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남태현 회장에 이어 유진마저 떠나간 대림동 게이트 앞. 여전히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좀 서두르면 안 되겠나?”
“먹고 죽은 몬스터가 마정석도 크다는 말 몰라? 이것만 먹고.”
“벌써 네 개째니까 하는 말이지! 어찌 그리 일의 경중을 따지지 못하는 건가?”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러니까 먼저 가라고! 누가 같이 가자고 그랬나.”
바쁘게 게이트 앞을 정리하는 사람들은 관리국 직원들이었다. 관리국장 기주경은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이 게이트를 차지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각성자 특수전단장 표호철 단장 또한 감격에 겨운 표정이었다.
반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석문식 의장과 무명 진인이 그들이었다. 처참한 현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느긋하게 아이스크림을 음미하고 있는 드웨인 덕에 이들은 원치 않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네. 무명, 우리라도 먼저 가보자고. 어서!”
“우리끼리 움직이는 건 아무래도 위험해 보이는데……. 아까 자네도 당하지 않았나? 남 회장은 이제 더는 사람이 아니야. 악귀라고.”
“그러니 반드시 우리가 가봐야 한다는 것 아닌가. 남태현 그자는 분명 마력 주사를 더 맞으려고 할 거야. 그러면 그 젊은이 혼자서는 무리일 수도 있어.”
“우리가 간들 무슨 도움이 되겠나? 저 친구라면 몰라도.”
“…….”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저 말문이 막힐 정도로 바보 같은 표정의 드웨인이 필요했다. 아이스크림 막대마저 핥아 없애 버릴 기세로 혀를 놀리고 있는 저 벽안의 금발 청년이라면 몰라도 석문식 의장이나 무명 진인 모두 괴물로 변해 버린 남태현 회장과 그를 떡 주무르듯 가지고 노는 유진 사이에 낄 틈은 없어 보였다.
후르릅.
석문식 의장과 무명 진인이 옆에서 뭐라고 하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혓바닥을 할짝거리는 드웨인.
“형님, 인간적으로 막대기는 이제 그만 빨아 드셔도 되는 거 아닙니까?”
“원래 끝물이 맛있는 거야.”
“끝물이 남아 있기는 합니까? 지금 무지 변태 같은 거 아세요?”
“변태? 그게 뭔데?”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팽달수가 나섰다. 유진을 따라가던 그를 굳이 잡아 세워놓고서 한다는 짓이 바로 저 아이스크림 막대기 애무였다.
쿠르르릉.
그때 잔뜩 찌푸려져 있던 모두의 표정이 달라졌다. 별안간 지축을 흔든 마력파 때문이었다.
“오우씨! 방금 느끼셨습니까?”
“오호, 원시천존이시여! 이런 기운을 뿜어낼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니……! 유진 처사가 드디어 움직인 모양이야.”
“유진 처사? 아까 그 젊은이 말인가? 놀랍군. 이게 정말 사람의 몸으로 뿜어낸 기운이란 말인가!”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바닥이 출렁이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저 멀리 여의도 방면을 향했다. 남 회장과 유진이 향한 곳이었다.
대한민국 최강으로 군림해 온 석문식 의장조차 얼어붙게 만든 엄청난 마력파. 무명 진인도 그것이 유진의 것이리라 짐작했다.
“이 정도로 놀라시기는. 제 생각인데 이건 유진 형님이 아니라 백구 기운일 거예요.”
“백구? 강아지 말인가? 강아지가 어떻게……?”
“백구가 그냥 강아지로 보이셨어요? 천하에 석문식 의장님도 별거 없네요. 백구 정체도 못 알아보시고.”
“그게 무슨 말이지? 정체라니? 그 강아지가 몬스터라도 된다는 말……! 설마 정말 몬스터라는 건가?”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팽달수는 이 기운의 주인이 유진이 아니라 백구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결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석문식 의장.
