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뭐라고 하는 거야? 형님, 유진 형님이 뭐라고 한 겁니까?”
“안 느껴진다는데.”
“안 느껴진다고요? 뭐가요?”
“저 악마 녀석 마력이 말이야.”
“이게 안 느껴진다고요? 게이트 전체가 다 흔들릴 정도인데요? 아까 저놈 공격에 어디 다치신 거 아닙니까?”
팽달수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의 마력으로는 유진과 남 회장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드웨인 덕에 궁금증은 풀 수 있었지만, 오히려 걱정만 더 늘어나 버렸다. 유진이 남 회장의 이 무시무시한 마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지 않은가.
“그런 건 아닌 것 같네. 저기를 보게나.”
그러나 걱정도 잠시. 무명 진인의 손가락이 유진을 가리켰다. 유진이 뿜어내는 마력으로 인해 아지랑이가 이글거리는 몸으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남 회장을 향해 걸어가는군. 저리 무방비로 접근하다가 역습을 받으면 어쩌려고……. 아무리 온몸에 마력을 둘렀다고는 하나 남 회장 또한 마찬가지이거늘 어찌 저런 객기를 부리는 건지 모르겠어.”
“철없는 객기나 부릴 유진 처사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슬금슬금 드웨인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논쟁을 시작하는 석문식 의장과 무명 진인. 그러나 이번에는 석 의장의 말이 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아무런 방어 수단 없이 저벅저벅 적을 향해 걸어가는 유진의 모습은 무모함 그 자체였다.
“남 회장이 움직이는데요! 유진 형님, 피하세요!”
콰과광!
당연히 남 회장의 손이 먼저 빛을 뿜었다. 팽달수가 서둘러 유진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애초에 그의 도움 따위에 좌우될 대결이 아니었다.
“콜록콜록.”
“이런 미친! 다들 괜찮으십니까?”
“너만 괜찮으면 다 괜찮아.”
“아, 그러네요. 유진 형님은요?”
“네가 괜찮은데 유진이 다쳤겠어?”
“그것도 그러네요. 그런데 오늘 무슨 기분 나쁜 일 있으세요? 오늘따라 무지 삐딱하시네.”
팽달수가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먼저 터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딴에는 나이 많은 석 의장과 무명 진인, 그리고 이제 가족이나 다름없는 드웨인을 챙기려는 행동이었다. 그런 마음을 전혀 모르는지 드웨인은 팽달수의 오지랖을 비꼬듯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내 장난감을 아직도 다른 놈이 가지고 놀고 있는데.”
“말은 바로 해야죠. 형님이 유진 형님 장난감이라면 몰라도 그 반대는 좀……. 유진 형님 애착 인형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장난감 선호도 1순위라고 자부했었는데 지금 뒤로 밀릴 것 같으니까 짜증 나시는 거잖아요. 맞죠?”
드웨이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조금 전과 다름없었다. 드웨인이 십 년을 하루 같이 따라다닌 유진이 다른 놈과 대결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보기 싫었던 터였다.
“어? 유진이 두 손을 들어 올렸어! 저건……!”
받은 만큼 되받아친 팽달수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딴소리를 늘어놓는 드웨인. 그런데 그 표정이 보통 심각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할 말 없으니까 딴소리하시기는……. 팔 들어 올린 게 뭐 대단한 거라고 그러세요. 주먹이라도 날리려나 보……? 어? 몸이 왜 이래?”
“몸이 떠오르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오호, 원시천존이시여!”
딴소리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모두의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팽달수는 물론 석 의장과 무명 진인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걸 다시 보게 되다니!”
“그러니까 이게 뭔데요?”
“마왕의 전희(前戲)!”
그러나 드웨인만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제법 그럴듯한 이름까지 붙여 둔 것을 보면 매번 가슴 아픈 오욕으로 남은 것일 터.
“전희? 제가 아는 그 전희 맞죠? 그래서 아까 안 느껴진다고 그런 겁니까? 아니지. 전희면 이제 막 달아오르기 시작한 건가? 역시 전직 마왕이라 그런지 취향도 무지 독특하시네요. 저런 악마 새끼가 어디가 매력적이라고…….”
