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저 애가 맞아?”
“예, 맞습니다.”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데?”
“분명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 아이가 확실합니다.”
세단 뒷자리 상석에 천지맹 회월궁주 롱니가 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이제 그녀의 사람이 되어 버린 마봉춘이 흥분한 모습으로 차창 밖 진주를 가리켰다.
“궁주님, 데리고 올까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수하가 롱니의 의중을 물었다. 그들은 지금 가리봉 고등학교 정문 앞에 차를 세운 채 짙은 썬팅지가 덧씌워진 차창 뒤에 숨어 진주를 훔쳐보고 있었다. 애 하나 잡아간다고 해서 이들을 저지할 만한 능력이 있는 자가 있을 리 만무한 곳이었다.
“지… 지금은 안 됩니다, 궁주님!”
“안 되다니? 왜? 옆에 저 외국인이 바로 ‘그놈’인가?”
“아니요. 그게 아니라…….”
서둘러 이들을 저지하는 마봉춘. 진주의 옆에 드웨인이 있었다. 그러나 마봉춘은 드웨인을 알지 못했다. 드웨인을 만나기 전에 이미 유진에게 박살이 나 가리봉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면 왜?”
“저 개새끼요. 저 똥개 새끼 말입니다.”
“똥개? 저 강아지 말이야?”
“저게 보통 똥개가 아니라고요. ‘그놈’처럼 마력 측정기를 터뜨린 녀석이라니까요.”
마봉춘을 머뭇거리게 한 존재는 바로 진주와 드웨인 사이에서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는 백구였다. 악몽 같았던 그날 저 똥개가 분명 ‘그놈’과 함께 있었다.
“아직도 그 소리야? 사내가 그리 간이 작아서야…….”
“제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마력 측정기를 켜보면 알 것 아닙니까?”
“훗! 켜보나 마나……!”
퍽!
속는 셈 치고 마력 측정기를 켜보는 롱니. 그녀의 실소를 비웃든 마력 측정기는 단 일 초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
차 안에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 그것 보십시오! 어서 피해야 합니다!”
마봉춘은 잊고 싶은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난 듯 진저리치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롱니와 그 수하도 할 말을 잊은 채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궁주님. 한국산으로 준비한다는 것이 그만…….”
“하여간 우리 대륙산 물건 중에서 유독 이 마력 계측기 하나만큼은 한국 제품들 품질을 따라가지 못한다니까.”
그러나 그들은 이내 다시 마봉춘의 절규를 일축해 버렸다. 마력 측정기를 터뜨려 버릴 정도의 똥개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마력 측정기가 중국산 짝퉁이라서 터진 게 아니라고요! 안 피하실 거면 제발 저라도 보내주십시오. 죽을 때 죽더라도 개밥 신세가 되기는 싫으니까.”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전율하기 시작하는 마봉춘. 혼자라도 살겠다며 당장 차 문을 열고 도망칠 기세였다.
“한국 사내들은 다 네 녀석처럼 겁쟁이인가 보지? 네 말대로라면 저 똥개가 이제껏 단 한 번도 출현한 적 없는 S 등급 몬스터라도 된다는 거잖아? 훗! 저깟 똥개 한 마리 어쩌지 못하고 벌벌 떠는 것도 모자라 그런 망상에까지 사로잡혀 있다니. 생각해보라고. 그렇게 대단한 똥개라면 우리 기운을 벌써 느꼈을 테지. 안 그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었다. 롱니는 이미 마봉춘의 말을 호들갑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다.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한……! 오우씨!”
“궁… 궁주님! 저기……!”
“뭐야? 갑자기 왜……! 헉!”
그러나 그것도 잠시. 롱니를 비롯한 모두가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차창 밖에서 암캐 똥구멍이나 핥고 다닐 법한 그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똥개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B 등급 각성자인 내가 그깟 똥개 새끼 때문에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아무래도 요즘 너무 무리한 모양이야.’
결국 롱니 궁주 일행은 빈손으로 인천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들은 이곳으로 오는 내내 서로 말이 없었다. 마치 금기어라도 되는 것처럼 똥개에 관한 말을 애써 꺼내려 하지 않았다.
“궁주님, 일단 영등포 쪽에 거점을 마련하는 일부터 시작하시죠. ‘그 아이’를 손에 넣는 일은 잠시 보류하시고요. 어차피 당분간은 마탄과 손을 잡은 척해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마봉춘이 한 그 실없는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정신 차려. ‘그 아이’가 정말 랭크업의 비밀을 풀어줄 단서라면 지금 세력 확장이 문제겠어?”
