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싫어.”
더 들어볼 것도 없었다. 평생 들었던 숱한 부탁 중 가장 끔찍한 부탁이었다. 혹시나 미련을 가질까 봐 듣자마자 거절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원래 거절은 확실하게 해줘야 서로 마음이 상하지 않는 법.
“싫다니? 기병대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대공 전하께서 특별히 추천해주지 않으셨으면…….”
“난 관심 없으니까 병정놀이는 너희들끼리 하라고.”
“이자가 진짜!”
렉스가 옆에서 다독여도 보고 샤이언이 나서서 윽박지르는 시늉까지 했지만, 그따위 것으로 내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 터였다. 다른 부탁도 아니고 군대에 다시 들어가라는 부탁인데 애걸복걸을 해도 욕부터 나갈 판국에 어디서 감히.
“유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아무리 이곳 은둔자들의 땅에서는 신분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나중을 생각해야지. 자네 같은 평민 출신들한테는 다시없을 기회야.”
“기회는 개뿔. 내가 미쳤어? 군대를 다시 가게. 내가 그쪽으로는 오줌도 안 싸.”
대공씩이나 되는 알렉세이에게는 군대라는 곳이 평민들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를 주는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고귀하신 분께서 짬밥다운 짬밥을 먹어봤을 리도 없고, 뭣 같은 선임에게 전혀 이유도 없고 맥락도 없는 갈굼이나 얼차려를 당한 적도 없을 테니 말이 저리 쉽게 튀어나올 터.
“다시 가다니? 기사였던가? 평민이 아니었어?”
샤이언은 뭔가 꼬투리를 잡은 듯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군대에 복무한 경험이 있다는 말을 마치 내가 신분과 정체를 숨기고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한 눈치였다. 아직도 나를 케아스의 첩자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군대 가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기사, 평민 따지고 있어. 그냥 나라에서 가라고 하면 가는 거지.”
“하긴. 보병대에 끌려갔을 수도 있겠군.”
다행히 이번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금세 거두었다. 이곳 아리아스 대륙에서도 군대라는 곳이 번쩍거리는 값비싼 검을 들고 말 위에 올라 무용을 자랑하는 기사들만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었으니까.
기사들이 지나간 뒤 그 뒤처리를 담당하는 보병대는 대개 평민들을 징집해 그 수를 채웠다. 굳이 따지자면 이곳이 진짜 군대였다. 역시 이곳에서도 고생은 없는 집 자식들만의 몫이었다.
“그럼 뭘 하려고? 자네의 그 창술 실력을 정말 썩힐 셈인가?”
“사냥. 당분간은 달수하고 사냥만 할 거야.”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이번에는 렉스가 나섰다. 아마 나를 진짜 용사로 믿고 있는 길리언이 약간의 과장을 섞어 내 창술 실력을 자랑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기병이랍시고 으스대고 다닐 때도 아니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잠잘 틈도 없이 미친 듯이 몬스터 사냥을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군대는 무슨.
“어차피 조만간 이곳을 떠나야 할 텐데 한가롭게 사냥만 할 건가?”
“떠나? 어디로?”
“북쪽 숲으로 이동할 생각이네.”
“북쪽 숲? 드베르그가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네?”
“사실 우리도 그게 걱정이기는 하네만……. 그러니 한 명이라도 더 기병대에 힘을 보태주어야 하지 않겠나?”
“난 군대에는 관심 없으니까 더 말해도 소용없어. 이사 갈 생각도 없고.”
“여기 남겠다는 건가?”
“여기 있을 건 다 있는데 뭐 하러 이사를 가?”
게다가 이런 어리바리한 놈들을 상관으로 모시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은 겨울을 앞둔 시점. 미리 준비를 다 해둔 것도 아니고 무작정 집을 떠날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 북쪽 숲으로 이동하는 것은 아니악의 지배자 드베르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행동이다. 보아하니 드베르그를 만난 적도 없는 모양인데 그러니 이리 무모하게 근거지를 옮길 생각을 한 것일 터.
이걸 말려야 하나, 그냥 알아서 하라고 놔둬야 하나? 사서 고생하겠다는데 말려서 들을 것 같지는 않다만…….
“당장 먹을 게 없으니까 그렇지. 자네와 달수가 큰 도움을 준 건 고맙네만 그 정도로 다 함께 겨울을 무사히 나기는 힘들다는 거 잘 알지 않나? 곧 눈이 올 거야. 사냥이 더 힘들어지기 전에 어서 북쪽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거기 가면 사냥감들이 제발 잡아 잡수라고 달려들기라도 하나?”
