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86화 (87/204)

<제86화>

다음날. 다시 찾은 대림동 게이트는 처참했다.

“와, 혼자서 저 무시무시한 것들을 완전히 피떡을 만들어 놓으셨네! 도대체 누가 몬스터인 거야? 어떻게 내 주변에는 죄다 괴물들뿐이냐.”

“하여간 성질머리하고는. 그러니까 내가 쟤 앞에서 가족 얘기 꺼내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우리 드웨인, 그동안 쌓인 게 참 많았나 보다. 이것들을 모조리 한꺼번에 상대하려면 드웨인 수준에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결과는 드웨인의 압승이었다.

“깜빡했습니다, 형님. 하지만 제 탓만 하실 일은 아니라고요. 사실 따지고 보면 백구가 하필 눈치 없게 아이스크림 핥아 먹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잖아요.”

“둘 다 똑같아.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이제 어찌합니까, 형님? 재롱 잔치를 열 것이 아니라 동물 병원을 차려야겠는데요?”

마몬은 허리가 부러졌고 요르문간드는 혓바닥이 뽑혔다. 나머지 것들도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초주검 상태였다. 달수 말대로 병원이라도 차려야 할 판국이었다.

“며칠 지나면 금방 나을 거야. 그건 그렇고 얘들이 여기 있다는 걸 무슨 수로 소문을 내지? 줄 서서 뜀박질이라도 하고 오라고 할까? 우리가 직접 나서면 들킬지도 모르잖아?”

“그러다가 도망치면 어쩌려고요? 그냥 입 싼 애들 몇 놈 잡아다 놓고 재롱 잔치 사전 리허설 한 번 하시죠? 그러면 알아서 쫙 소문이 퍼질 겁니다.”

다행인 점은 이곳이 게이트 안이라는 사실이었다. 몬스터들은 외부에 있는 것보다 서너 배 빠른 속도로 회복될 터. 다급한 건 이것들이 여기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하는 것이었다.

“적당한 애들이라도 있어?”

“저번에 그 녀석들 어떠세요?”

“그 녀석들? 누구?”

“왜 있잖아요? 봉 여사 빚 받으러 왔던 촌놈들이요. 좀 모자라 보이는 것이 속이기도 쉬울 겁니다.”

“걔들을 지금 어디 가서 찾아?”

“요 근방에서 깝죽거리는 것 같던데요?”

“그래?”

소문의 생명은 역시 신빙성. 뭔가 진짜 같아야 소문에 발도 달리고 날개도 돋는 법이다. 그러자면 역시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제삼자를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때마침 적당한 녀석들이 있었다.

***

다음 날 저녁, 벌교 왕꼬막 파가 관리하는 영등포의 한 룸살롱 안.

“매상은 어뗘?”

“역시 서울이 다르기는 다른디요. 벌교하고는 자릿수가 달라분당께요.”

행동대장 장도리와 수하들은 벌써 며칠 전 겪은 치욕을 다 잊은 듯 보였다. 조직의 보스인 왕꼬막이 이들에게 맡긴 이곳 룸살롱의 매출이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암만, 그래야제. 그란디 어제부터 공연시 귓구녕이 근지럽다냐?”

“아따, 어떤 느자구 없는 것들이 우리 형님 야그를 허벌나게 하는갑네.”

“혹시 접때 그 잡것들 아니여?”

“그 족발집 놈들 말씀이어라?”

그러나 역시 사내 가슴에 난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는 법. 장도리는 이내 족발집 놈들을 떠올렸다. 받은 것을 기필코 열 배, 백 배로 돌려주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장도리의 눈동자에 묻어났다.

아픈 기억을 떠올리자 장도리는 벌교 대표 술안주인 꼬막무침에 식도를 찌르르 타고 올라오는 알싸한 소주 한 잔이 당겼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벌교 사내가 인생을 곱씹는 방식이었다.

“그랴, 낯짝에 개지름이 번질번질하던 그 맴생이 같이 생긴 놈들 말이여. 그때 나가 부상만 아니었으면 그놈들 대그빡에 빵꾸를 내주었을 것인디. 으미, 고 잡것들 때문에 술맛만 떨어졌네. 아야, 근처에 어디 포장마차 없다냐? 술은 역시 포장마차에서 마셔야제.”

