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잠시 뒤, 가리봉 모처.
“오셨습니까?”
“저번에 보내드린 마력삼은 잘 받으셨죠?”
“역시 마니산 정기를 받고 자라서 그런지 약효가 남다르더군요. 이거 매번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감사라니요? 매일 환자들을 돌보시느라 고생하시는 건 선영이 아버님이신데 제가 오히려 감사드려야죠.”
비밀스레 차려진 진료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은 바로 유진과 선영이 아버지 수만이었다.
“저야 돈 받고 하는 일 아닙니까?”
“그거야 마땅히 받으셔야 할 몫 아닙니까? 저녁 장사 준비하러 가야 하니까 바로 시작해볼까요?”
이들이 이렇게 비밀 진료소를 운영해 온 지도 벌써 한참이 흘러 있었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마력삼을 가지고 구로 일대를 돌아다니며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한 환자들을 돌보아 온 것. 유진 본인 돈으로 선영이 아버지 월급까지 줘 가면서 이러고 있으니 마력삼 훔친 값은 충분히 치르고 있는 셈이었다.
“첫 번째 환자입니다. 이름 김강혁. 나이 오십삼 세. 과거 십오 년 동안 소방관으로 일하셨던 분입니다. 우수 소방관으로 표창도 여러 차례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십 년 전 대환란 때 구조 활동을 벌이다가 오른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습니다.”
“가족들은요?”
“대환란 때 모두 잃은 모양입니다. 현재 폐지를 주워 번 돈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또 그놈의 재정 부족을 이유로 버림받은 분이군요. 소방관이었고 게다가 가족을 돌볼 새도 없이 구조 활동을 벌이다가 이리된 분이 연금은 고사하고 의료지원이나 보조금조차 받을 수 없다니…….”
이 환자가 다리까지 희생해가며 구하려던 그들이 바로 가리봉 주민들이었다. 아마 죽은 유진의 아버지 또한 그 틈에 섞여 있었을 터. 유진은 별 고민 없이 그를 치료해주기로 결정했다.
비교적 경미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는 수만이 담당했다. 특등품 마력삼의 기운이 가득 담긴 침 한 방이면 웬만한 병증은 눈 녹듯 사라지게 마련.
하지만 이번 환자처럼 신체 어딘가가 불구가 된 경우 단순히 침을 놓는 것만으로는 당연히 무리였다. 마력삼의 효능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일반인인 수만이 해줄 수 있는 치료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력을 돋우기 위한 시침은 이미 끝내 두었습니다.”
“바로 시작합시다.”
그래서 필요한 존재가 바로 의선이었다.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눈먼 자에게 세상 빛을 보여주는 신의.
“의선? 정말 의선이십니까?”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안을 위해 환자의 눈에는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눈이 가려진 채 불안함에 떨고 있는 환자. 유진이 핏기없이 거죽만 남은 환자의 오른쪽 다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마치 생기를 불어넣듯.
“잠시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다시 걸을 수 있을 겁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불구가 된 지 십 년이나 지났는데 정말 그게 가능합니까?”
환자는 유진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미 힘줄마저 말라비틀어진 다리로 어찌 다시 걸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제가 명색이 의선이거든요.”
유진은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환자를 진정시켰다. 그의 어투에 자신감이 물씬 배어있었다. 바로 옆에서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수만 또한 걱정할 것 하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저는 수술비를 드릴 만한 형편이 아닌데…….”
환자는 금세 의구심을 지웠다. 의선의 솜씨야 소문으로 익히 들었던 터. 문제는 치료비였다. 아무리 의선이라지만, 이미 오래전 불구가 되어 버린 다리를 고쳐준다는데 수고비라도 받으려고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비는 이미 받았으니까요.”
“수술비를 이미 받다니요? 도대체 누가……?”
“십 년 전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구조 현장으로 뛰어나가실 때 선생님께서는 이미 수술비를 내신 겁니다.”
괜한 기우였다. 의선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선… 선생님!”
“이제 잠이 올 겁니다. 푹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다 끝나 있을 테고요.”
유진의 마지막 말에 감동했는지 안대를 쓴 채 눈물을 흘리는 듯 어깨를 들썩이는 환자. 유진의 손이 살짝 옅은 황금빛을 띠고 난 후 환자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언제 봐도 놀랍습니다. 마력 마사지는 들어봤어도 마력으로 이미 손상된 뼈와 신경, 피부까지 재생할 수 있다는 말은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수만은 그새 오래전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뛰어나가던 그 모습 그대로 재생된 환자의 다리를 매만지며 감탄했다. 언제 보아도 정말 신의 경지에 오른 의술이었다.
