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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 마왕족발-70화 (71/204)

<제70화>

며칠 뒤 바다 건너 중국 상해. 오랜 역사를 품은 저택 이화원(李花園)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젖어 들고 있었다.

이화원은 화련방의 태생지. 4백여 년 전 이 저택에서 화련방이 탄생했다. 영욕의 세월이 오롯이 담긴 만큼 저택의 크기 또한 상상을 불허했다. 대도시인 상해 한가운데 이렇게 고즈넉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 크기를 역으로 짐작하게 했다.

“메이링(美齡)은?”

“수색 중입니다만 아직…….”

이화원 정중앙에 있는 넓은 연못 위에 세워진 누각인 앙산당(仰山堂). 이곳에서 바라보는 맞은편 석숭산(石崇山)의 모습은 가히 절경이었었다. 어찌나 정교한지 비에 젖은 석숭산은 그것이 인공적으로 쌓아 올린 석산(石山)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였다.

“마탄의 짓이 확실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서울지부에서 의뢰받은 청부 건에 마탄이 개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름다운 풍광에 어울리지 않게 앙산당 안 분위기는 침울했다. 불과 얼마 전 서울지부가 습격을 당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코웃음을 치며 넘어갔었다. 덜떨어진 하룻강아지가 주제도 모르고 설쳐댄 것이리라 여기고 가볍게 넘긴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단순한 습격 정도가 아니었다. 방주의 딸 리메이링과 사위 주거펑은 물론 서울지부 소속 식구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마도 증거를 없애기 위해 야산에 묻어버렸든지 바닷속에 수장시켰을 가능성이 컸다.

“고작 청부 건 하나 때문에 마탄 따위가 감히 내 딸을 묻어버렸다?”

화련방 19대 방주 리자오밍(李兆銘)은 아직도 딸 부부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삼합회 내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는 천지맹(天地盟)이나 사해방(四海幇)도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짓이었다. 그렇기에 전혀 은원이 없던 마탄이 이런 짓을 벌였다는 사실이 더욱 믿기 힘들 수밖에.

서울지부만 놓고 보자면 마탄보다 열세인 것은 사실이지만, 화련방은 결코 작은 조직이 아니었다. 이곳 상해 본방을 비롯해 중국 각지에 퍼져 있는 지부들까지 합치면 마탄의 열 배는 족히 넘을 규모였다.

그렇다고 마탄 남태현 회장이 그 모든 열세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을 뽐내는 것도 아니었다. 화련방주 리자오밍은 마탄이 도대체 뭘 믿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인지 황당할 따름이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믿는 구석? 회맹 내 다른 계파가 연루되었다는 뜻인가?”

“현재로서는 배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들이 감히!”

분명한 것은 마탄이 단독으로 벌일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만약 천지맹이나 사해방이 연루되어 있다면 화련방으로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자네가 좀 더 상세히 알아봐. 저들이 진짜 관여한 것인지 말이야.”

“혹여 회맹 내 세력들과 무관하다면 어찌할까요?”

“그럼 당장 남태현 그자를 산채로 내 앞에 가져다 놓고.”

“알겠습니다, 주군.”

리자오밍은 가장 믿을 만한 수하인 흑룡두 찐쩌리(景浙鯉)에게 좀 더 면밀한 조사를 맡겼다. 흑룡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화련방 용두들의 우두머리이자 방주 친위 조직인 흑룡대의 수장이었다.

“아버지, 저를 서울로 보내주십시오. 이 손으로 직접 남태현 그자의 목을 베어 누이의 한을 풀어주겠습니다.”

누이를 죽인 남태현을 처단할 복수의 기회를 찐쩌리에게 빼앗긴 소방주 리쯔원(李子文)이 서둘러 아버지에게 자신에게도 기회를 달라고 청했다. 스물을 갓 넘긴 나이를 믿기 힘들 정도로 형형한 눈빛이 그가 아버지처럼 최상위 각성 등급인 A 등급 각성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했다.

“개인적인 복수가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너는 아직 그자의 상대가 아니야.”

