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모두 물러서라!”
결국 모습을 드러내고만 주거펑.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곧 오늘 반드시 주방장 녀석과 팽달수를 죽이겠다는 의미였다.
“향주, 이렇게 직접 나서시면 위험합니다.”
“나는 화련방 서울지부 향주 주거펑이다. 일단 네놈을 얕본 것부터 사과하지.”
“그래도 수하들처럼 미련하지는 않네.”
장딩신의 만류를 무시하고 주거펑은 먼저 사과의 말부터 전했다. 이제껏 이렇게 단번에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새 각성자 특수전단까지 포섭했더군. 도대체 너희 주인이 누구지? 천지맹주인가? 아니면 사해방주?”
각성자 특수전단 표호철 단장이 직접 나서 관리국 영등포 지점장의 목을 날려버린 사실을 모르지 않는 주거펑이었다. 당연히 이들과 특수전단 사이의 관계가 각별함을 어렵지 않게 추측했을 터.
특수전단까지 움직여 화련방을 들쑤실 만한 세력 중 가장 먼저 주거펑의 뇌리를 스친 곳은 천지맹과 사해방이었다. 삼합회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고 있는 조직들이 아니던가.
“누구 뒤 닦아주는 건 너희처럼 구린내 나는 녀석들이나 하는 짓이고.”
“말을 돌리는 것을 보니 역시 둘 중 하나가 확실한 모양이군.”
“지금 나한테 물은 거 맞지?”
주거펑은 상대방이 즉답을 피하는 것이 분명 자신이 정곡을 찌른 탓이라며 만족해했다. 그리고는 들킨 것을 감추려 애써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주방장 녀석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우리끼리 이렇게 싸울 필요가 있을까? 일이 더 커지면 남 좋은 일만 하는 꼴이 될 거야. 회맹도 깨질 테고. 서로 영역을 나누는 것은 어때? 원하는 곳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우리가 양보하도록 하지. 이태원? 강남?”
천지맹이든 사해방이든 언젠가는 칼을 맞대어야 할 사이였다. 그러나 언제 칼을 뽑아 들지는 주거펑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은 빈말로라도 상대를 달래고 봐야 했다.
“가리봉.”
“가리봉?”
“그래, 가리봉. 조용히 좀 살자, 응?”
“이태원도, 강남도 모두 포기할 수 없다는 건가? 욕심이 지나치군.”
“너는 자꾸 누구랑 대화하는 거니?”
그러나 주방장 녀석은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뜬금없는 가리봉 타령으로 주거펑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정말 회맹을 깰 생각인가? 신중하게 답하는 게 좋을 거야.”
“어차피 너도 나눠 먹을 생각 따위 없잖아?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뒤통수치려는 거 아니야?”
“우리 화련방이 무슨 동네 양아치인 줄 아느냐!”
“귀청 떨어지겠네. 하긴 너희가 동네 양아치는 아니지. 설대성 의원은 어쨌어?”
“그자가 아직 살아있을 것 같으냐?”
“그것 봐. 양아치는 그냥 나쁜 놈들이고 너희들은 ‘진짜’ 나쁜 놈들이잖아. 너희들을 양아치 취급하는 건 양아치들에 대한 실례지. 걔들은 너희처럼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그러지는 않거든.”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태원과 강남에 구축한 마약 공급망을 모두 포기하라는 것은 곧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라는 의미. 회맹이 깨지든 말든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의미였다.
주거펑도 설대성을 죽인 사실을 실토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방주의 지시를 기다릴 겨를이 없었다. 일단 영역을 지키고 봐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너희들 또한 곧 설대성 곁으로 보내주마.”
“넌 엄마가 좋니, 아빠가 좋니?”
“그건 또 무슨 뜬금없는 개소리지?”
“확실히 다른 놈들보다 똑똑하기는 하네. 내가 방금 하고 싶은 말이 딱 그거였거든.”
주방장 녀석의 언변에 연거푸 농락당하면서 혈압이 오를 대로 오른 주거펑. 표정이 썩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고작 왕멍청 하나 꺾었다고 기고만장이구나. 이번에도 요행이 통할 것 같은가?”