“비밀 유지가 최우선입니다. 환자분들에게도 철저하게 당부하셔야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지켜본 후에 대상자를 선정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좀 더 신경을 써 주세요. 혹시 외부로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다시는 환자를 돌볼 수 없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오늘 또 하나의 기적이 만들어졌다. 가리봉 의선을 향한 거리의 찬사가 더욱 뜨거워질 터. 그만큼 보안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그 누구도 가리봉 의선의 정체를 알아서는 안 될 터.
“다음 분은 어떤 분이죠?”
“이름 차윤주. 나이 오십팔 세. 오늘 직접 모시고 오신 분입니다. 췌장암 말기라는데 가능하겠습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야죠.”
차윤주. 백수현 선생의 어머니였다.
‘암이 여기저기 퍼져 있네.’
증세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췌장을 좀먹은 암세포가 이미 주변 장기들에까지 마수를 뻗친 상태였다. 매만져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우선 이것들부터 태워버리고…….’
유진은 눈을 감은 채 오롯이 감각만으로 오랫동안 췌장 주변에 빌붙어 생기를 빨아먹던 기생충 같은 암세포들을 지워나갔다. 차츰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
췌장암 말기라는 무시무시한 병명이 무색하리만큼 짧은 치료 시간이 지난 후.
“어제는 마왕, 오늘은 의선. 캐릭터가 너무 일관성 없는 거 아닙니까?”
“말투가 심히 거슬린다. 여기 너랑 나밖에 없는 거 알지?”
달수와 나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달달한 믹스 커피를 홀짝였다. 달수는 스스로 서운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나는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성진이와 백수현 선생을 믿고 깝죽거리다가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온 달수는 이제 죄다 포기한 듯 거침없이 선을 넘었다.
“그만큼 대단하시다는 거죠. 그런데 이건 언제까지 하실 건데요?”
“뭐?”
“의선 놀이요. 형님도 형님이지만, 저 양반이 걱정입니다. 다들 수만 형님이 의선인 줄 알거든요.”
사실 달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입조심을 시킨다고 해도 어디서든 말이 새어나가기 마련. 공짜로 목숨을 살려주는 일이다 보니 의선에 관한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마력삼으로 깍두기나 담가 먹는 건 너무 아깝잖아. 겸사겸사 사람들도 돕고 좋지 뭐. 그리고 의사가 병 잘 고치는 게 문제인가? 못 고치는 게 문제지.”
“잘 고쳐도 너무 잘 고치니까 문제죠. 오늘만 해도 그렇습니다. 형님이 무슨 예수님도 아니고 앉은뱅이를 하루아침에 일어나 걷게 하는데 상식적으로 이게 문제가 안 되겠습니까? 어떨 때 보면 무슨 종교 집단 같다니까요. 마력삼을 사용한다는 사실도 금방 들키고 말 거라고요.”
달수가 이리 떠들 정도라면 사람 소리 들을 정도 머리 돌아가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는 뜻이었다. 뭔가 좀 더 확실한 조치가 필요하기는 했다.
“그렇기는 하지. 그래도 뭐 걱정할 거 있겠어? 여기에는 믿을 만한 우리 달수가 있잖아.”
물론 나 또한 진즉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괜스레 마력삼 아까워하다가 일만 더 커질 수 있을 터. 좀 더 안전하고 은밀한 방법을 찾든, 아니면 그냥 진료실을 닫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맨날 코뿔멧돼지 사냥에 설거지까지 하느라 여기 붙어있을 틈이 있어야죠. 게다가 백구도 산책시켜줘야지, 마니산에도 수시로 다녀와야지, 이거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서 원…….”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맨날 징징거리기나 했지 네가 언제 백구 산책시켜준 적 있어? 누가 들으면 맨날 산책시키는 줄 알겠다? 그리고 마니산에는 몇 번이나 다녀왔다고 생색이야? 한 번만 더 오늘처럼 성진이나 백 선생님 옆에 끼고 깝죽거리면 그때는 진짜 몸뚱이를 그 머리통만 하게 구겨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정 힘들면 매일 가게 주방에 출입해야 하는 설거지는 어쩔 수 없고……. 코뿔멧돼지 사냥은 밑에 실력 좋은 애들 시켜.”
좋게 구슬리면 적당히 굽히고 넘어가야 하는데, 오늘 달수 녀석은 뭘 잘못 먹었는지 여전히 고자세였다. 진짜 푸닥거리 한 번 해야 하려나.
“그런 실력 좋은 놈이 어디 한 놈이라도 있어야 뭘 시키든 말든 하죠.”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네가 인복 없는 걸 내가 어떻게 해결해 줄 수도 없고.”
