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손발은 자유로워졌지만, 여전히 안대를 두른 채였다. 마봉춘은 겁에 질려 차마 안대를 건드리지도 못했다.
‘도대체 누구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살기등등하던 마탄 놈들마저 단숨에 제압한 여인이었다. 아직 자신을 살려둔 것을 보면 분명 원하는 게 있다는 의미였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희는 그냥 잔심부름꾼일 뿐입니다.”
일단 다시 목숨부터 구걸하고 보는 마봉춘.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저희를 왜……?”
“마탄에서 그쪽을 백방으로 열심히 찾고 있던데 그 이유가 뭐죠?”
‘뭐야? 트리스타 쪽인가? 아니면 태극문? 괜히 입 잘못 놀리면 끝장인데.’
여인은 마봉춘과 마탄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다. 가구공장에 관해 알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살고자 한다면 당장 모든 것을 실토해야 했지만, 마봉춘은 일단 숨을 골랐다. 가구공장에 관한 이야기가 자신을 살릴 패인지, 아니면 죽일 패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봉춘의 대답은 이 여인이 누구이냐에 따라 달라질 터. 그의 생사 또한 여인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일단 여인의 정체부터 알아야 했다.
“억지로 입을 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살려주겠다는 건가?’
의외로 여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주춤거리는 마봉춘을 몰아세우려는 뜻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나려던 찰나.
퍼벅.
쾅!
“윽!”
둔중한 타격음에 이어 누군가를 바닥에 메다꽂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마봉춘과 함께 끌려온 수하일 터.
오판이었다. 여인은 말과 달리 빨리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었다. 눈이 가려 앞을 볼 수 없는 상태. 마봉춘의 공포는 더욱 커졌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하세요.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여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마봉춘의 귓전을 때렸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사내의 마음을 녹이는 부드러운 그 목소리 속에 칼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터.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목소리가 마봉춘을 더욱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런 쌍! 일단 살고 보자.’
“다 말하겠습니다! 원하는 건 다 말해 줄 테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마봉춘은 결국 입을 열기로 결심했다. 만일 지금 이 모든 것이 그를 시험하기 위한 마탄의 계략이라면 마봉춘은 영영 빛을 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다시 묻죠. 왜 마탄이 잔심부름꾼일 뿐인 당신들을 그렇게 애타게 찾는 거죠?”
“가… 가구공장 때문입니다.”
“가구공장? 내가 아는 그 가구공장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뭘 뜻하는 거죠?”
마봉춘의 입에서 드디어 가구공장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다행히 여인은 전혀 예상 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미끼부대로 끌려온 애들을 가구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 가구들을 공급해주는 일을 했고요.”
“미끼부대라는 말을 놔두고 왜 따로 가구라고 부르죠?”
“그건…….”
이제부터가 핵심이었다. 마봉춘은 순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말해도 될까? 마탄이 나를 시험하는 것일 수도 있어. 아니지, 마탄이라면 나를 벌써 죽였을 거야. 아이, 미치겠네.’
여인이 마탄 쪽 인물이라면 여기서 더 입을 벌리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반대로 트리스타와 같이 마탄에 적대적인 세력에서 보낸 자라면 반드시 입을 열려고 들 터였다.
퍼벅.
쾅!
“으악!”
다시 들려오는 비명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는 마봉춘. 그는 금세 지금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끼부대지만 미끼부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끼부대지만 미끼부대가 아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죠?”
“그 애들을 게이트에 끌고 들어가려고 데리고 온 게 아니니까요.”
“레이드에 써먹을 게 아니라면 왜 미끼부대를 끌고 온 건가요?”
“우리는 그저 저들이 시키는 대로 미끼부대 놈들 몸에 강제로 마력을 주입해서 공급했을 뿐입니다.”
결국 버틸 수 없음을 깨달은 마봉춘이 모든 것을 실토하고 마는데……. 여인의 일관된 반응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마봉춘. 여인은 가구공장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일반인 몸에 강제로 마력을 주입했다고요? 그게 말이 되나요? 기껏 잡아 온 미끼부대를 죽이는 거잖아요?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죠?”
“거기까지는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다만 마탄에서 정해준 대로 마력을 강제로 주입해서 살아남은 애들만 넘겨달라고 했습니다. 데이터와 함께요.”
“살아남은 애들이 있다는 말인가요?”
“있었죠. 단 한 명이었지만.”
그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가구공장에서 살아서 나간 단 한 명의 아이. 마탄이 애타고 찾고 있는 것은 마봉춘이 아니라 바로 그 아이였다.
***
인천 차이나타운 모처. 천지맹 회월궁주 롱니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금 마봉춘에게서 들은 한 아이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마탄 비서실 차 비서를 토막 내어 군산 앞바다에 흩뿌려 버리고 마봉춘을 빼돌린 장본인이 놀랍게도 천지맹 회월궁주 롱니였던 것이다.
“왜 각성자도 아닌 아이들을 데려다가 강제로 마력을 주입한 걸까?”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궁주님? 아까운 마력을 왜 다른 사람 몸에 불어넣는다는 겁니까? 그래 봤자 죽을 텐데요?”
“분명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잖아. 게다가 도망까지 쳤다면…….”
“멀쩡하다는 뜻이겠죠. 강제로 주입된 마력을 버텨냈다면 설마……!”
“각성했겠지.”