“너희 같은 것들을 상대하면서 내가 요행까지 바라야 하나?”
“자신감이 과하군. 자만은 화를 부를 뿐이다.”
“네 걱정이나 하셔. 입도 아픈데 이제 그만 시작할까?”
설전은 여기까지.
***
휙! 퍽!
시작과 동시에 바로 앞 바닥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렸다.
“헉! 방금 저건 뭐지? 마탄 같은데?”
“아니야. 총성이 들리지 않았잖아.”
“그럼 화약이 아니라 오로지 마력만으로 암기를 쏘아낸 거란 말이야? 그럴 수가 있나?”
주거펑이 날린 혈주였다. 대다수 화련방 조직원들조차 그의 무위를 접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탄성을 자아냈다.
“무영탄(無影彈)이라는 초식이다. 그림자를 남기지 않을 만큼 빠르고 은밀한 것이 장점이지. 아직도 그 오만한 자신감이 샘솟나?”
“훗!”
“네까짓 놈이 감히 지금 내 무공을 비웃은 것이냐?”
“아, 미안. 설명하는 모습이 누구랑 닮아 보여서. 너 혹시 산 좋아하니? 아! 바다도 볼 수 있네. 말도 잘 통할 테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무명 진인과 닮아도 너무 닮은 것이 꼭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둘 중 누가 먼저 나가떨어질지 궁금하기도 하고.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헤어스타일을 보아하니 소림 금강지(金剛指)는 아니고……. 도문(道門)인 점창의 일양지(一陽指 )는 절맥된 지 오래라고 했으니까 그럼 제갈세가 탄지공(彈指功)이겠네. 하여간 이름들은 다 거창해.”
“……!”
“어떻게 알았냐고? 그쪽으로 무지 해박한 양반을 한 분 잘 알거든.”
이래서 싫다는 달수를 굳이 마니산까지 보냈던 것이었다. 관리국에서 확인한 시체에 남아 있던 마력흔은 분명 무명 진인의 그것과 흡사했다. 유사한 마력 운용법을 사용한다는 뜻.
무명 진인은 분명 답장에서 총알을 맞은 것과 같은 잔흔을 남길 수 있는 무공이라면 소림의 금강지, 점창파 일양지, 그리고 제갈세가의 탄지공 중 하나라고 했다. 물론 모두 다 전설로만 남았다고 했지만.
당장 무명 진인만 보더라도 양의신공을 되살리지 않았던가. 전설이 부활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 녀석의 이름이 결정적인 단서였다. 주거펑, 한국식 이름 제갈풍. 다른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래, 무공 이름 정도는 알고 죽어야겠지. 탄지공은 중원에서도 오랫동안 전설로만 치부되던 지공이다. 소림 금강지나 점창 일양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공할 만한 위력을 자랑하지.”
“그건 양쪽 설명이 좀 다르네. 지법만 놓고 보자면 금강지랑 일양지가 최고고 탄지공은 그것들을 모방한 아류라고 그러던데?”
일단 쥐새끼 족보는 확인을 했고. 이제 잘근잘근 씹어줄 차례. 단번에 백구 개밥그릇에 던져주는 건 재미가 없으니까 슬슬 약을 올려 보기로 했다.
“아… 아류라니! 누가 감히 우리 제갈가의 탄지공을 아류라고 폄하할 수 있다는 말이냐!”
“누군지 말 못 할 건 없다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밝히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리고 그게 뭐 중요한가? 아니라고 치자고.”
“아니라고 치는 게 아니라 정말 아니라고 하지 않느냐!”
“그거 알아? 진짜배기는 원래 그런 말을 안 해. 아류들이나 원조 논쟁에 목을 매지.”
“네놈이 끝까지! 그 머리통에 당장 바람구멍을 만들어주마. 무영탄!”
졸지에 아류 취급을 받았으니 화가 날 수밖에. 주거펑은 이내 평정심을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휙!
그의 손을 떠난 혈주가 맹렬한 기세로 다시 내게로 달려들었다.
팅! 퍽!
오늘은 꿀밤으로 끝내기로 했으니까 이것도 꿀밤 때리듯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겨주고.