사실 티눈이라는 심각한 부상만 아니었다면 그의 노루발 장도리가 족발집 녀석들 머리통에 박혀 들었을 터. 달걀이나 까서 바치는 아픈 기억 따위는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형님, 안 그려도 지가 쪼매 전에 봐둔 디가 있당께요. 바로 모시것어라.”

“아까 뭣땀시 안 보이나 혔더니 그런 기특헌 거시기를 했어야. 싸게싸게 가보드라고.”

그렇게 아픔을 공유하는 장도리와 짱뚱어, 그리고 호롱이가 룸살롱을 나섰다.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형님들이 그들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모른 채.

***

같은 시각, 청와대 상춘재(常春齋). 송형준 대통령은 일부러 영빈관이 아닌 이곳 상춘재에서 만찬을 열기로 했다. 딱딱한 영빈관 접견실이 아니라 비공식적인 접견이 주로 열리는 이곳에서 좀 더 바짝 상대에게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바쁘실 텐데 모두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통령님.”

좁지 않은 상춘재 안에 원형 테이블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곳에 둘러앉은 이는 총 다섯 사람.

송 대통령의 인사에 비교적 연장자로 보이는 두 사람이 먼저 화답했다. 한 사람은 순백의 도복(道服)을 입은 것만 보아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바로 태극문 장문인인 무명 진인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지난 십 년간 대한민국 최강의 각성자로 군림해 온 트리스타 석문식 의장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이곳 청와대에 이들이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실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무슨 일로 우리를 부른 겁니까?”

반면 퉁명스럽게 분위기를 흐리는 또 한 사람. 마탄의 남태현 회장이었다. 송 대통령의 인사를 쌀쌀맞게 받아치는 남 회장이 못마땅한 듯 맞은편에 앉은 국가 몬스터 관리국 기주경 국장이 눈을 흘겼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지금은 국가 비상사태입니다. 트리스타나 마탄을 비롯한 내로라하는 길드가 관리하는 게이트들에서 연이어 의문의 브레이크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없어진 몬스터들은 도무지 종적을 찾을 수가 없고 말입니다.”

진즉 이런 자리가 필요했다. 이름 좀 들어봤다는 굵직굵직한 길드들이 하나같이 같은 일을 겪고 있었다. 게이트 브레이크 이후 보스 몬스터가 사라지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줄을 이은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단 한 곳 태극문만을 제외하고.

“그래서 어쩌자는 거죠?”

“혼란을 틈타 외국계 길드들까지 판을 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훗! 곳간을 도둑맞은 건 나인데 오히려 나더러 도와 달라고 하다니……. 무능한 것도 모자라 뻔뻔하기까지 하군요.”

“말씀을 가려서 하세요, 남 회장!”

남 회장은 송 대통령의 요청에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바로 앞이라는 사실을 잊기라도 한 듯 모욕적인 언행까지 서슴지 않았다. 결국 기주경 국장이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력은 뒤질지 몰라도 기백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다.

“착각하지 말라고. 능력도 없이 까부는 건 용기가 아니라 무모하고 무책임한 거야. 자네 때문에 여기서 참혹한 일이라도 벌어지면 되겠어?”

“……!”

그러나 기주경 국장은 이내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남 회장은 정말 그런 짓을 벌이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오호, 원시천존이시여! 남 회장, 그만하시게. 여기가 청와대라는 사실을 잊었나?”

“그러고 보니까 태극만 피해가 없더군요. 진인께서 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남 회장의 날카로운 비수가 이번에는 무명 진인에게로 향했다. 마탄으로서는 당연히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길드를 할퀴고 간 마수가 오직 태극문만은 피해 갔기 때문이었다.

“원시천존께서 보살피신 게지. 왜? 이참에 자네도 나와 함께 마니산으로 가 도사라도 되어볼 텐가? 고기반찬은 못 내어주더라도 내 특별히 전망 좋은 전각에서 지낼 수 있도록 신경 써 주겠네.”