“그럼 일반인을 마음대로 각성시킬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신이 따로 없군.”
실로 엄청난 이야기였다. 아무런 마력도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강제로 각성을 시켰다는 말이 아닌가. 성공률만 높일 수 있다면 각성자를 원하는 대로 찍어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겨우 한 명입니다. 그 많은 마력을 쏟아부어서 하급 각성자 하나 건져봤자 어디에 쓰겠습니까?”
“미련하기는.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야.”
“예?”
“한 번 각성한 마력 수준은 불변이라는 것이 이제까지의 통설이었지. 하지만 일반인에게 마력을 불어넣어서 인위적으로 각성시킬 수 있다면 이미 각성한 각성자에게도 더 많은 마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뜻 아니겠나?”
“그… 그건 랭크업이 아닙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 각성자의 마력 수준 또한 마음먹은 대로 높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껏 모두가 신의 영역이라고 여겨왔던 랭크업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선 시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 랭크업. 남 회장은 지금 랭크업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는 것이 분명해. 아니, 이미 성공했는지도 모르지.”
“그럼 어째서 우리를 끌어들인 걸까요?”
“잔칫상은 푸짐할수록 좋은 법이니까.”
남 회장의 숨은 의중이 무엇이든 아직 완벽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이 엄청난 실험에 천지맹을 끌어들인 것일 터. 모든 것이 마무리될 때까지 진흙탕 싸움을 만들어 시간을 벌어보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당장 맹주께 보고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어.”
“마봉춘이 말한 ‘그 아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반드시 우리가 차지해야 해. 남 회장 손에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이 거대한 서사의 시작은 바로 ‘그 아이’였다. 마봉춘의 가구공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그 아이.
“‘그놈’은 어떻게 할까요? 마봉춘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력 측정기로도 그 마력 수준을 가늠할 수 없는 실력자가 아닙니까?”
“겁먹고 허둥대다 보니 뭘 착각했겠지. 마력 측정기를 터뜨릴 만한 고수라면 우리가 아직 모를 리가 있을까?”
“하긴, 그렇네요.”
랭크업에 관한 모든 단서를 쥐고 있는 ‘그 아이’에 집중하느라 롱니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마봉춘이 언급한 믿지 못할 또 다른 존재, ‘그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긴 것이었다.
***
다음날 오후, 가리봉 고등학교 정문 앞. 오늘은 드웨인이 진주를 마중 나왔다. 새로운 아르바이트생 봉 여사 덕에 한결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게 된 드웨인이 자청한 일이었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다가 유진에게 쫓겨날 것을 염려한 예방 조처인 셈.
“우리가 이렇게 둘이서 사이좋게 산책을 다 하다니. 이건 정말 아리아스 대륙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는데……. 훗! 인생이 참 재미있군.”
“…….”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에 서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드웨인.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너도 알겠지만, 아주 오랫동안 너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지. 너도 내 가족을 앗아간 그놈들과 다를 바 없는, 아니 그 이상의 존재였으니까.”
“…….”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어. 그런데 말이야. 요즘 좀 기분이 이상해.”
“…….”
드웨인이 넌지시 속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그동안 이곳에서 지내면서 심경 변화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마왕도, 몬스터도 나 같은 인간하고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 아니, 어떨 때는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더군. 이곳은 마왕보다 더 악랄하고 몬스터보다 더 역겨운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까. 아리아스 대륙도 그랬던 걸까?”
“…….”
“이제는 헷갈리기까지 한다니까. 인간이 과연 카렌 신께 선택받은 존재가 맞는지 말이야. 심지어 죄책감까지 느껴져. 내가 신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죽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과연 이게 맞는 것인지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이 무서워. 나도 이제 악의 무리가 된 걸까?”
“…….”
고백치고는 너무나도 파격적인 고백이었다. 정의의 사도, 카렌 신의 사자라는 드웨인의 신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너와의 결투를 포기했다는 건 아니야. 네 목숨은 내거니까 아무 데서나 죽지 말라고. 하하하! 그래도 떠들고 나니까 좀 개운하네. 너라면 내 마음을 이해해줄 줄 알았거든.”
“…….”
그러나 상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드웨인이 쏟아놓은 이야기가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일까.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해.”
“그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거 아니야, 아들. 저리 돌아서 가자.”
졸지에 노랑머리 동네 바보 형 꼴이 된 드웨인을 길 가던 한 꼬마가 이상한 듯 바라보았다. 아이 엄마는 다급하게 아이와 함께 멀리 피해 돌아가는데.
“왈왈!”
“그래, 바게스트. 그런데 저 사람들은 왜 저러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드디어 솔직한 드웨인의 고백에 화답하는 상대. 애석하게도 상대는 ‘왈왈’, ‘끼응’ 말고는 달리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백구였다.
“드웨인 삼촌! 오늘은 유진 삼촌 대신 삼촌이 왔구나? 그것도 백구랑 같이? 백구랑 화해 한 거야?”
“화해는 무슨. 우리가 언제 서로 삐치기라도 했나? 사내들끼리는 그런 거 없어.”
“어쨌거나 삼촌하고 백구가 둘이 같이 있으니까 진짜 보기 좋다. 얼른 가자. 나 배고파.”
그렇게 진주와 함께 다시 ‘가리봉 왕족발’로 발걸음을 옮기는 드웨인과 백구. 이들은 길 건너편에 세워진 시커먼 세단 속에서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