일단 영등포 쪽에 집중하자는 수하의 말에 발끈하는 롱니. 똥개 한 마리 때문에 바짝 긴장한 수하를 다그치기까지 했다. 역시 냉철하고 이성적인 그녀다운 대처였다.
“그게 사실이라는 확실한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궁주님께서도 아까 살짝 긴장하셨던 것 같던데…….”
“내… 내가? 내가 언제 긴장했다고 그래?”
그러나 그녀의 냉정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폐부를 찌르는 수하의 한마디에 버럭 화를 내며 평정심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고 만 것이다.
“아… 아닙니다. 제가 주제도 모르고 궁주님 앞에서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오래 살고 싶으면 그 입을 조심해. 이렇게 용서해 주는 건 이번 단 한 번뿐이야.”
멋쩍은 듯 더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수하의 실수를 덮어주는 롱니. 진짜 억울했다면 그녀의 절기인 비련각(飛蓮脚)을 벌써 펼쳐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궁주님. 그런데 정말 ‘그 아이’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마봉춘의 말대로 그 애가 정말 랭크업에 관한 모든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명확한 물증도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그 아이’를 건드렸다가는 자칫 마탄과의 동맹만 깨질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 힘만으로 화련방을 상대해야 합니다. 마탄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요.”
“우리 계획에는 변함이 없어.”
“그럼 진짜 이대로 그 족발집으로 쳐들어가시겠다고요? 정말 거기 ‘그놈’이 있다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마력을 가늠할 수 없는 경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똥개도 진짜 보통 똥개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 넘어오기 전 천지맹주로부터 밀명을 받고 온 롱니였다. 천지맹이 사백 년이나 이어온 회맹까지 깨뜨릴 각오로 마탄과의 연합을 허락한 이유는 단순히 화련방을 넘어서려는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목적은 한국에서 확보한 랭크업에 관한 첩보 때문이었다. 마탄 남태현 회장이 랭크업에 관한 실마리를 찾았다는 첩보였다. 그것만 가로챌 수 있다면 화련방이 문제가 아니었다.
“맹주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야. 이래도 머뭇거릴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맹주님께서는 ‘그놈’이나 그 똥개에 관해 아직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일단 맹주님께 보고를 드리고 지시를 기다리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래야 맹주님 옆에 달라붙어 온갖 아부로 연명하는 장로들도 궁주님을 함부로 음해하지 못할 것 아닙니까?”
수하의 지적도 일리는 있었다. 랭크업에 관한 단서를 찾는다고 해서 곧바로 마력을 기하급수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지도 미지수였다. 이런 상황에 화련방은 물론 마탄까지 적으로 돌리는 무리수를 두는 것은 명백한 패착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마탄 남 회장이 먼저 ‘그 아이’를 가로채면 어쩌려고?”
“생각해보십시오. 남 회장이 아직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건 무슨 사정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놈’이 정말 마탄 남 회장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괴물이든지, 아니면 랭크업에 관한 첩보가 모두 거짓이든지 말입니다.”
“음…….”
결국 수하의 설득에 못 이겨 장고에 빠지고만 롱니. 그녀는 오늘 보았던 그 똥개의 잔인하리만큼 차가운 표정을 다시 떠올렸다.
***
반면 그 시각 드웨인 일행은 한참이 지나서야 ‘가리봉 왕족발’에 돌아왔는데.
“뭐야?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진주 배고프겠다.”
“모처럼 바게스트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느라.”
“내가 진주 데리고 오라고 그랬지 백구랑 멍멍거리면서 놀다 오라고 그랬어?”
가는 길에 백구 산책이나 시키라며 소스라치게 싫어하는 드웨인의 품에 백구를 안겨준 것이 유진이었다. 그런 유진이 대뜸 면박부터 주자 드웨인은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맺힐 지경이었다.
“드웨인 삼촌한테 너무 그러지 마. 나는 드웨인 삼촌하고 백구가 한결 친해진 것 같아서 좋던데 왜?”
“며칠이나 가나 보자. 얼른 들어가서 손 씻고 나와. 저녁 먹게 어머니도 모시고 나오고. 봉 여사! 밥 먹자!”
