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89화 (90/204)

<제89화>

대림동 게이트 앞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기 직전 ‘가리봉 왕족발’ 앞. 예기치 못한 상황을 전해주기 위해 애써 가리봉까지 달려온 춘복과 함께 대림동 게이트로 향하던 유진 일행이 걸음을 멈췄다. 골목길에서 이들을 찾아온 것이 분명한 누군가와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만나보려던 참이었네. 이게 다 어떻게 된 건가?”

“그걸 왜 저한테 묻고 그러세요?”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자네밖에 더 있어? 속일 생각일랑 하지 말게.”

유진 일행을 멈춰세운 사람은 바로 태극문 무명 진인. 역시 그는 파군성의 주인을 의심하고 있었다. 대림동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뒤에 파군성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몬스터들 때문에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난 거 아닙니까? 한군데 모아놓으면 관리하기도 편하고 좋잖아요.”

“자네가 지금 무슨 사달을 일으킨 건지 알아! 몬스터 쫓다가 전쟁이 날 판국이라고!”

“그래서 지금 수습하러 가지 않습니까.”

사실 유진이나 무명 진인 모두 원하는 바는 같았다. 둘 다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하고자 했다. 물론 목적은 같을지 몰라도 꼬맹이들 싸움 말리러 가듯 여유로운 유진의 모습과 발을 동동 구르는 무명 진인의 그것이 극명한 대비를 보였다.

“수습? 가서 뭘 어쩌려고?”

“싸우지 말라고 타일러봐야죠.”

“만일 말로 해결이 안 되면?”

“그러면 뭐… 혼내야죠. 알아들을 때까지.”

역시나 유진은 느긋했다. 무려 세 명의 A 등급 각성자들이 숱한 B 등급 이하 수하들을 거느리고 대림동 게이트 앞에서 충돌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을 말로 타이르고 그래도 안 되면 혼내서라도 진정시킨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든가.

“싸움을 말리러 가는 게 아니라 몸이 근질거려서 가는 건 아닌가? 누가 파군성의 주인 아니랄까 봐. 그건 절대 안 되네. 내가 누차 말하지 않았나. 파괴와 혼돈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시작과 균형을 생각하라고. 자네의 그 파군성의 기운이 사람들의 수명을 갉아먹는 삼시충(三尸蟲)이 되는 그 순간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자네를 막아세울 거야.”

“아니, 말 안 듣는 놈들 좀 혼내주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이러십니까?”

“그 사람들이 어디 보통 사람들이냐고! 자네는 또 어떻고!”

유진으로서는 이대로 성질대로 밀어붙이다가는 무명 진인까지 다시 상대해야 할 판국이었다. 반면 무명 진인은 저들을 뜯어말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유진이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것도 그것 못지않게 중요했다. 파군성의 주인까지 가세한다면 오늘 세상은 정말 종말을 맞이하고 말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화도 낼 줄 아시네요.”

“미안하네. 못날 꼴을 보였군.”

“알았어요. 안 싸우면 될 거 아니에요.

“약속!”

“그 연세에 무슨 새끼손가락까지 걸면서 약속을 하세요?”

“도장!”

“엥?”

“복사! 싸인도 하고.”

“요즘 연애하세요? 어려도 너무 어린 분 만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다가 은팔찌 차요.”

“확실하게 해 두자는 거지.”

유진이 싸움에 얽히는 것을 막기 위해 확실히 다짐을 받아두려는 마음이 커서일까. 무명 진인은 부끄러운 것도 잊은 채 손자, 손녀들과 하던 그 방식 그대로 약속을 받아냈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의미였다.

“제가 잠자코 있는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물론 그럴 사람들이 아니지.”

“그럼 그냥 방관하시게요? 너무 무책임하신 거 아닙니까? 등선은 영영 못 하시겠네요.”

“걱정하지 말게. 자네 대신 내가 어떻게 해서든 말려볼 테니.”

“말릴 수 있었으면 진즉 말리셨겠죠.”