“아니, 그냥 부르기를 그렇게 부른다고. 설마 유진이 쟤랑 뽀뽀하고 싶어서 이러겠니?”
“전희라고 그러시기에 오해했죠.”
“저… 저기 드웨인 처사, 그런데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떠 있어야 하는 건가?”
“유진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
시답잖은 농담이 잠시 오가고. 무명 진인이 조심스럽게 드웨인에게 말을 걸었다. 반말을 해야 할지 존댓말을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린 후였다.
마왕의 전희는 선택의 시간이었다. 다른 살아 있는 것들의 발이 다시 땅에 닿았을 때 여전히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그것이 바로 오늘 마왕의 살육 파티에 피를 흩뿌릴 희생양이었다.
“그럼 이게 오롯이 유진 처사만의 마력 때문이라는 건가?”
“단 한 사람의 마력이 이렇게 강하다니!”
“설마 우리까지 한꺼번에 공격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거야 모르지. 그게 누구든 유진의 심기를 거스른 것들은 다시 땅을 딛게 놔두지 않았으니까. 잘 생각해봐. 혹시 평소 유진한테 밉보인 적은 없는지.”
드웨인의 두 눈이 왠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마왕의 전희 때문으로 보였다.
예전의 마왕 유진이라면 남 회장뿐만 아니라 그 어느 것도 다시 땅을 밟게 하지 않았을 터. 드웨인은 제발 유진의 살기가 남 회장에게만 향하기를 빌었다. 마왕이라는 과거의 그늘을 벗어 버린 줄 알았던 오랜 친구가 다시 어둠 속으로 침잠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그런 눈빛이었다.
***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어! 이게 정말 가능하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많이 놀란 것은 역시 유진을 바로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남태현 회장이었다. 게다가 유진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이미 그의 육신을 수없이 가르고 벤 그것이었다.
“적잖이 놀란 모양이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내려놓지 못해!”
“내가 말했잖아. 진짜 마력이 뭔지 보여주겠다고.”
“말도 안 돼! 마력만으로 이런 위력을 낼 수 있는 존재는 이 지구상에 없어! 도대체 무슨 사술을 쓴 거지? 무슨 속임수를 쓴 거냐고!”
“속임수라……. 공중에서 그 목이 뽑혀 나가도 속임수라고 생각할지 궁금하네. 속임수인지 아닌지 바로 확인 시켜 줄까?”
너무 놀란 탓일까. 남 회장은 이 모든 것이 속임수라고 치부해 버렸다. 그것도 허무맹랑한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꼼수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반면 유진은 당장에라도 제 말을 증명해 보일 태세였다. 목소리 또한 확신에 차 있었다.
“잠… 잠깐! 도대체 너는 뭐야? 족발집 주방장 따위가 어떻게 이렇게 강할 수 있지?”
“그러는 너는? 너는 뭐 대단한 놈이었나?”
“나야……. 하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 설마 너도 랭크업의 방법을 알고 있는 건가? 그렇지? 역시 그런 거였어!”
치졸한 속임수일 것이라고 일축하고 싶었지만, 남 회장은 유진의 단호한 목소리와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대림동에서 보여준 모습만 놓고 보더라도 유진이 눈속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작아 보였다. 결국 결론은 하나. 남 회장은 자신의 방법과는 다를지 몰라도 유진 또한 랭크업의 벽을 깬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할 거면 왜 물어본 거야? 랭크업의 비밀… 알려 줄까?”
“원… 원하는 건 뭐든 말해 봐. 내가 뭐든지 다 갖다줄게. 정말이야.”
남 회장도 자신이 찾아낸 랭크업 방법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뿔이 돋고 팔이 자라난 상태가 아닌가.
그렇기에 곧바로 자세를 바꿔 유진에게 매달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공중으로 띄워 올린 이 가공할 마력만 보아도 유진의 랭크업 방법이 자신의 그것보다 뛰어나 보였다.
“부탁은 정중하게 해야지.”
‘일단 넘어왔다! 미련한 놈. 네놈이 어떻게 랭크업에 성공한 것인지만 알아내고 나면 바로 저세상으로 보내주마.’
단칼에 거절할 줄 알았던 유진이 여지를 내주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남 회장. 유진을 살려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던 그였다.