“그런 건 아니지만…….”
“아주 얼어 죽으려고 작정을 했네. 눈 오기 전에 집도 다 못 짓겠다.”
“…….”
굶어 죽기 싫어서 얼어 죽으러 가시겠단다. 사실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마력이 바닥났다고 해도 그간 경험으로 터득한 감각은 여전했다. 그러니 이들이 전부 사라진다고 해도 달수와 나 두 사람 목숨 보전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터.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당장 살아남는 게 아니다. ‘푸른 숲의 정령수’를 찾아 하루라도 빨리 가리봉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마력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지금으로써는 이들이 옆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무튼 먹을 게 문제라는 거 아니야.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다시는 기병대에 들어오라느니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알았어?”
결국 이들을 붙잡기로 했다. 대신 겨울 식량을 구해주기로 한 것이다. 오지랖 부린다며 비웃을지 모르지만 뭐 어차피 나는 몬스터 사냥에 온 힘을 쏟아야 하고 저들은 식량이 필요하니 서로 나쁠 것이 없다.
“식량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유진, 자네 혼자서? 그건 좀…….”
“훗! 은갈기늑대 몇 마리 잡았다고 아주 기고만장했군. 무려 천 명이 넘는 인원이 겨우내 먹을 식량을 네놈 혼자서 어떻게 구하겠다는 거지? 네놈 말 한마디면 먹을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하나?”
역시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의심 정도가 아니라 명백한 무시와 조롱이 이어졌다.
그럴 만도 했다. 이곳 뫼니스에는 무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머물고 있다. 이들 전부를 먹여 살리는 일이었다. 붉은목쥐나 은갈기늑대 몇 마리 잡는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누가 혼자 구하겠데?”
“유진, 그건 샤이언 말이 맞아. 이건 자네와 달수, 둘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왜 둘이야? 셋이지.”
“셋?”
“……? 나? 또?”
“우리 샤이언 아니었으면 이번 은갈기늑대 사냥도 힘들었던 거 알지?”
“우… 우리 샤이언?”
그래도 나는 충분한 양의 식량을 조달할 수 있으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옆에는 달수도 있고, 우리 샤이언도 있으니까. 하는 짓이 하도 얄미워서 이번에도 옆에 달고 다닐 생각이다. 이번에 성공하고 나면 아예 하인으로 달라고 그럴까?
“일머리도 있고 말도 잘 통하는 게 아주 믿을 만한 파트너라니까. 다음 사냥도 도와줄 거지?”
“이놈이 어디서 또 개수작을……!”
“무엇보다 이런 일에는 우리 샤이언처럼 책임감과 희생정신이 강한 사람이 필요하거든.”
“부려먹으려고 그런다는 걸 모를 줄 알아? 내가 네놈 하인이야?”
샤이언이 뭔 상소리를 퍼부어도 나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녀석의 운명을 틀어쥐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그렇게 손발이 잘 맞는다면 어쩔 수 없지.”
“대… 대장님!”
역시 이번에도 렉스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훌륭한 지도자라면 마땅히 뫼니스 전체를 위해 아끼는 수하 하나쯤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
“샤이언처럼 이곳 사람들을 제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이도 드물고 말이야.”
“대장님, 이자의 말에 현혹되시면 안…….”
졸지에 또 내 잔심부름꾼 신세가 되어버린 샤이언이 금방이라도 울 기세로 렉스를 설득하려 했다. 이미 붉은목쥐와 은갈기늑대 맛을 본 렉스는 내가 정말 식량 문제를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 렉스의 귀에 샤이언의 설득이 먹혀들 리 없었다.
“그래, 아무래도 이곳 사정에 밝은 샤이언 백인장이 이번처럼 유진과 달수를 옆에서 도와주면 한결 수월할 거야.”
“대… 대공 전하까지!”
여기에 알렉세이까지. 이것으로 샤이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불쌍한 녀석. 그러니까 상대를 봐가면서 까불었어야지.
“하지만 자네만 믿고 이주를 늦출 수는 없어. 열흘 내로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하면 바로 북쪽을 향해 출발할 걸세.”
“걱정하지 마. 열흘까지 걸리지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자신감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렇다고 알렉세이와 렉스가 전적으로 나만 바라보고 있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주는 이주대로 준비하되 내가 하는 걸 지켜보겠다는 의미였다.
“내가 영 미덥지 못한 모양인데 그럼 내기라도 할까?”
“유진, 지금 내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내가 지면 원하는 대로 기병대에 들어갈게. 달수도 같이.”
“이기면?”
“내가 이기면…….”
