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95화 (96/204)

<제95화>

“아버지! 남태현, 그만두지 못해! 당장 네놈 심장을 뽑아주마!”

압도적인 마력 차이에 별다른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짓이겨지는 석문식 의장. 사실 게이트 안에서 기운을 다 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궁지에 몰리지 않았을 터였다.

결국 보다 못한 석기현 이사가 부상당한 몸을 일으켜 저항해 보지만.

퍼버벅.

“잔챙이들은 제가 정리하죠.”

석기현 이사는 남 회장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천지맹 회월궁주 롱니가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절기인 비연각(飛蓮脚)이 연이어 석기현 이사의 몸 구석구석을 밟아주었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랫동안 꿈꿔왔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쿨럭.”

한 걸음, 한 걸음 석 의장을 향해 걸어가는 남태현 회장. 석문식 의장은 채 식지 않은 죽은피를 게워내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즐기고 싶어. 가장 먼저 양팔을 자르고 다리를 부러뜨린 후에 배를 꿰뚫어주지. 항상 나를 벌레처럼 바라보던 그 눈깔과 언제나 나를 조롱하던 그 혓바닥도 뽑아줄까? 이거 바쁘겠군. 하하하!”

드디어 남 회장이 걸음이 멈췄다. 마치 심판하듯 석문식 의장을 내려다보는 남 회장. 그가 오랫동안 그토록 바랐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천천히 남 회장의 손이 올라가고 곧 석문식 의장의 목숨이 끊어질 찰나.

“석 의장!”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석 의장님!”

구원군이 등장했다. 무명 진인 일행이 바로 그 순간 게이트를 빠져나온 것이었다. 기주경 국장과 표 단장은 몰골이 된 석문식 의장의 모습에 경악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석문식 의장이 저런 꼴을 당하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태현 회장이 고개를 돌렸다. 석문식 의장을 처단하기에 앞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마지막 눈엣가시인 무명 진인을 먼저 정리하려는 것 같았다.

“뭐… 뭐야? 벌써 나온 거야? 시간을 다 채우지도 않고 나왔네. 회장님, 무명 진인 일행이……! 헐! 저게 다 뭐야?”

“설마 저게 다 마정석은 아니겠죠?”

“맞는 거 같은데!”

무명 진인에 너무 주목한 탓일까. 남태현 회장은 기주경 국장과 표호철 단장이 끌고 나온 리어카를 제대로 보지 못한 눈치였다. 리어카를 가득 채운 마정석에 빌리 그레이엄 부문장과 클레어 팀장은 감탄사를 멈추지 못했다.

“때마침 잘 왔군. 지금 막 재미있는 걸 보여주려던 참이었거든.”

“남태현 이놈! 인두겁을 쓴 악귀 같으니라고! 어째서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이냐? 원시천존께서 너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하하! 원시천존이 어떤 놈인지 어디 한 번 데리고 와 봐. 이 늙은이처럼 만들어 줄 테니까.”

“진정 악귀로다, 악귀야. 내 비록 태상노존께 핵귀고요(劾鬼錮妖)의 권능을 부여받은 천제신사(天帝神師)는 아니나 너와 같은 악귀를 꾸짖고 제압하지 않는다면 어찌 도문(道門)에 든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늘 반드시 네놈의 혼백을 영영 인세(人世)에서 거둘 것이다!”

사실 남 회장도 마정석으로 가득 찬 리어카를 못 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정석을 수확하느라 기운을 다 뺐을 것을 감안해 더 자신만만하게 무명 진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너무 얼핏 본 탓일까.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리어카의 실린 마정석이 게이트에 남아 있던 나머지 몬스터 전부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마력 주사를 맞은 남 회장이라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

무명 진인과 남태현 회장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경지로 미루어 짐작컨대, 결과는 순식간에 결정될 가능성이 컸다. 모두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어떻게 저런 기운이 남아 있는 거지? 게다가 저 많은 마정석을 수확했는데도 저 정도라니……!”

“무명 진인의 마력이 저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부문장님.”

“석문식 의장이 아니라 무명 진인이 진짜 일인자였네. 와, 소름!”

빌리 부문장과 클레어 팀장의 말대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구도였다. 으레 석문식 의장이나 흑룡두 찐쩌리처럼 기진맥진한 상태로 게이트를 빠져나올 줄 알았던 무명 진인이 너무나도 쌩쌩했다.

