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음식을 맛보여주시려고요? 냄새가 아주 기가 막힙니다.
“짜증도 나고 날도 후텁지근하니까 시원한 것 좀 먹고 싶어서.”
“이런 날에는 시원한 냉면 한 그릇 먹어줘야 하는데…….”
“저기 아래 골목 가서 먹고 와. 거기 물냉면 싸고 맛있다고 소문났더라.”
“에이, 어디 형님 요리 실력만 하겠습니까?”
“능글대지 마라. 그런다고 냉면 안 만들어줘. 오늘은 다른 거 먹을 거야.”
“다른 거 뭔데요? 콩국수? 팥빙수?”
“얻어먹으려면 그 입 좀 다물고 있지?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그건 그렇고 요 며칠 연일 계속된 찜통더위에 짜증까지 겹치다 보니 시원한 것이 당겼다. 족발을 삶느라 가스레인지 앞에서 매번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도 고되고.
그래서 오늘은 시원한 여름 한정 별미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여름 하면 바로 이거지. 향이 솔솔 풍기는 깻잎하고 싱그러운 부추도 듬뿍 썰어 놓고.
“간장하고 청양고추, 새우젓, 식초에 레몬즙도 조금 넣고……. 설탕만으로 간을 내면 밋밋하니까 매실청도 약간 넣어야지. 그리고 다진 마늘에 연겨자까지 넣으면 양념장 완성!”
이 음식은 양념장이 제일 중요하다. 시큼한 식초 베이스에 연겨자가 톡 쏘는 맛이 일품인 음식이니까 비율을 잘 맞춰야 한다. 마지막으로 통깨도 넉넉히 뿌려주면 완성!
“유진 삼촌, 이거 색깔이 너무 예뻐요. 무슨 꽃 같아요. 이게 뭐예요?”
“톡 쏘고 시원한 거. 너희들한테는 좀 맵겠다. 이건 어른들 먹고 너희는 치킨 튀겨줄게.”
“치킨! 치킨!”
“왈왈!”
보기 좋은 게 먹기도 좋은 법. 채 썬 채소를 종류별로 보기 좋게 얹고 나니 현희 말대로 화려한 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먹기에는 맛이 좀 강할 것 같으니까 남은 뇌익조 고기로 치킨도 튀기기로 했다.
“치킨이 그렇게 좋아? 이 더운 날씨에? 너희들도 참…….”
“치킨은 언제나 좋아요!”
날이 덥든 말든 애들의 치킨 사랑은 식지 않았다. 백구야 뭐가 입으로 들어가든 애들이 좋다면 덩달아 좋다는 식이고.
“이거 냉채족발이네, 형? 와, 냄새 죽인다.”
“해파리도 넣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의 특선 음식은 바로 냉채족발. 특유의 향내가 코끝을 한껏 자극했다. 아직 먹기 전인데도 시큼한 연겨자와 식초를 한 숟갈 입안에 털어 넣은 듯 침이 고였다.
냉채족발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재료가 바로 해파리. 이 시국에 해파리 타령이 사치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이왕 먹는 거 제대로 먹으면 더 좋으련만…….
“멸치도 구경하기 힘든데 해파리를 요즘 어떻게 구합니까? 그나저나 이거 진짜 막걸리하고 같이 먹으면 술이 그냥 술술 들어가겠는데요?”
“게이트 안에 물 있는 데 없나? 호수든 연못이든. 본 것도 같은데.”
“설마 제 게이트에서 해파리 키우실 생각은 아니죠?”
“못 키울 거 뭐 있어? 상어입해파리는 꼭 바다 아니어도 잘 살잖아?”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했다. 몬스터들이 출현하면서 익숙하던 것들이 죄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어입해파리처럼 몬스터가 그 자리를 대체한 것도 있으니까.
“냉채족발 먹겠다고 상어입해파리를 키우자고요? 그 상어입해파리가 웬만한 코뿔멧돼지도 한입에 삼키는 거 아세요? 키우실 거면 형님 방에다가 어항을 놓고 키우시든가 하십시오. 제 게이트는 절대 안 됩니다. 절대! 네버!”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장소야 달수네 게이트 구석에 연못이라도 하나 파면될 테고. 상어입해파리는 꼭 해수에서만 사는 것도 아니니 안성맞춤이었다. 내가 왜 여태 이 생각을 못 했지?
“은근슬쩍 떠보시는 거잖아요. 안 넘어갑니다. 절대!”
“절대!”
“드웨인, 너는 뭔 줄 알고 그러는데?”
“아무튼 절대 안 돼! 우리 달수 동생이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달수 녀석, 그새 눈치가 많이 늘었다. 코뿔멧돼지 납품하듯 상어입해파리도 먹기 좋게 손질해서 가지고 오라고 시키려고 했는데, 쩝.
드웨인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덩달아 반대하고 나섰다. 달수가 기꺼이 지갑을 열어 얼음 막대에 들어갈 초코 우유를 사준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것이다.
“요즘 진짜 아주 둘이 죽이 잘 맞아. 둘이서 무슨 작당 모의하고 그런 거 아니지? 할 거면 목숨 걸고 해라.”
“형님은 무슨 농담을 해도 그렇게 살벌하게 하십니까?”
“누가 농담이래?”
“…….”
사실 그냥 게이트에 웅덩이 하나 파고 한 마리 던져 넣으면 그만이었다. 마니산 가기 싫으면 손질이야 달수가 해 올 테고. 그건 그렇고 이놈의 쥐새끼는 언제 오려나.