“달라는 게 무엇이든 모두 내어주겠소.”
“다른 것도 아니고 랭크업의 비밀을 가르쳐달라는 사람의 말투치고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데?”
“끙……. 원하시는 게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모두 내어 드리겠습니다.”
남 회장의 눈빛이 점점 더 비굴해졌다. 보다 안정적이고 강력한 랭크업 방법만 알아낼 수 있다면 이 정도 모욕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좀 들을 만하네. 그래, 뭘 내어줄 수 있는데?”
“예… 예? 돈을 드릴까요?”
“돈?”
“하하하. 랭크업의 비밀만 알려주신다면 제 전 재산이라도 내어드리겠습니다.”
“됐어.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어.”
돈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진즉 짐작한 바였다.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남 회장. 유진이 대가로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 그럼 뭘 원하십니까?”
“돈 말고 줄 수 있는 게 없어? 무지 많이 가진 것처럼 말하더니 별것도 없네. 그냥 맞자.”
“잠… 잠깐만요! 말씀만 하시면 그게 뭐든지 다 구해다 드리겠다지 않습니까? 정말입니다.”
“진짜? 진짜 뭐든지 다 내 앞에 가져다 놓겠다는 말이지?”
“예, 물론입니다. 랭크업의 비밀만 알려주신다면야…….”
못 내어 줄 것이 뭐가 있을까. 어차피 연구소장을 죽여 버린 지금 당장 마력 주사를 더 만들어내는 것도 어려웠다. 유진의 랭크업 방식을 제 것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자신의 패는 내어주려야 내어줄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이미 승자가 정해져 있는 거래라는 의미가 아닌가.
“뭐가 좋을까? 음……. 받고 싶은 게 하나 있기는 한데…….”
“말씀만 하십시오. 그게 무엇이든 전 세계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네 몸뚱이.”
“예… 예?”
진심이었다. 유진에게서 랭크업 방법만 알아낼 수 있다면 그 무엇이든 갖다 바칠 용의가 있었다. 그것이 남 회장 자신의 몸뚱이일 줄은 몰랐지만.
“네 몸뚱이라고. 아, 참! 그 똥내 나는 주둥이 달린 머리는 뽑아서 줘. 우리 백구한테 그런 상한 대가리를 먹이고 싶지는 않거든.”
“지… 지금까지 나를 우롱한 것이냐?”
이제야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 회장. 얼굴 근육이 죄다 씰룩거릴 정도로 화를 감추지 못했다.
“갖고 싶은 건 뭐든지 가져다주겠다며? 불쌍한 어린 애들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기더니 제 목숨 중한 줄은 아나 보네? 너 같은 폐기물 쓰레기는 재활용도 안 돼. 그냥 백구한테 몸 보시한다고 생각해. 그게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착한 일이야.”
“네 이놈!”
곧바로 남 회장의 네 팔이 바삐 움직였다. 그의 뿔만큼이나 시뻘건 핏빛 마력 덩어리들이 유진의 심장을 노렸다.
콰과과광!
“아무래도 직접 제 머리 뽑기는 힘들 테고 백구가 물어뜯는 것보다는 내가 대신 뽑아주는 게 낫겠지? 그게 또 은근히 뽑는 재미가 있거든.”
“내가 너 따위 놈한테 그리 쉽게 당할 것 같으냐!”
요란한 굉음이 무색하게 남 회장이 날린 마력 덩어리들을 간단히 쳐낸 유진. 그는 이제 시작이라는 듯 더 얄미운 표정으로 남 회장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응. 너도 점점 느껴질 텐데? 네 마력이 뒤죽박죽이라는 거 말이야. 넌 어차피 내 손에 죽어. 지금 나한테 그렇게 미친 듯이 소리 지를 게 아니라 한 번에 고통 없이 죽여 달라고 사정해야 할 때라고.”
“내… 내가 남태현이라는 사실을 잊었나?”
“혹시 내 이름은 아니? 잊었을까 봐서 말해주는데 내 이름은 유진이야. 한때 내가 왜 마왕으로 불렸는지 말해 줬나?”
점점 유진의 손에 맺힌 마력이 더 밝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왕의 전희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