남 회장이 마력 주사 덕에 마력을 단번에 끌어올렸지만, 무명 진인 또한 그 진정한 실력을 숨겨왔기에 이제 승부의 결과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아진 상태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모두의 입을 마르게 만들었다.

“태극혜검 제1식 황룡출수(黃龍出水)!”

그때 엄청난 풍압이 밀려왔다. 드디어 두 사람이 싸움을 시작한 것이었다. 먼저 손을 내지른 사람은 무명 진인이었다.

“태극혜검이야!”

“말도 안 돼! 무명 진인이 저렇게 강했단 말인가!”

황금빛 비늘을 두른 용이 검무(劍舞)를 추고 있었다. 태극문 장문인에게만 전승된다는 태극혜검이었다. 무명 진인과 직접 칼을 맞대본 사람은 단 셋뿐.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황룡이 그려내는 유려한 검로에 넋을 잃고 감탄사만 자아낼 뿐이었다.

챙.

“아… 아니, 어떻게……!”

“맨손으로 진인의 태극혜검을 막아냈어!”

“어떻게 맨손으로……!”

놀라움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태극문 무예의 정수라는 태극혜검이 너무나도 손쉽게 파훼 되는 모습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남태현 회장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였다. 맨손으로 그 대단하다는 태극혜검을 막아낸 것이 아닌가.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닐 텐데?”

승리를 직감한 것일까. 남 회장이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무명 진인을 비웃었다. 그리고 이내 오른발을 내지르는데.

퍽!

팡!

“진인!”

그의 발이 그대로 무명 진인의 복부에 꽂혔다. 그리고 이내 무명 진인이 엄청난 풍압과 함께 무려 10미터 이상을 날아가고 말았다. 기 국장이 애타게 그를 불러보지만, 무명 진인은 그대로 땅바닥을 굴러야 했다.

“발전이 없군. 아직도 이 고리타분한 검술뿐인가? 그동안 산속에 틀어박혀서 도대체 뭘 한 거야? 그나저나 이상하군. 어떻게 기운이 그대로지? 저따위 놈들만으로 A 등급 몬스터들을 상대했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무명 진인을 메다꽂은 자신감 때문일까. 한결 여유가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태현 회장. 문득 무명 진인의 기운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남태현, 자네가 어떻게……! 진짜 악귀들처럼 변이라도 일으킨 게냐?”

허무하게 한 방에 백기를 들 무명 진인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는 아직 팔팔했다.

그러나 그로서도 두려운 것이 하나 있었다. 남 회장의 기운이 결코 자신이 알던 그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마치 변이를 일으킨 몬스터들처럼 전과는 전혀 다른 맹렬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변이라니. 시골 노인네라 랭크업이라는 말을 아는지 모르겠군.”

“랭크업? 하늘이 네놈에게 그런 권능을 허락하셨을 리 없다!”

“십 년씩이나 수양을 했다는 도사가 간단한 세상 이치 하나 모르다니 우습군. 이 남태현이 곧 하늘이야, 하늘!”

애써 부정해보지만, 지금 남 회장의 모습은 감히 하늘을 칭할 만했다. 이제껏 석문식 의장, 무명 진인, 그리고 남 회장까지.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올라선 것만은 확실해 보였으니까.

“감히 하늘을 넘보다니! 옥황천존(玉皇天尊)을 대신해 네놈의 오만함을 꾸짖어주마.”

“그런 건 강한 자가 하는 거야. 당신처럼 죽을 날 기다리는 노인네가 하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희망을 버릴 무명 진인이 아니었다. 마력은 그저 거들 뿐. 승패는 간혹 의외의 것들에 의해서 정해지는 법이었다.

“양의신공이 뭔지 아느냐?”

“내가 알아야 하는 건가?”

“본디 대륙도문의 본향인 무당의 것으로 순양(純陽)과 순음(純陰)이 음정양동(陰靜陽動)을 통해 극태극(極太極)에 이르는…….”

무명 진인이 필살기를 꺼내 들었다. 바로 양의신공이었다. 그동안 깨달은 바가 없지 않았다. 무명 진인은 오늘 양의신공의 극의(極意)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요량이었다.

“훗! 노회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내가 하루 이틀 당신을 상대했던가? 숨이 가쁜 모양이지? 말이 많아진 것을 보니.”