고생스레 자신을 데리러 왔다가 꾸지람까지 듣고만 드웨인이 불쌍해 보였는지 진주가 유진을 만류했다. 유진은 찔끔거리는 드웨인은 안중에도 없는지 한마디를 더 쏘아붙였다.
서둘러 늦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유진. 홀 한쪽에서는 단골손님인 가리봉 삼총사 아저씨들이 새로운 술친구를 찾고 있었다.
“어? 어서 많이 본 양반이네. 맨날 뉴스에서 비 맞고 다니던 그 기자 양반 아닌가?”
“맞습니다.”
“유명한 양반이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소?”
“애이, 이 사람아. 달수 총각이 저기 있잖아. 달수 총각 취재하러 왔겠지.”
“아닙니다. 아직 오픈 전일 때 헛걸음한 적이 있어서 꼭 한 번 다시 와보고 싶었거든요. 때마침 근처에 취재차 왔다가 들른 겁니다. 다행히 오늘은 족발 맛을 볼 수 있겠네요.”
오늘 아저씨들의 표적이 된 사람은 꽤 익숙한 얼굴의 인물이었다. 유진이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팽달수와 생방송 인터뷰를 했던 바로 그 KBC 기자였다.
“여기 족발이 진짜 기막히게 맛있다우. 아니, 그것보다 기자 양반한테 내 하나만 물어봅시다. 도대체 일기 예보는 왜 맨날 틀리는 거요?”
“글쎄요. 날씨라는 게 워낙 급변하다 보니 아무리 슈퍼컴퓨터를 이용해서 계산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예측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리고 몇 해 전부터 기상청이 아니라 관리국 출입 기자로 일하고 있어서 딱히 더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그러네요.”
“관리국? 우리가 아는 그 관리국 말이야?”
“예.”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더는 그에게 날씨 이야기를 묻지 않았지만, 아저씨들의 뇌리에는 아직 그가 날씨 전문 기자로 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뜬금없는 일기 예보 이야기에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고 보니까 요즘은 일기 예보 때 통 볼 수 없더라고. 그런데 그 소문이 사실인가?”
“무슨 소문이요?”
“아니, 대림동 차이나타운 말이야. 범이 없으면 여우가 왕이라고 중국 애들이 사라지니까 요즘은 온갖 것들이 다 와서 설쳐댄다면서?”
“그게 정말이야?”
“대림동에서 옷감집하는 왕 서방 알지? 그 화교 친구 말이야. 그 친구가 그러더라니까. 며칠 전에 막걸리 한잔하면서 얼마나 하소연을 하든지 불쌍해서 못 봐주겠더라고.”
요즘 가리봉 일대가 시끌벅적했다. 인근 대림동 때문이었다. 대림동 차이나타운이 아비규환이 되면서 이곳 가리봉마저 그리될까 봐 우려하는 것이었다.
“그럼 이왕 이리된 거 관리국에서 직접 관리하는 게 낫지 않아? 거기가 난장판이 되면 여기까지 시끄러울 거라고.”
“관리국이 인력난에 시달린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서 아마 그건 힘들 겁니다. 그런데 걱정스럽기는 하더라고요. 제보에 따르면 경기권에 있는 동남아 조직들은 물론 지방 주먹들까지 전부 영등포를 노리는 모양이더라고요. 기존 주인이었던 화련방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아마 당분간 시끄럽기는 할 겁니다.”
기자의 말처럼 영등포는 그야말로 대혼란을 겪고 있었다. 서로 영등포를 차지하겠다고 날뛰고 있는 상황. 압도적인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당분간 영등포 전국시대는 계속될 터였다.
“우리도 무슨 방법을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손 놓고 있다가 까딱 잘못하면 내 나라 내 땅에서 외국 놈들한테 세금 내고 살게 생겼어.”
“여기는 달수가 있잖아요. 뭘 그리 걱정하고 그러세요?”
“아, 그렇지! 우리한테는 구로 천사가 있었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걱정하던 아저씨들 앞으로 유진이 일부러 팽달수를 데리고 나왔다. 구로 천사 팽달수가 이들 모두를 지켜줄 것이라고 약속하듯이.
“여기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누가 감히 여기를 넘보겠습니까?”
팽달수도 자신만만한 듯 호언장담하며 아저씨들을 안심시켰다. 그러고는 유진과 드웨인, 백구를 차례대로 쳐다보았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듬직한 표정을 지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