“그럴 게 아니라 차라리 이 후배가 직접 지금 당장 등선시켜 드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전혀 주저함 없이 무명 진인을 도발하는 남 회장. 반응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정말 이번 일과 태극이 관련되어 있다면 평소와는 다른 미묘한 변화라도 있을 터.

“남 회장, 적당히 하게. 더는 들어주기 힘들군.”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선배님 심기를 건드렸군요.”

“내 충고 하나 하지. 꼬일 대로 꼬인 자네 심성이 결국 자네마저 집어삼키고 말 거야.”

어느새 상춘재 안은 살얼음판으로 변해 있었다. 석문식 의장까지 끼어들면서 날 선 언쟁이 전쟁의 불씨를 댕기기 직전이었다.

“하하하!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이번에는 제가 두 분께 완전히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 한마디는 꼭 해야겠군요. 저는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입니다.”

“따질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게. 어린애처럼 애먼 곳에서 징징대지 말고.”

“훗! 곧 그럴 날이 오겠죠.”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세 사람이 모이면 으레 이런 식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남 회장은 내심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석 의장이 혹여 본인보다 먼저 랭크업의 비밀에 다가선 것이 아닌지 의심했던 그였다. 그랬기에 석 의장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이자 안도한 것이었다.

“대통령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급히 보셔야 할 것이 있어서…….”

“뭔데 그러나?”

“이걸 좀 보십시오.”

그때 청와대 비서실장이 다급하게 대통령을 찾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상춘재 안에 마련된 TV 화면을 켜는데…….

[ 긴급속보입니다! 지금 제가 나와 있는 곳은 영등포 대림동 Y05S-17 게이트 앞입니다. 저희 KBC가 단독 입수한 제보에 따르면 그동안 연이어 발생한 의문의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 이후 사라진 A 등급 몬스터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 아닐 수 없는데요. 바로 지금 제보 내용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촬영용 로봇을 게이트 안으로 들여보낼 예정입니다. 지금부터 로봇이 전해오는 화면을 생중계로 전해드릴 텐데요. 동시에 제보자와 인터뷰를 나누면서… (중략) …. ]

오늘 만찬에 참석한 이들 모두가 알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방금 해결되었다. 사라진 몬스터들의 행방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것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고?”

“저… 저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뭔가 이상합니다. 같은 등급의 보스 몬스터들이 동일한 게이트를 공유한 사례는 이제껏 없었습니다. 저럴 리가 없는데…….”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말입니까?”

“하위 몬스터만이 무리 생활을 합니다. 모여 있어야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이죠. 당연히 등급이 올라갈수록 혼자 일정 구역을 독차지하려는 습성이 강합니다. 생태계의 여느 최상위 포식자들처럼 말입니다. 몬스터에게 양보나 공유의 미덕 같은 건 기대하기 힘들죠.”

송 대통령의 질문에 기주경 국장이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보스 몬스터. 말 그대로 게이트 전체를 지배하는 먹이사슬 가장 꼭대기에 올라 서 있는 몬스터를 의미한다. 그런 보스 몬스터가 한 게이트에 둘일 수는 없는 법.

어떻게 모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모습을 감춘 A 등급 몬스터 세 마리와 B 등급 다섯 마리가 그새 서열 정리를 마쳤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랬다면 당연히 경쟁에서 밀려난 나머지들은 여전히 보스 몬스터로 살아갈 수 있는 제 구역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그럼 가짜뉴스라는 말입니까?”

“그거야 확인해보면 알 수 있을 테죠. 사상 초유의 사태인 만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지금 당장 촬영을 중단시켜야 합니다!”

이번에는 석 의장이 대신 설명을 이어갔다.

몬스터들은 아직 단 한 마리도 예전 게이트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촬영을 한답시고 몬스터들을 자극하기라도 한다면 보스 몬스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나머지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혹여 서열 정리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언제든 게이트 브레이크가 발생할 수 있을 터. 한 번 보스 몬스터가 되어 본 것들이 그 맛을 잊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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