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77화 (78/204)

<제77화>

점심시간을 갓 넘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목욕탕이 북적거렸다. 손님들 대부분은 이곳 가리봉 주민들. 간혹 외지인들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저것들이 맞는가?”

“저그 저 대그빡 훤한 놈이 접때 우덜이 방심하고 있을 때 비겁하게 달려든 그놈이 확실하구만유. 웬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드만…….”

“얼래? 저 대그빡 훤한 놈은 어서 많이 본 거 같은 낯짝인디? 어서봤드라……. 아무튼 나만 믿으라고. 나가 누구여?”

“벌교 왕꼬막파 행동대장 장도리 형님이지라.”

탈의실 한편에서 구수한 사투리가 들려왔다. 팽달수에게 당한 것이 분해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가리봉에 머물고 있던 짱뚱어와 호롱이, 그리고 이들이 특별히 불러올린 벌교 왕꼬막파 행동대장 장도리가 그들이었다.

“근디 저놈들 쪽수가 우덜이랑 같은디요?”

“벌교 왕꼬막파가 언제 쪽수로 싸우당가? 저것들쯤은 이 한짝 손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니께.”

라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드는 장도리. 철모르고 날뛰던 어린 시절, ‘똘팍’ 소리를 들을 때부터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노루발 장도리였다.

애병을 뒤에 숨긴 채 팽달수 일행을 뒤따라 탕 안으로 들어서는 장도리 무리.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벗고 있었기에 장도리 일행은 팽달수와 유진, 드웨인의 나신을 그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옴매! 이놈은 도대체 정체가 뭐여? 족발집 배달부가 우짜서 온몸을 문신으로 도배했당가?’

장도리의 눈에 팽달수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온몸에 빈틈 하나 없이 가득 찬 문신이 자연스레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팔뚝에 소심하게 그려 넣은 자신의 노루발 장도리 문양을 무의식적으로 가리고야 마는 장도리.

‘아니제. 나가 누구여? 벌교에서 주먹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장도리여. 이깟 아그들 낙서에 쫄 장도리가 아니제.’

그러나 장도리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요즘은 돈만 주면 누구나 그려 넣을 수 있는 것이 문신 아니든가. 그렇게 다시 뒤에 숨긴 노루발 장도리를 꽉 움켜쥐는데…….

‘헉! 저짝 놈은 또 뭐여? 노랑머리 외국인 아니여? 근디 뭔 상처가 저러코롬 많당가! 저게 사람이여, 짐승이여?’

전력도 살필 겸 두 번째 놈을 살피는 장도리. 이번에는 그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상처투성이인 두 번째 놈의 몸뚱이 때문이었다. 그저 상처라고 부르기에는 미안할 법한 상상을 초월하는 상처들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심지어 오른쪽 뺨에까지.

‘나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여? 빨간 약 바르면 그만인 상처 몇 개 있다고 다 주먹은 아니잖여? 안 그려?’

장도리는 점점 생각이 많아졌다. 애써 잡다한 것들을 자문하며 기세를 끌어올려 보려고 했지만…….

‘으미! 저게 사람 거시기여? 완전 괴물 새끼네!’

탕 안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세 번째 녀석의 나신을 확인한 장도리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야 말았다.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녀석의 아랫도리 때문이었다. 이내 움츠러들고 마는 장도리. 자고로 남자들의 목욕탕 서열은 아랫도리로 결정되는 법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짱뚱어와 호롱이, 애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어렵게 쌓아 올린 벌교 장도리의 신화는 허물어져 내릴 터.

“처음에는 겁나더니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형님.”

“그래, 그게 별거 아니라니까. ‘야’하고 부른 다음에, ‘휙’ 달려가서, 대가리를 그냥 ‘빡’ 때리면 끝이야. 두개골이 으깨질 때 은근히 쾌감 느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요. 그 맛을 이제 알았다니까요.”

“목소리는 좀 낮춰. 우리가 그 고기 먹는 거 알면 다들 놀랄 거라고.”

장도리는 연장을 뒤에 숨긴 채 엉거주춤 온탕으로 들어가 녀석들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바로 머리통을 찧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신’과 ‘대물’의 대화가 예사롭지 않았다. 두개골을 으깨면서 쾌감을 느낀다? 게다가 그 고기를 먹기까지?

‘으미, 잘못 걸려도 옴팡지게 잘못 걸렸구마이. 이것들 식인계 귀환자들인갑네. 우짜쓰까이. 이럴 때는 후딱 튀는 게 상책이여. 암만.’

드디어 장도리가 상대의 정체를 알아낸 모양이었다. 사람의 살점을 육포처럼 씹어 먹는다는 식인계 귀환자들. 그들이 아니고서는 저런 살벌한 대화를 예삿일처럼 떠들어댈 자들이 없었다.

“우짜 여그 가만 기신다요?”

“쫌만 기둘려 보드라고. 다 때가 있는 법이니께.”