“상대가 아니라니요? 제가 질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역시 대륙이었다. 대한민국에는 단 셋뿐인 A 등급 각성자가 화련방에만 셋이나 존재했다. 그 정확한 경지를 알 수 없을 정도인 방주 리자오밍과 손속에 결코 자비를 두지 않는다는 찐쩌리, 그리고 화련방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는 리쯔원까지.

“싸움은 마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더냐. 경험보다 무서운 무기는 없다. 특히 최상위 각성자라면 더더욱.”

“지금 이 시점에 주군이나 소방주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이화원을 비우는 것은 위험합니다. 천지회와 사해방이 언제 이곳을 노릴지 모르니까요.”

“맞는 말이다.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이 먼저야.”

그러나 같은 A 등급이라고 해도 우열은 존재했다. 최상위 각성자들간의 대결에서는 아주 사소한 차이로 승패가 결정되기 마련.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서도 리자오밍은 화련방의 주인답게 신중했다.

“방주님, 서울에서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만나보도록 하지.”

“접객당이 아니라 이곳에서 말입니까? 그것도 주군께서 직접이요?”

“토끼를 잡으려면 사냥개를 다독여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 수하 중 하나가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이곳 앙산당은 이화원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곳. 이곳에서 손님을 방주가 직접 맞이하는 것은 흑룡두인 찐쩌리가 이리 놀랄 정도로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트리스타를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들도 연루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트리스타는 아니야. 만약 나를 속일 작정이었다면 어수룩한 아들놈이 아니라 석문식이 직접 왔겠지.”

리자오밍은 이미 트리스타와의 연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화원을 찾아오겠다는 트리스타의 의지를 전해 들은 이후 내린 결정이었다. 죽은 설대성 의원이 촉발한 일련의 사태는 이렇게 점점 국제전으로 비화하고 있었다.

***

리자오밍이 직접 석기현 이사와 함께 이화원 석숭산의 절경을 감상하고 있던 그때.

“달수야, 얼른 가게 문부터 닫아.”

“예? 벌써요? 저녁 장사는 어쩌고요?”

“사장도 없는데 무슨 놈의 장사야. 오늘 제대로 회식해보자.”

‘가리봉 왕족발’은 완전 축제 분위기였다. 지난번 가리봉 의선에게 치료받은 백수현 선생 어머니의 병원 검진 결과가 바로 어제 나왔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완치라는 기적적인 결과에 직접 가리봉 의선을 만나 감사 인사를 꼭 전해야겠다는 백 선생을 진정시키느라 온 가족이 진땀을 빼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이어진 백 선생과 성진의 데이트. 그 덕에 ‘가리봉 왕족발’ 직원들은 일정에 없던 회식을 즐기게 된 터였다.

“회식이요? 설마 또 마라롱샤 먹는 건 아니죠?”

“왜? 대림동 갈까?”

“누구 덕분에 이제 거기 가도 마라롱샤 못 먹습니다. 그래도 마라롱샤 하나는 먹을 만했었는데……. 그런데 오늘 진짜 뭐 먹죠?”

“회식? 그럼 오늘 또 아이스크림 파티하는 거야?”

“드웨인, 그놈의 아이스크림은 물리지도 않냐? 좋아. 오늘은 진짜 회식이니까 사달라는 거 다 사 줄게.”

“요호!”

이렇게 백구만의 야식 타임이 아닌 진짜 회식이 시작되었다. 급하게 결정하느라 드웨인을 위한 아이스크림 말고는 아직 메뉴조차 정하지 못했지만.

“그런데 저 형님은 가족도 없습니까? 아이스크림 말고는 아무 생각도 안 나나 봐요.”

“쟤 앞에서 가족 이야기 꺼내지 마.”

오늘도 아이스크림에 집착하는 드웨인을 바라보며 별 생각 없이 유진에게 농담 삼아 한마디를 건네는 팽달수. 그는 유진이 이렇게 정색하며 대답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왜요? 설마 진짜 없는 겁니까?”

“죽었어.”

“모조리 다요?”

“응. 모조리 다.”

“형님이 그러신 건 아니죠? 아님 백구?”