“…….

유진이 끼어드는 것만큼은 막아냈는지 모르지만, 사실 무명 진인으로서도 대림동 게이트 앞에 몰려든 자들을 아무 충돌 없이 돌려보낼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유진의 폐부를 찌르는 한마디에 무명 진인은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차라리 이렇게 하시죠.”

“어떻게?”

그런 무명 진인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이는 유진. 생각해둔 해결책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그게 가능할까?”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무명 진인의 모습으로 보아 성공을 자신할 만한 방법은 아닌 듯 보였다. 그렇다고 두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

다시 대림동 Y05S-17 게이트 앞.

부우우웅.

“아직 나눌 인사가 남았습니까?”

고오오오.

“결국 자네의 욕심이 자네 명줄을 재촉하는군.”

“마탄을 오늘 지워드리죠. 화련방의 이름으로 깨끗하게.”

팽팽한 긴장감이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무려 세 명의 A 등급 각성자들이 각자 마력을 끌어올린 채 개전(開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영등포는 오늘 밤 잿더미로 변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만! 당장 멈추지 못할까!”

그때 좌중을 압도하는 사자후가 울려 퍼졌다. 귀청이 찢어질 듯 커다란 소리에 모두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바로 고개를 돌린 사람은 석문식 의장과 흑룡두 찐쩌리, 그리고 남태현 회장 단 셋이었다. 이들은 남들과 달리 잠시 눈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컥! 도대체 누가 이런 엄청난 기운을 내뿜는 거지?”

“저… 저기를 좀 봐!”

엄청난 기운이 실린 사자후에 무릎을 꿇고 만 나머지 사람들도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두 손을 합장한 채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는 무명 진인이 있었다.

“오호, 원시천존이시여.”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여기 있는 구경꾼들을 모두 죽일 셈인가? 자네답지 않게 왜……?”

무명 진인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오랜 벗 석문식 의장이었다. 그가 아는 무명 진인은 평소 살초를 극도로 아꼈다. 그랬던 무명 진인이 내지른 사자후에 패도적인 기운이 가득 담겨 있었기에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게 그리 걱정되는 사람이 사람들 다 있는 여기에서 양손에 마력을 둘렀나? 당장 그 마력부터 거두시게. 흑룡두도 기운을 거두어주시오.”

“음…….”

일단 석 의장과 흑룡두 찐쩌리에게 마력을 거두라 청하는 무명 진인. 그러나 그들은 쉬이 마력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남태현 회장과 회월궁주 롱니가 먼저 마력을 거두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남 회장! 정녕 여기서 피를 볼 건가? 그러면 다 공멸이라는 걸 몰라서 이러는 게야?”

“재미있군요. 제가 순순히 그 말을 따를 거라고 생각하고 끼어든 겁니까? 이곳의 주인을 가릴 방법은 이 마력뿐입니다.”

남태현 회장도 역시 마력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명 진인은 물론 그 누가 오더라도 여기서 기필코 결판을 보겠다는 눈빛이었다. 회월궁주 롱니의 눈빛 또한 마찬가지. 이대로 무명 진인의 중재 노력이 허사가 되려던 찰나.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말로는 합의점을 찾기 힘들겠지. 그러니 자네 말대로 마력으로 주인을 가려보자고.”

“고상한 척은 혼자서 다 하더니 진인께서도 이곳이 욕심나시는 모양입니다? 암요, 도사도 사람 아닙니까? 이해합니다.”

“자네 말대로 나라고 사람 아니겠는가? 나도 내 몫을 챙겨야겠어.”

“하하하! 진짜 욕심쟁이는 따로 있었군요. 태극은 피해를 본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이익을 보지 말라는 법도 없지. 어차피 세상은 바로 이 마력의 논리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하하하! 이제 좀 솔직해지셨군요.”

