구 상대하는 거랑 비슷할걸?”
“에이, 형님 지금 겁먹으신 겁니까? 우리 유진 형님 간이 콩알만 해지는 날이 다 있네.”
“혹시 모르니까 옷도 단단히 입어. 밟히면 아프다.”
게다가 코뿔멧돼지와는 달리 떼로 몰려다니는 탓에 코끼리물소에게 혹여 밟히기 시작하는 날에는 죽기를 각오해야 했다. 뒤따라오는 수천 마리가 같은 부위를 똑같이 밟아 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이 형님 제대로 겁먹으셨네. 저만 믿으십시오. 제가 한 마리 딱 잡아서 등심, 안심에서부터 치마살, 꽃새우, 살치살, 채끝까지 그냥 풀코스로 구워드리겠습니다.”
“또 설레발친다. 난 분명 말해줬다?”
“저만 믿으시라니까요.”
역시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는 옛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제발 달수가 오늘 내 충고를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다시 바람계곡을 찾은 유진 일행. 어제와 달리 코끼리물소들이 한창 배변 활동에 열심이었다. 이제야 코끼리물소를 직접 대면한 팽달수의 눈이 달덩이만 하게 커졌다.
“오우씨! 저게 소라고요? 그렌델이 아니고?”
“아까 말했잖아. 지금 우리로서는 우습게 볼 놈들이 아니라고.”
“게다가 떼로 몰려다니네. 도대체 저게 몇 마리입니까?”
코끼리물소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대개 이러했다. 그 압도적인 크기에 먼저 놀라고. 또 무리를 이루고 있는 그 어마어마한 수에 다시 한번 놀라고.
“저것들을 사냥하겠다는 거야? 밟혀 죽으려고 정말 환장한 건가?”
“사뿐히 밟혀 죽을지 아니면 소금 뿌려서 구워 먹을지는 해봐야 알지.”
이제야 오늘 사냥 목표가 코끼리물소라는 사실을 알게 된 샤이언은 황당하다는 듯 유진을 바라보았다. 사냥하겠다더니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 아니냐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다 뭐지? 코끼리물소를 사냥하겠다면서 이것들을 왜 가지고 오라고 한 거야?”
“왜는. 필요하니까 가지고 온 거지.”
저 무시무시한 코끼리물소를 사냥하러 온 것치고는 인원수가 너무 단출했다. 기거다 그 쓰임새를 알 수 없는 준비물들까지. 샤이언은 유진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앞에 놓인 것들이라고 해봐야 유진과 팽달수가 애써 모은 송진과 어제 퍼온 코끼리물소의 오줌 두 통, 단 하나뿐인 활과 화살이 전부였다.
“고작 이런 거로 코끼리물소를 잡아보시겠다? 훗! 무리에서 떼어내는 것부터가 불가능하다고.”
“안 떼어낼 건데?”
“안 떼어내고 무슨 수로 코끼리물소를 사냥하려고?”
“전부 다 잡아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하!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네. 네가 무슨 진짜 마왕 유진이라도 되는 줄 알아? 저 많은 놈들을 어떻게 상대하려고?”
샤이언은 하도 기가 차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는 유진이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유진은 우연히 이름이 같다고 해서 자신이 진짜 마왕 유진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진의 진짜 정체를 모르기에 충분히 그리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지금 그의 눈에 이렇게 셋이서 저 셀 수 없이 많은 코끼리물소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으로 보일 뿐이었다.
“저기 저 협곡 끝에 뭐가 있지?”
“뭐기는 뭐야. 거기에는 바람절벽이……! 절벽으로 코끼리물소 떼를 몰아갈 생각이군!”
“이제 좀 감이 오시나?”
황당해하는 샤이언의 표정을 보자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유진이 상세한 계획을 늘어놓았다.
협곡 끝 바람절벽이 언급되자 그제야 감을 잡기 시작하는 샤이언. 유진은 코끼리물소 떼를 절벽 쪽으로 몰아가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리 셋이서 어떻게 저놈들을 다 절벽으로 몰고 갑니까? 발가락 하나 까딱이게 하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요.”
“이걸로 저놈들을 절벽 앞까지 유인할 거야.”
“그건 밤꿀로즈잖아?”
오늘 사냥의 성공을 위해 유진이 따로 준비한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밤꿀로즈. 진한 밤꿀 향이 그윽한 꽃이었다.
그냥 로즈라고 부르기에는 그 꽃의 크기가 정말로 컸다. 꽃잎 하나의 크기가 유진의 몸 절반을 뒤덮을 정도였으니까.
“응. 코끼리물소들이 아주 환장을 하는 먹잇감이지. 달수, 너는 이걸 들고 죽어라 달리면 돼.”
“지금 저보고 저것들이랑 달리기 시합을 하라고요? 제가 무슨 우사인 볼트입니까? 그러다가 밟혀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러니까 밟히면 아프다고 옷 단단히 입으라고 했잖아.”
“저 코끼리보다 큰 물소에 밟히는 건데 옷 몇 겹 더 입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밤꿀로즈로 녀석들을 유인하는 것은 팽달수가 해줘야 할 몫이었다. 다소 위험하기는 했지만, 유진이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을 터. 정말 옷을 두껍게 입으라고 한 것이 전부라면 오늘 이 바람계곡에 뼈를 묻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이번 사냥만 성공하면 적어도 올 겨울 동안 굶어 죽는 사람은 없겠어! 유진, 나는 뭘 하면 되지?”