충분히 그럴만한 관계였다. 지금은 한 밥솥에서 지은 밥을 나누어 먹는 식구지만, 과거에는 십 년 동안이나 서로 죽이겠다고 칼질을 해대던 사이였으니 얽힌 사연 또한 보통은 아닐 터.

“그런 건 아니고. 이야기하자면 길어.”

“왠지 짠하네요.”

다행히 식구끼리 피를 본 건 아닌 모양이었다. 유진이나 백구가 그리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은 아니라는 사실에 팽달수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드웨인이 한없이 불쌍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진짜 뭐 먹을까? 어머니, 뭐 드시겠어요? 얘들아! 오늘 삼촌이 맛난 거 해줄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봐.”

“치킨!”

“치킨! 치킨!”

“형님, 그냥 시켜 먹으면 안 됩니까?”

역시 애들은 오늘도 변치 않는 치킨 사랑을 증명했다. 반면에 팽달수는 모처럼 제대로 된 회식을 즐길 시간이 혹여 음식 만드느라 다 허비될까 봐 차라리 음식을 배달시켜 먹자고 했다.

“왜? 내가 네 음식에 독이라도 탈까 봐? 내가 해준 음식이 맛없냐? 회식하지 말까?”

“에이, 농담도 못 합니까? 시간 아까워서 그러죠. 나는 세상에서 우리 유진 형님이 만들어준 음식이 제일 맛나더라.”

“은근슬쩍 반말하지 말고.”

팽달수는 괜한 말을 꺼냈다가 유진의 따가운 시선만 받아내야 했다. 요리에 관해서라면 언제나 진심인 유진이었기에 혹여 본인이 만든 음식이 맛없다는 서운한 소리를 들으면 당장 회식이고 뭐고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우우우웅.

쭈뼛쭈뼛 유진의 눈길을 피하던 팽달수의 처지를 누가 알아준 것일까. 이내 유진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 발신 : 삼륭물산 ]

[ 내용 : 긴급회의 소집 ]

[ 문자 확인 즉시 출근 요망 ]

“타이밍 한 번 죽이네.”

삼륭물산에서 온 문자였다. 천채궁에서 일어난 연이은 사건들 때문에 바쁠 것이 뻔했다. 긴급회의라는 것도 아마 그것과 연관된 일일 터. 유진은 문자 내용을 확인하고는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푹 욱여넣었다. 명백한 무시였다.

“작은형님이죠? 데이트는 잘 되어 간답니까? 진즉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저만의 성공 비법을 코치해드렸어야 하는데…….”

“헛소리 말고 그 몇 안 남은 머리카락이나 꽉 붙들어.”

“형님도 코치해드릴까요? 아니지, 어디 써먹을 데도 없는 양반한테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그 모가지도 잘 붙들어라. 오늘 누가 홧김에 확 뽑아 버릴 것 같기도 하니까.”

뒤이어 팽달수의 위험천만한 도발과 함께 유진의 살벌한 농담이 다시 이어졌다. 회식을 앞둔 기분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 그렇게 장사며 소집 명령까지 다 제쳐두고 회식을 시작하려던 찰나.

“여기가 ‘가리봉 왕족발’ 맞쥬?”

그때 의문의 여인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구수한 사투리와 함께.

“아까 내가 문부터 걸어 잠그라고 했지?”

“닫아놓으라고만 하셨지 잠그라고 하신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이 그 말이지. 네가 사정 설명 잘해서 내보내.”

유진은 이내 팽달수의 귓불을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에게 손님을 돌려보내라고 명하는데.

“저… 손님? 오늘은 저희가 사정이 있어서…….”

“사장님이신 갑네. 일단 인사부터 받으셔유.”

“아니, 저는 사장이 아니고…….”

“그럼 주방장님? 오메, 어쩜 요로코롬 인상이 달덩이맹키로 훤하실까. 정말 뵙고 싶었어라.”

단순히 족발을 먹으러 온 손님이 아닌 것 같았다. 허름한 옷차림으로는 결코 가릴 수 없는 심상치 않은 아우라가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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