“몬스터도 보통 몬스터가 아니죠. 남 회장 정도야 눈 깜짝할 새에 개똥으로 만들어 버릴 무시무시한 몬스터라고요. 그래서 유진 형님이 부리나케 뒤쫓아 간 거죠. 들어야 할 대답들이 많은데 백구가 그새 남 회장을 먹어 치울까 봐서요.”
“헛소리! 내 이제껏 저렇게 압도적인 마력을 뿜어내는 몬스터는 본 적이 없네!”
“당연히 본 적이 없죠. 봤으면 여기 안 계실 테니까.”
“…….”
석문식 의장은 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A 등급 각성자, 그것도 랭크업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A 등급 각성자를 순식간에 집어삼킬 수 있는 몬스터라니. 이제껏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이 실제 존재한다는 것 아닌가.
“그럼 저 형님은요? 맨손바닥으로 남태현 회장 싸대기 날리는 거 같이 보셨잖아요? A 등급 각성자 뺨을 그렇게 마력도 두르지 않고 후려칠 수 있는 사람 본 적 있으세요?”
“없… 없지.”
“저 형님 오른뺨에 생긴 저 흉터를 바로 백구가 만들어 준 겁니다.”
“저… 정말인가?”
“의심스러우시면 직접 물어보세요.”
여전히 불신 가득한 표정인 석 의장을 위해 팽달수가 설명을 이어갔다. 드웨인의 무위는 이미 다 같이 확인한바. 그런 그의 뺨에 저런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 사실이라면 그 앙증맞은 강아지가 전대미문의 몬스터라는 말 또한 사실일지도 몰랐다.
“그럼 유진이라는 젊은이의 경지는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거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진 형님 앞에서는 백구도 그냥 귀여운 강아지일 뿐이죠. 제 주인의 진짜 능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까 저렇게 개 취급당하면서 따라다니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진짜 괴물을 못 알아봤군.”
“알아본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건드리지도 못할 텐데요.”
“…….”
석문식 의장은 이내 다시 할 말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과장이 섞인 것일 터. 으레 영웅담은 부풀려지기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차원이 달랐다. 팽달수의 말이 절반만, 아니 절반의 절반만 사실이라고 해도 족발집 주방장 유진은 실로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여야 했다.
“뭐해? 안 가고. 꼼지락거리다가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고 말 거야.”
“마침 아이스크림도 다 드셨네요. 그런데 형님은 백구가 사람 잡아먹는 게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저는 볼 때마다 지린다고요.”
“누가 그거 구경하겠다고 했어?”
“그럼 무슨 구경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싸움 구경.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거든. 이건 백구 기운이 아니야. 유진 것도 아니고.”
“그럼 설마 이 엄청난 기운이 남태현 그자의 것이라는 말인가?”
“이름은 모르겠고 아까 그 기분 나쁘게 생긴 녀석 기운인 건 확실해.”
“랭크업에 성공했다는 게 사실이었어!”
그러나 이제껏 감탄한 것이 무색하게도 이 강력한 마력파의 근원지는 남태현 회장이었다. 석문식 의장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오늘만 벌써 세 번씩이나 예상치 못한 경지를 보여준 남태현이었다. 이전의 두 번과 달리 이번 세 번째 경지는 의심할 바 없는 새로운 경지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네.”
“이상하다니요? 자꾸 궁금하게 만들지 말고 바로바로 그냥 말해주시면 안 됩니까?”
“분명 그자의 기운이기는 한데 사람의 것이 아니야.”
“그게 말입니까? 방귀입니까? 남 회장이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사람의 기운을 사람의 것이라 부르지 못하는……! 그럼 설마 남 회장이 사람이 아닌 겁니까? 어쩐지 소름 끼치게 웃는 게 백구가 밥 먹기 전에 짓는 표정하고 똑같았다니까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이건 마치…….”
“마치 뭐요?”
“이게 가능할 줄은 몰랐는데…….”
드웨인의 설명이 멈추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 아마도 뭔가 말할 것이 남은 모양이었다.