주저하는 장도리의 옆으로 다가와 귓속말로 그를 닦달하는 짱뚱어와 호롱이. 행여 팽달수에게 얼굴을 들킬까 봐 조심하는 모습이 영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한 방에 잡은 것보다 차근차근 때려죽인 놈이 더 맛있던데. 한참 두드려 패야 고기가 연해지는 것도 있지만, 살겠다고 매달려서 한참 버둥대야 핏물이 쪽 빠져서 비린내가 안 나거든.”

“아, 맞다! 얼마 전에 촐싹대다가 두 마리 놓친 거 아십니까? 한 놈은 퉁퉁한 것이 비계가 먹기 좋게 붙어 있었거든요. 족발이나 보쌈용으로 딱 좋아 보였는데. 다른 한 놈은 삐쩍 마르기는 했어도 단단해 보이는 게 통구이로 좋을 것 같았고요.”

다행히 짱뚱어와 호롱이를 못 알아본 것인지 팽달수 일행의 대화가 이어졌다. 엉겁결에 그들도 장도리와 함께 온탕에 나란히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 마는데.

“저… 저거 설마 우덜 이야기는 아니것지라?”

호롱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짱뚱어에게 조용히 물었다. 보쌈용, 통구이로 제격이었다는 저 대화 속 ‘두 마리’가 자신들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 시상에 사람 고기 먹는 놈들이 어디 있다고 그랴. 별것도 아닌 것들이 괜히 똥 폼 잡는 거라니께. 안 그렇습니까, 형님?”

“헉! 조용히 혀! 언능 나가자고.”

듣다 못 한 짱뚱어가 호기를 부렸다. 그때 마침 ‘대물’ 녀석이 힐끗 장도리 일행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혹여 자신들이 속삭이는 말을 알아들은 것은 아닌지 놀라 서둘러 짱뚱어의 입을 막고 보는 장도리. 서둘러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식구도 늘었고 두 마리로는 모자라. 다음에는 한 마리 더 잡아 와. 앞다리 실한 놈으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놈들 분명 어디 멀리 못 갔을 겁니다. 나머지 한 마리가 문제인데…….”

살금살금 문 쪽으로 다가가던 장도리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의 허벅지를 먹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대물’ 녀석의 눈동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신’ 녀석마저 덩달아 고개를 돌려 장도리를 바라보았다.

미끄덩.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 자리에서 벌러덩 넘어지고 만 장도리.

“어? 그때 그놈들이잖아. 오늘은 둘이 아니라 세 마리네?”

이제야 그들을 알아본 ‘문신’ 대머리가 ‘마리’로 그들의 머릿수를 셌다. 마치 당장에라도 뜯어먹을 닭 모가지를 세듯이. 장도리 일행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야 말았다.

***

오래된 TV가 정면으로 보이는 목욕탕 안 탈의실 평상 앞.

“이번에는 삶아 먹을까? 아니면 볶아 먹을까?”

“지져서 드시죠. 저는 개인적으로 그게 제일 맛있던데.”

“그럼 그럴까?”

이놈들이 봉 여사를 노렸다던 그놈들인 모양이었다. 두서없이 그린 문신만 보아도 시골 양아치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헙! 시키는 것이라믄 뭐든 하것구만유. 그라니께 지발…….”

굳이 고향이 어딘지 묻지 않아도 될 법한 어투까지.

“삶은 달걀은 잘 까냐?”

“예……? 고거슨 으째서……?”

“아니, 영 입이 심심한 게 뭐라도 좀 벗겨 먹어야겠는데…….”

“언능 까 드리것어라. 아야 뭐허냐? 싸게싸게 까덜 않고.”

덜덜 떠는 것이 코뿔멧돼지를 두고 나눈 우리 대화를 오해 한 모양이었다. 놀려 먹는 맛이 쏠쏠했다. 봉 여사를 그간 괴롭혔던 게 괘씸해서 좀 더 골려주기로 했다. 이 정도면 천사지.

“나는 꽝꽝 언 게 좋은데. 녹여 먹는 맛이 일품이거든.”

“얘는 그냥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사다 줘.”

눈치 없는 것으로는 아리아스 대륙에서 첫 손에 꼽히던 드웨인도 감을 잡았는지 거침없이 맞장구를 쳐댔다. 아마 이 녀석들은 우리가 사람인지 몬스터인지 헷갈릴 터. 사람을 벗겨 먹고 얼려 먹는다는데 겁먹지 않을 리가 있나.

“에이! 제대로 안 깔래? 달걀 껍데기가 그대로 남아 있잖아! 그냥 확 살가죽을 벗겨 버릴라.”

“……!”

달수 녀석은 다리를 쩍 벌린 채 당장 털을 뽑아 버릴 삼계탕용 닭을 잡듯 녀석들을 몰아세웠다. 일전에 이들 중 두 녀석을 본인이 혼자 해치운 것을 나름대로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봉 여사가 갚아야 할 돈이 얼마라고?”