“역시 보통이 아니야.”

물론 그 전에 숨부터 고르고.

“칭찬으로 듣지. 허튼 수작은 그만하고 들어오시지. 아니면 내가 끝내주고.”

“시간도 없는데 한방에 끝내주마. 서로 원하는 바 아니겠나?”

고오오오.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아낼 새도 없이 바로 기운을 끌어모으기 시작하는 무명 진인. 곧이어 그의 왼손에는 순양의 붉은 기운이, 그리고 오른손에는 순음의 푸른 기운이 깃들었다. 양손에 깃든 기운은 전보다 더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어떻게 양손에 서로 다른 기운을 담을 수 있는 거죠?”

“양… 양의신공! 저게 정말 무당(武當)의 양의신공이란 말인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대륙 무공을 기반으로 마력을 펼치는 흑룡두 찐쩌리와 회월궁주 롱니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에게 양의신공은 그야말로 전설 속 무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양의신공 제7식 교답승천(蛟龖昇天)!”

콰르릉!

드디어 무명 진인의 양손을 떠난 용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청룡과 적룡이 서로를 탐하듯 비늘을 맞대고 기운을 증폭시켰다.

하늘도 그 기운에 감응하듯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날아오른 두 마리 용이 마침내 하나가 된 그 순간.

콰광!

번쩍거리는 번개가 하늘을 찢어놓았다. 그러고는 이내 남 회장에게로 내리꽂히는데.

“회… 회장님!”

“회장님께서 이렇게 쓰러지실 리가 없어!”

“이걸로 끝인가? 무명 진인께서 이렇게 강하셨다니!”

“오우씨! 저건 좀 많이 아프겠다. 죽었겠죠, 드웨인 형님?”

사람이 받아낼 만한 공격이 아니었다. 모두의 눈에 당연히 승부는 여기서 끝날 것처럼 보였다. 몇 사람의 생각은 달랐지만.

“아니, 오히려 화만 돋운 것 같은데?”

잠시 뒤, 자욱하게 시야를 가리던 먼지가 차분히 가라앉자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동안 발톱을 잘도 숨기고 있었군.”

남 회장의 목소리였다. 방금 그 강맹한 공격을 받아낸 사람의 그것치고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살… 살아 있어? 양의신공을 정통으로 맞고도?”

“역시……!”

“교답승천을 막아내다니! 오호, 원시천존이시여! 어찌 저런 악귀를 낳으셨나이까!”

“기도는 저승에 가서 실컷 하라고. 곧 보내줄 테니까.”

이것으로 분위기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기세를 탄 남 회장이 당장 손을 뽑으려 했다.

“잠깐!”

“……?”

그때 무명 진인이 난데없이 남 회장을 멈춰 세웠다. 하도 뜬금없었기에 남 회장도 잠시 멀뚱히 무명 진인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석 의장, 이 사람아. 괜찮은가?”

“쿨럭. 역부족이야. 어서 피하게. 이놈은 내가 어떻게든 붙들고 있을 테니 어서 가.”

“내가 자네를 두고 어디를 가?”

“훗! 싸움은 포기했나 보지? 그나저나 노인네들 우정이 아주 눈물겹군. 외롭지 않게 나란히 목매달아 줄 테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이제 보니 석문식 의장과 마지막 석별의 정을 나누려는 모양이었다. 그것마저 용납하지 않기는 뭐했는지 남 회장도 이들의 마지막 시간을 굳이 막지 않았다.

“이것이 모두 원시천존의 뜻이로다!”

“그래, 그렇게 현실을 인정하는 편이 낫…….”

“유진 처사, 아무래도 저 악귀를 제압하는 것은 자네에게 양보하지. 대신 나는 저쪽을 맡겠네.”

전의를 잃고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려는 줄 알았던 무명 진인이 갑자기 누군가를 불러냈다. 유진이었다. 한창 진행 중이던 남 회장과의 싸움을 유진에게 떠넘기려는 눈치였다.

“나서기는 할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요? 질 것 같아서 그러시는 거 아니죠?”

“허허. 사람 참. 나를 뭐로 보고.”

갑자기 불려 나온 유진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 누구보다 황당한 사람은 남태현 회장이었다. 무슨 돼지 앞다리도 아니고. 족발집 주방장 따위에게 도매금으로 팔려가듯 난데없이 초라해진 본인 모습이 더욱 그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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