“저 친구 뭐라는 건가?”
“몰라요, 저도. 아이스크림 급하게 먹고 뒷골 당겨서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연신 중얼거리는 드웨인의 모습에 무명 진인이 서둘러 팽달수에게 그 뜻을 물었다. 중얼거리는 드웨인의 말을 못 알아듣기는 팽달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이상하다니까.”
“아이스크림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응.”
“그럼 진짜네.”
확실히 말은 안 했지만, 뭔가 미심쩍은 점이 있어 보였다. 드웨인이 아이스크림을 걸 정도라면 이건 확신에 가까웠다.
***
같은 시각 여의도 마탄 빌딩 지하연구소의 상황은 급박했다.
“으아아악!”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는 남태현 회장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기운이 워낙 센 탓에 이미 게이트가 반쯤 열린 상태였다. 폭주하는 그의 기운이 그대로 게이트 밖으로 넘쳐흘렀다. 이대로 간다면 게이트 브레이크로 이어질 터.
“소… 소장님, 회장님 상태가 이상합니다!”
“변이야! 인간이 몬스터처럼 변이를 일으키다니……!”
게이트 안에 마련된 마력 주사 보관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태현 회장의 몸이 기괴하게 변해갔다. 바닥에는 텅 빈 세 개의 마력 주사가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오늘 하루에만 총 다섯 개의 마력 주사를 맞은 셈이었다.
부작용이 바로 드러났다. 피부가 들끓는 것도 모자라 골격마저 뒤틀리고 있었다. 영락없는 불완전 변이의 모습이었다.
“소장님! 당장 주사기를 뽑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터져 죽고 말 거라고요!”
“그냥 두게. 우리가 저 괴물 때문에 무슨 짓까지 저질렀는지 벌써 있었나? 차라리 잘 된 거야. 이제 여기서 멈출 수 있을 테니까.”
당장 남 회장의 심장에 꽂힌 마력 주사를 뽑아 버리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연구소장은 그 의견을 일언지하에 묵살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변이의 양상으로 보아 이제 곧 남 회장은 사방으로 살점을 날리며 터져 버릴 터였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연구소장의 눈동자에 너무 늦었다는 회한과 까닭 모를 연민이 서렸다.
“여기는 내가 처리하지.”
“처리하시겠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저 괴물을 소멸시킬 생각이야. 변이 중인 지금이 유일한 기회일세.”
“비상 소멸 버튼을 누르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남 회장이 불완전 변이 과정을 견뎌낸다면 그야말로 괴물이 탄생하고 말 터. 그는 보관실 내에 비상사태가 발생할 것에 대비해 설치해 둔 비상 소멸 장치를 작동시킬 생각이었다. 남 회장을 완전히 소멸 시켜 버리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상 소멸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작동시킨 적이 없습니다. 제대로 끝까지 움직일지도 미지수라고요.”
“그러니 누군가 한 명은 남아야겠지. 저 괴물의 끝을 지켜봐야 할 테니까.”
“소… 소장님!”
비상 소멸 장치는 사실 설치는 해두었지만, 써먹을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기관이었다. 온전히 기능을 발휘할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남아 장치가 올바르게 작동하는지 지켜봐야 했다.
애애앵.
연구소장은 지체 없이 비상 소멸 버튼을 눌렀다.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오 분.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연구를 위해 보관 중이던 실험체들은 풀려났을 것이다. 그리고 오 분 뒤에는 이곳 보관실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마저 사라진 후일 터.
“이제 모두 연구소 밖으로 나가게. 시간이 많지 않아.”
“그럼 소장님은요?”
“남태현 회장에게 마력 주사기의 개념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바로 날세. 나 또한 괴물이 되어 버린 거지. 마땅히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야.”
“여기서 남 회장과 함께 죽으시려고요?”
“그게 그동안 쌓은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연구소장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보였다. 그의 눈빛에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무고한 목숨을 숱하게 죽여가며 쌓은 악업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