무명 진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싸움을 말리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 또한 끼어달라는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덕업을 쌓아 신선이 되기 위해 평생을 정진해온 무명 진인이 내뱉은 말이기에 더욱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무명 진인의 모습에 남 회장은 오히려 신이 나 보였다. 방휼지쟁(蚌鷸之爭)이라고 했던가. 혹여 석 의장과 흑룡두 찐쩌리를 상대하느라 힘을 다 쓴 상황에서 멀뚱히 구경만 하던 태극문이 뒤를 치고 들어오는 것을 내심 걱정하고 있던 차였기 때문이었다.

“무명, 자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물론.”

“실망이군. 내 평생의 지기가 이렇게 타락하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오호, 원시천존이시여! 자네에게 나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한번 자문해 보시게.”

“음…….”

무명 진인의 대답에 할 말을 잃어버린 석문식 의장. 마치 무명 진인이 자신을 꾸짖기 위해 평생 수련하며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것 같아 석 의장은 마음이 더 착잡했다.

그렇다고 남태현 회장에게 모든 것을 양보할 수는 없었다. 무명 진인에게는 싸움을 말리는 것이 최선이라면 석 의장에게는 이 게이트가 남 회장의 손에 넘어가는 것만은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완전 개싸움이 되겠군요? 아주 흥미진진하겠습니다.”

“개싸움에도 규칙이 있어야 하는 법!”

“개싸움에 무슨 규칙 타령입니까?”

“마력은 게이트 안에서 겨루는 것으로 하세. 애먼 사람들까지 다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무명 진인도 이 진흙탕 싸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게이트 안에서 승부를 보자고 제안하는데.

“다 같이 죽자는 겁니까? 한 마리 제압하는 데에도 길드 전체가 매달려야 했던 놈들 옆에서 우리끼리 피터지게 싸우자니요?”

“왜? 겁나나? 그럼 언제든 물러서게. 비웃지 않을 터이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요? 내가 물러설 것 같습니까?”

“무명…….”

“보아하니 혼자 게이트에 들어가는 건 다들 겁나는 모양인데 다섯 명까지 팀을 꾸려 차례대로 들어가도록 하세. 시간은 한 팀당 삼십 분. 가장 많은 마정석을 수확하는 팀이 이기는 거야.”

규칙은 간단했다. 정해진 시간 내에 누가 더 많은 마정석을 수확해오느냐에 따라 승자를 결정하자는 것. 서로 기운을 뺄 것이 아니라 몬스터를 상대로 마력을 쏟아부으라는 말이었다. 전쟁도 막으면서 승패도 가릴 수 있는 나쁘지 않은 대안이었다. 역시 무명 진인다웠다.

“삼십 분이요? 다섯 명이서 삼십 분이라…… 누가 A 등급 몬스터들을 잘 피해 다니면서 B 등급 몬스터를 더 많이 잡느냐 싸움이 되겠군요. 좋습니다, 이 규칙 마음에 드는군요.”

“무승부를 만들 생각인가? 훗! 자네답군. 역시 내 친구 무명다워.”

“만약 결과가 무승부라면 당연히 모두 여기서 손을 떼는 걸세. 규칙은 규칙이니까.”

석 의장은 무명 진인이 내심 무승부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A 등급 각성자가 끼어 있다고 하여도 겨우 다섯 명이서 삼십 분만에 A 등급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모두 B 등급 몬스터를 사냥하다 시간을 다 소비할 터.

이것이 무명 진인의 싸움법이었다. 서로 피를 보지 않고도 모두를 결과에 승복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남 회장.”

“한 팀에 A 등급 각성자는 단 한 명뿐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래야 공평한 경쟁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때 남태현 회장이 하나의 규칙을 덧붙였다. 한 팀당 A 등급 각성자는 단 한 명이어야 한다는 것. 트리스타와 화련방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국면을 뒤집어 보려는 시도였다.

여기서 석 의장과 흑룡두 찐쩌리가 반발하고 나서면 무명 진인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 터. 모두의 시선이 석 의장과 흑룡두 찐쩌리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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