완전히 무시하지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내기란 이럴 때 하는 것이다. 상대가 내 숨겨진 패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반신반의하는 바로 이럴 때.
***
“대장님, 정말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기는 뭐가 아니라는 건가?”
“저놈이 왜 저러는지 몰라서 그러십니까? 저를 골탕 먹이려는 거라고요.”
잠시 뒤, 유진과 팽달수가 물러간 후 샤이언은 부리나케 렉스 대장을 뒤쫓았다. 이번에 또 잔심부름을 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유진의 내기 조건이 더욱 그를 초조하게 했다. 이번에 식량 조달에 성공하면 샤이언을 옆에 두고 싶다는 유진의 말 때문이었다.
“유진이 식량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확신하는 투군.”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뭐가 문제인가? 어차피 실패할 텐데.”
“……. 아무튼 보면 볼수록 꺼림칙한 놈입니다.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을 거라고요.”
샤이언은 유진이 당연히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은갈기늑대를 어떻게 사냥하는지 그 신묘한 사냥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그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야말로 카렌 신이 기적을 일으켜주지 않는 한 천 명이 넘는 뫼니스 사람들을 먹일 식량을 구한다는 것은 분명 불가능했다.
“내가 자네를 잘못 봤나 보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소피아에서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바로 알아봤지. 신념이 강한 사내라는 걸 말이야.”
“불의 앞에 절대 무릎 꿇지 않는 용사가 되어 외적과 몬스터들로부터 소렐 왕국을 지켜내겠다는 신념은 죽는 그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자네는 흔들리고 있어.”
그 특유의 도끼눈을 뜨고 유진이 사라진 방면을 바라보던 샤이언의 고개가 렉스 대장 쪽을 향해 꺾일 듯 홱 돌아갔다. 존경해마지않는 렉스 대장이 실망한 표정으로 샤이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어찌 그리 보십니까?”
“대공 전하께서 어쩌다가 이곳까지 오셨는지 벌써 있었나? 그게 다 근거 없는 중상모략 때문이었어. 대공 전하를 역적으로 몰아간 그 숱한 간신들과 지금의 자네가 뭐가 다르지?”
“대… 대장님?”
“내 말이 심하다는 거 잘 아네. 자네는 내 수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야. 나는 자네를 결코 잃고 싶지 않아. 하지만 지금의 자네 모습은 실망스럽군. 근거 없는 말로 유진을 모함하고 있지 않은가? 그게 곧 불의인 거야. 자네가 그토록 증오하던 그 불의 말이야.”
“…….”
렉스의 말에 샤이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순간 아직 은둔자들의 도시가 만들어지기 이전 소피아 시절을 떠올리는 샤이언. 렉스의 말처럼 유진이 틀림없는 첩자일 것이라고 못 박아 놓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
샤이언 만큼이나 이번 내기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또 있었다.
“제 이름이 거기서 왜 튀어나옵니까? 제가 거기를 왜 들어가요?”
“누가 들어가래? 그럴 일 없으니까 오버하지 마.”
유진은 식량 조달에 실패할 경우 군말 없이 기병대에 들어가겠다고 약조했다. 여기까지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혼자가 아니라 달수와 동반 입대하겠다는 말이 화근이었다.
졸지에 두 번째 입대통지서를 받은 달수는 길길이 뛰었다. 예전 같으면 농담이라도 그런 농담은 하지 말라며 웃으면 넘겼을 테지만, 내 마력이 예전 같지 않으니 달수도 불안한 눈치였다.
“저도 한때는 풍성했었다고요.”
“뭐가?”
“머리요.”
“그래? 생긴 거랑 하도 맞춤이라서 나는 또 날 때부터 그런 줄 알았지.”
“제 머리가 처음으로 빠지기 시작한 게 언제인 줄 아십니까? 바로 군대에 있을 때라고요. 그 마왕 같은 김 병장 개새…….”
“어째 그 마왕 같은 김개새 병장은 나 같다? 너 그거 방금 지어낸 거지?”
“다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아무튼 저는 절대 안 갑니다. 절대로요.”
“은근슬쩍 대답 피하는 거 보게. 어쨌거나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싫기는 진짜 싫은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는 애다. 지금처럼 가끔 선을 넘어서 그렇지 이제 가족이나 다름없는 놈을 입대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내기를 하지 말았어야죠! 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겨우내 먹을 양식을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하시게요?”
“다 방법이 있어.”
“그러니까 그게 뭡니까? 진짜 있는 거 맞아요?”
“뭐였더라? 갑자기 물어보니까 또 가물가물하네.”
“형님!”
정신 건강을 위해 가끔 이렇게 놀려먹을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