“인복이 없기는 무지 없죠. 어쩌다 이런 양반을 만나서 이 고생인지……. 팔자가 드세도 너무 드세.”
“그놈의 충성심은 어찌 된 게 심하게 롤러코스터를 탄다? 너 조금만 더 가면 탈선이야.”
들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여기서 더 툴툴거리면 의선에서 다시 마왕으로 변할지도 몰랐다. 마왕이 어떤지 바로 어제 직접 두 눈으로 봐 놓고선.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말 돌리기는. 뭐가 또?”
“화련방 말입니다.”
“이미 죽어서 개똥밭을 구르고 있는 놈들이 뭘 어쩔 건데?”
가까스로 말을 돌리는 달수의 모양새가 어떤 놈들처럼 개똥밭에 구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눈앞에 있는 마왕한테는 바락바락 대들면서 흔적도 없이 거름이 되어 버린 놈들이 뭐가 그리 두려운 건지 참.
“걔들 말고 중국에 있는 진짜 화련방 말입니다. 분명 누구 짓인지 알아내려고 파고들 것 아닙니까? 트리스타도 백방으로 범인을 찾으려고 들 테고요. 어쨌거나 이번 일로 피해를 보았으니까요.”
“너만 입조심 하면 돼.”
“일은 형님이 다 벌여놓고선.”
중국에서 떼로 몰려온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현장에 살아 있던 것들은 죄다 백구 똥구멍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는데 내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어찌 알아낼 것인가. 그리고 또 알아내면 뭐 어쩔 건데?
***
그 시각, 경기도 가평군 백둔 계곡 석문식 의장의 저택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게 정말 사실일까요?”
“기운은 어떻더냐?”
“기운만 놓고 보면 결코 거짓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오랜 칩거를 깨고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면 빈말은 아닐 게다.”
“그럼 정말 랭크업에 성공한 걸까요?”
팽달수가 화련방의 보복을 걱정하던 그 순간, 석문식 의장은 다른 것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그를 이렇게 잔뜩 긴장시킨 인물은 바로 아들 석기현 이사가 직접 만나고 온 마탄 남태현 회장이었다. 그가 정말 랭크업에 성공했다면 지각 변동이 불가피했다. 제 경지에 만족하며 가만히 초야에 묻혀 있을 사람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본인 말대로 단서를 찾은 정도일 거야. 랭크업에 성공했다면 이렇게 뜸을 들일 것이 아니라 당장 내게 도전했을 테니까.”
“지금 이게 감히 아버지께 대놓고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무엇이 다릅니까?”
“남 회장은 과감하면서도 치밀한 자다. 한순간의 감정 때문에 위험을 자초할 사람이 아니지. 그래서 더 경계해야 한다는 거야.”
석 의장 말대로 남태현 회장이 정말 랭크업의 비밀을 모두 풀어버렸다면 이렇게 그저 경고만으로 그칠 리가 없었다. 진즉 준비를 마치고 이곳 백둔 계곡을 날아와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을 터였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석 의장의 모습을 천천히 감상하고 싶어 할 자니까.
“그럼 왜 마력삼을 훔쳐 간 것도 모자라 우리 쪽 인원들까지 죽인 걸까요?”
“정말로 남 회장 짓이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현장에 남아 있던 모든 흔적이 마탄의 짓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이렇게 강하게 나올 수 있는 버팀목을 마련했든가.”
“버팀목이라니요?”
석기현 이사는 마력삼과 연관된 일련의 사건들이 마탄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남태현 회장이 아직 랭크업의 단서를 찾은 정도일 뿐이라면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대림동 사건의 주범이 누구라고 보느냐?”
“그럼 설마 그것도 남 회장의 짓이라는 말씀입니까?”
“나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을 게야. 삼합회 최대 계파인 화련방마저 자신의 발아래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분명 랭크업에 성공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화련방을 건드린 것은 실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버팀목을 마련했다는 게지.”
“설마 천지맹과 사해방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제야 감이 오는 모양이구나.”
“삼합회 세력 중 5할 이상과 손을 잡았다면……! 그럼 정말 제대로 우리를 치려는 것이겠군요?”
아버지의 설명에 그제야 남태현 회장의 검은 속내를 이해한 석기현 이사. 그의 두 눈에 두려움이 서렸다. 이제껏 단 한 번도 트리스타의 황태자에게서 찾아볼 수 없던 눈빛이었다.
“음……. 아무래도 네가 상해에 다녀와야겠다.”
긴장하기는 석문식 의장 또한 마찬가지.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