“혈… 혈주를 쳐냈어! 그것도 단지 손가락만으로! 아무리 3성 마력만을 사용했다고 해도 이게 가능한 일인가!”
“아이고, 그게 왜 하필 그쪽으로 튀냐?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내가 어릴 때부터 구슬 놀이에는 젬병이었거든.”
“게다가 혈주를 역이용하기까지……! 방주께서도 저리 간단히 막아내지는 못하셨다. 이건 분명 우연이야. 만일 저 녀석이 방주에 버금가는 강자라면 내가 얼굴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녀석이 날린 혈주는 내 꿀밤에 맞아 곧바로 방향이 꺾이더니 주변에 서 있던 다른 녀석의 꿰뚫고 벽에 박혀버렸다. 너무 충격이 컸던 것일까. 주거펑의 혼잣말이 심각한 그의 심정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왜 멀뚱히 서 있어? 벌써 그만하려고? 나름대로 재미있는데 왜?”
“꽤 운이 좋은 녀석이구나.”
“운? 운은 네가 좋은 거지. 아직 살아있는 걸 보면.”
“내 혈주에는 자비심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그 구슬이 무슨 부처님이냐? 자비심 타령을 하게. 시답잖은 소리 그만하고 구슬이나 또 굴려 봐.”
“모두 삼보 뒤로 물러나거라!”
애써 불안함을 떨쳐 보려는 주거펑. 이내 평정을 되찾는 모습이 역시 한 조직의 수장다웠다. 수하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보아 보여줄 것이 아직 남은 모양이었다.
“뭔 대단한 걸 보여주려고 이렇게 뜸을 들여? 이러다가 싱겁게 끝나면 더 창피한 거 알지?”
“아무리 굳센 바위도 바람을 이기지 못하는 법.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대화를 하려면 상대방이 알아듣게 말해. 혼자 지껄이지 말고.”
“네깟 놈을 상대하는데 탄지공 제2식까지 펼쳐야 한다니 쑥스럽군. 제2식은 쇄엽풍(碎葉風)이라고 부른다. 쇄엽풍은 살랑거리는 나뭇잎마저 모조리 으깨버리는 바람을 뜻하지. 서로 다른 방향에서 교차하듯 날아가는 혈주를 우연히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놈 운도 이제 끝이라는 말이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른 던지기나 해.”
“오늘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탄지공 제2식 쇄엽풍!”
거창하고 지루한 설명 끝에 주거펑이 다시 혈주를 날렸다. 더 날카로운 기세로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혈주. 이번에는 피에 굶주린 혈주가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였다.
***
“하하하! 미련한 놈. 향주는 저 탄지공 하나로 저 자리까지 오른 분이다. 방주께서도 그 실력을 인정해 사위로 삼은 분을 상대로 오만을 떨더니 결국 주둥이가 찢어져 죽는군. 이래서 한국 놈들은 안 된다니까.”
장딩신은 승리를 직감한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주거펑을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인물. 그가 아는 한 이제껏 주거펑의 탄지공 제2식 쇄엽풍을 막아낸 자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딩신이라……. 너 혹시 전에 죽은 멍청이하고 사촌이냐? 아님 아버지가 다른 건가?”
“팽달수, 향주께서 곧 네놈도 죽여주실 테니 너무 재촉하지 마라. 푸하하하!”
“덜떨어진 걸 보면 확실히 유전자가 섞인 것 같기는 한데…….”
“뭐야! 곧 죽을 놈이 주둥이만 살아있구나!”
그의 웃음소리가 거슬렸던 것일까. 심심한 듯 이쑤시개를 잘근거리며 유진과 주거펑의 대결을 지켜보던 팽달수가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장딩신을 바라보며 이기죽거렸다.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닌데 들렸다면 미안. 그런데 저기 저거는 좀 보고 떠들지?”
주거펑의 혈주가 더 맹렬하고 세찬 기세로 유진을 향하는데도 오히려 더 여유가 넘쳐 보이는 팽달수. 그가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방금 주거펑이 날린 혈주들이 날아간 곳, 유진이 서 있던 바로 그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