“됐… 됐구만유. 다 받은셈 치것구만유.”

삶은 달걀도 얻어먹은 김에 봉 여사 빚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해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이놈들도 미련을 두지 않을 터. 봉 여사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받을 건 받아야지. 남은 게 얼마인데?”

“참… 참말로 그라지 않으셔도 되는디……. 대략 육천 정도구만유.”

육천만 원이라. 이런 난세에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시골 처자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거금이 분명했다.

“육천? 겨우 육천이야? 그런데 그게 원래 원금은 얼마였는데?”

“고거시…….”

“괜찮으니까 말해봐.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지 할매 약값 한다고 꿔간 돈이 원래 오백이어라.”

“봉 여사 말로는 원금에 이자까지 다 갚았다던데 불과 1년 새에 이자가 육천씩이나 더 붙은 거야? 너희들 좀 심하기는 했다. 안 그래?”

“그라니께 다 갚은 것으로 혀고…….”

원금 오백을 가지고 일 년 새 육천을 뜯어먹는 이런 놈들이 세상에 넘쳐나는 세상이었지만, 아무도 이들을 막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이었으니까.

“그거 내가 대신 다 갚아줄게. 그럼 다시는 봉 여사 귀찮게 하지 않는 거다?”

“참… 참말이어라?”

“그렇다니까 그러네. 나가자마자 바로 줄게.”

“형님, 바보 천치도 아니고 딱 봐도 안 갚아도 되는 돈을 왜 갚습니까?”

“그래도 빚진 게 있으면 갚아야지. 안 그래?”

“고거슨 고렇기는 하지만서도…….”

따지고 보면 얘들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꿔준 돈 받겠다고 그 먼 벌교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게 아닌가.

“형님! 그냥 저한테 맡기시라니까요. 그냥 싹 다 손모가지를 잘라서…….”

“너는 신용 사회도 모르냐? 믿고 빌려준 사람이 무슨 죄야? 갚을 건 갚아야지. 그럼 봉 여사 문제는 해결됐고 이제 우리 문제에 관해서 좀 얘기해 볼까?”

신용 사회의 필수 덕목은 바로 나를 믿어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것. 빚을 졌으면 갚는 게 맞는 이치였다.

“우덜 문제라니요?”

“너희들도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할 거 아니야.”

“지들이 무슨 빚은 졌다고 그러시는 건지……?”

“방금 손목 날아가게 생긴 거 내가 구해줬잖아. 손목 값으로 각자 오천씩만 내놔. 왜? 그냥 손목 자를까?”

그러니 나도 갚을 걸 갚았으니 응당 받을 걸 받아야 했다.

“예? 시상에 그런 억지가 어디 있다요?”

“시간 간다. 이제 이자도 받아야겠네. 딱 너희들이 받은 만큼만 받을게. 원금 오백에 일 년 이자가 육천이었으니까 한 달이면 딱 원금만큼이네. 계산 복잡하니까 그냥 싸게 일억씩으로 하자.”

이자율은 딱 갚은 만큼만. 이게 바로 신용 사회지.

“유진! 정말 이럴 거야?”

“드웨인, 넌 왜?”

“불만 없게 계산은 깔끔하게 해야지. 아이스크림 값은 빼줘.”

“아, 그러네. 삶은 달걀 값도 빼야겠다. 달걀하고 아이스크림 값으로 넉넉잡고 만오천 원 빼준다고 치면… 한 사람당 구천구백구십구만오천 원씩 내놓으면 되겠네. 언제까지 갚을래? 이자가 만만치 않으니까 빨리 갚는 게 좋을 거야.”

확실히 드웨인이 정의의 사도가 맞기는 한 모양이었다. 계산이 아주 빈틈이 없네. 그런데 아이스크림하고 삶은 달걀 값으로 너무 많이 깎아줬나? 좋은 일 한 셈 치지 뭐.

***

그 시각 마봉춘 일행은 안대로 눈이 가려진 채 어딘가에 매달려 있었다.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와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비릿한 생선 냄새가 이곳이 바닷가 근처임을 알려 주었다.

“형님, 여기가 도대체 어디입니까? 저희 다 이대로 죽는 겁니까? 이게 다 그 마탄 놈들 때문이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처음부터 마탄과 가까이 지내지 마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안 닥칠래? 징징거리지 말고 살아나갈 궁리나 하라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중국으로 밀항하려다 마탄 놈들에게 공격당했고 그때 누군가가 나타나 자신들을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저벅저벅.

그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살… 살려 주십시오.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마봉춘은 이때다 싶어 애걸복걸 목숨을 구걸했다. 안대를 낀 상태였기에 상대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풀어줘.”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여성이 그들을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군산항에서 마탄 놈들을 너무나도 손쉽게 제압했던 바로 그 여인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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