“야, 샤이언! 너까지 왜 그러냐? 지금 네 일 아니라고 이러는 거지?”
샤이언은 그새 이번 사냥이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느꼈는지 유진을 재촉했다. 아니면 가장 위험해 보이는 역할을 팽달수가 맡게 되어 안도하는 것이든지. 어제 입안에 오줌물이 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코끼리물소 오줌을 퍼담은 보람이 있었다.
“아무리 밤꿀로즈로 녀석들을 유혹한다고 해도 한두 마리만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뒤에서 채찍질을 해줘야지.”
“채찍? 지금 저놈들 한가운데 들어가서 채찍을 휘두르라고?”
그러나 유진은 어제 샤이언이 보여준 살신성인의 모습을 다 까먹은 눈치였다. 오히려 밤꿀로즈 꽃잎을 들고 코끼리물소들과 달리기 시합을 해야 할 팽달수의 신세가 부러울 정도였다.
“아니. 그러다 밟혀 죽으면 어쩌려고.”
“형님, 그럼 저는요? 저는 밟혀 죽어도 괜찮다는 말씀입니까?”
“일단 저것들 속도 붙기 시작하면 내가 중간에 슬쩍 옆으로 빼내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냥 형님이 하시면 안 될까요?”
“나는 따로 할 일 있어. 반드시 살려줄 테니까 겁먹지 마.”
“소 발굽 싸대기를 수천 대 연속으로 맞게 생겼는데 어떻게 겁을 안 냅니까?
다행히 유진은 팽달수와 샤이언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팽달수는 연신 유진을 바라보며 애걸했다.
“그리고 샤이언 너는…….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채찍질.”
팽달수가 떠들든 말든 샤이언 쪽으로 아예 돌아서 버린 유진.
“아, 그래. 너는 저놈들이 미친 듯이 달려 나가게 채찍질을 해줘야 해. 대신 채찍이 아니라 불로.”
“불?”
“응. 내가 불화살로 저놈들 몸에 불을 붙일 거야.”
“하지만 불화살 한두 발로 몸에 불이 붙지는 않을 텐데?”
“그러니까 너처럼 유능한 전문가가 필요한 거지.”
샤이언이 할 일은 간단했다. 유진이 불화살을 쐈을 때 코끼리물소 몸에 불이 붙도록 하면 그만이었다.
“나를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하고 있는 줄은 몰랐군.”
“이건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걸? 렉스도 그렇고 알렉세이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래? 하하하! 구체적으로 내가 뭘 해주면 되는 거지? 나만 믿으라고.”
“이걸 저놈들 몸에 뿌려주면 돼. 그럼 내가 곧바로 불화살을 날릴 거야.”
“아, 그래서 송진을 긁어모은 거로군. 좋아.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녀석들에게 접근하는 거 말이지?”
“그래. 워낙 예민한 놈들이라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눈치챌 거야.”
샤이언은 유진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면서 내심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팽달수가 맡은 일은 누가 봐도 죽기 십상인 일이었다.
반면 자신이 맡은 일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렌델만 한 코끼리물소 몸에 송진을 잔뜩 묻힌 불화살 몇 대 쏜다고 해서 불이 붙을 리가 없었다. 칭찬을 백 번 해준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팽달수처럼 개죽음을 당할 일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필요한 거지?”
“저놈들 오줌으로 뭘 어쩌려고?”
“이걸로 저놈들을 속일 거야.”
“오줌으로?”
“응. 이걸 온몸을 적시고 다가가면 같은 무리인 줄 알거든.”
“코끼리물소 오줌을 온몸에 뿌리라고?”
“아니, 뿌리는 것으로는 부족해. 충분히 젖어야 하니까 들이부어야 할 거야.”
그새 샤이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유진이 그에게 어제 떠 온 코끼리물소 오줌 두 통을 건넸다. 그것을 온몸에 들이부으라는 말과 함께.
“그러면 그렇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떻게 해서든 내게 치욕을 안겨주려고 이러는 거라는 사실을 모를 줄 알아! 이렇게 치졸하게 굴지 말고 남자답게 검으로 승부를 보자고!”
“또 뭔 헛소리야? 지금 이럴 시간 없어. 정 하기 싫으면 달수랑 바꾸든가.”
분명 죽으라는 말이었다.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그러나 유진은 단호했다. 샤이언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획을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
팽달수와 역할을 바꾸라는 말에 곧바로 고개를 돌려 팽달수를 바라보는 샤이언. 아무리 생각해도 코끼리물소 오줌을 뒤집어쓰고 놈들 한가운데로 기어 들어가는 것보다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이 살 가망이 커 보였다.
“형님, 제가 전에 말씀 안 드렸던가요? 제가 ‘오류동 혈귀’라고 불리기 전에 ‘구로 쌥쌥이’로 통했거든요. ‘달리기’하면 팽달수. ‘팽달수’하면 또 달리기 아닙니까?”
“달수, 아까는 달리기 싫다며?”
“내가 언제 싫다고 그랬어? 와, 샤이언 너 진짜 웃긴다! 이제 없는 말까지 지어내네.”
그렇게 팽달수와 샤이언은 한동안 서로의 역할을 두고 입씨름을 계속했다. 그것마저 막을 생각은 없는지 유진이 조용히 결론이 나기를 기다려주었다. 결국 둘 중 하나는 죽지 않기 위해 죽어라 달려야 할 테고, 나머지 하나는 오줌을 뒤집어쓰고 코끼리물소 떼 한가운데로 기어가야 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