***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리 오래 기다릴 기분은 아니군요.”
“그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이곳은 다시 여의도 마탄 빌딩.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엘리베이터가 마탄 빌딩의 가장 높은 곳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바로 옆 창 너머로 서울 시내가 빠짐없이 내려다보였다. 그곳에서 정중하게 석 이사를 멈춰 세우는 지현우 실장.
“오랜만이군.”
잠시 뒤, 병중이라는 사실이 무색하리만큼 안광이 빛나는 옹골찬 체격의 사내가 석기현 이사를 맞이했다. 마탄 신화의 주인공 남태현 회장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 회장님. 생각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그래서 서운하기라도 한 모양이지?”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트리스타 경영기획본부의 보고가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남태현은 후천성 마력 거부 증후군 증상을 보여야만 했다.
소생의 가망조차 없는 병. 목숨을 부지할 방법이라고는 마력 마사지가 전부였지만, 무려 A 등급 각성자인 그의 뭉친 마력을 그 누가 떡 주무르듯 시원하게 풀어줄 수 있겠는가.
마탄 내부에서도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거론되고 있었다. 그 선두에 서 있는 자가 바로 빌리 그레이엄 부문장이었다.
“그럴 리가요.”
“그것보다 좀 의외군. 자네가, 그것도 혼자 나를 다 찾아오고 말이야. 선배님께서는 요즘 아주 바쁘신가 봐?”
그러나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남태현 회장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마치 이제 막 마력을 각성한 사람처럼.
남 회장의 마지막 말은 분명 석기현 이사를 아직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었다. 석 의장이 직접 오지 않은 것을 언짢아하는 것이기도 할 터. 그것을 모르지 않는 석 이사가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저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사실 확인? 일단 앉지. 뭐가 그리 궁금한 건가?”
“마탄의 짓입니까?”
“듣기 거북하군. 좀 알아듣게 설명부터 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은데?”
다소 공격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나 석 이사는 그것이 트리스타에 걸맞은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실을 부정할 것이 뻔한 남태현 회장 앞에서 그는 말을 빙빙 돌리지 않았다.
“얼마 전 마력삼 절도사건이 발생한 사실은 들어서 아실 겁니다.”
“그래서?”
“설대성이라는 자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검거되었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자는 일반인입니다. 절대 혼자서 이 모든 일을 꾸밀 수가 없죠.”
“내가 그런 좀도둑이나 키울 것 같은가?”
석기현 이사의 직설적인 물음에 남태현 회장의 곧바로 불쾌한 낯빛을 내비쳤다. 마력을 끌어올리지는 않았지만, 폐부를 꿰뚫을 것 같은 안광이 석기현 이사를 압도했다.
***
그 시각 영등포 문래동 옛 방직공장 건물. 대낮인데도 공장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이곳은 몬스터들이 출몰하기 오래전부터 버려져 있던 공장이었다. 백여 년 전 일본인들이 이곳에 처음 공장을 세운 그때부터 쌓인 세월의 더께가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의 인생사만큼이나 수북했다.
‘여기는 어디지? 아이, 배고파. 도대체 어떤 놈들인 거야?’
군데군데 패인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누군가 눈이 가려진 채 묶여 있었다. 주변 철공소들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기계음들이 그를 더욱 불안에 떨게 했다. 그는 바로 서리풀 터널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설대성 의원이었다.
저벅저벅.
점점 더 다가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더욱 심장을 졸아붙게 했다.
스르륵.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흘러내리고. 얼굴을 향하고 있는 불빛 때문에 설 의원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 사이 다시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갔다.
“당… 당신 누구요?”
“…….”
“지금이라도 날 풀어주면 다 없던 일로 해 주겠소.”
“…….”
설 의원이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일단 상대가 누구인지부터 파악하려고 했지만,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풀어주기만 하면 전부 없던 일로 묻어주겠다는 제안에도 마찬가지로 묵묵부답뿐.
“당신들 지금 큰 실수 하는 거라고! 당신들이 죽인 그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알아? 트리스타 석기현 이사님이 나를 지켜주시겠다고 보낸 사람들이야. 지금쯤 트리스타에서 당신들 잡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거라고!”
“트리스타라…….”
공포가 극에 달한 설 의원이 절규하듯 상대를 압박했다. 트리스타가 이 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저지른 짓이 분명했다. 예상대로 트리스타를 언급하자 말없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상대가 반응을 보였다.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는 모양이네. 내 뒤에 트리스타가 있다니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훗! 하하하!”
“지금 내 말 못 들었어? 내 뒤에……! 헙!”
그런데 그 반응이 영 예상과는 달랐다. 트리스타가 뒤를 지켜준다는 말에 어둠 속 상대는 오히려 설 의원을 비웃었다.
휙!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공기를 갈랐다. 그리고 비릿한 혈향이 다시금 코끝을 찔렀다. 서리풀 터널에서 살육이 벌어지기 시작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다만 서리풀 터널에서 트리스타 쪽 인원들의 머리통을 꿰뚫었던 정체 모를 무언가가 이번에는 설 의원의 오른쪽 뺨을 할퀴듯 훑고 지나갔다는 것이 다를 뿐.
“이건 분명 그때 그……! 혹시 마탄에서 오셨습니까?”
설 의원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서리풀 터널에서 마력을 두른 팔과 머리가 꿰뚫리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의 두 눈에 기대감이 서렸다. 혹여 자신을 납치한 것이 마탄이라면 살아날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탄과는 원한은 물론 오해를 살 만한 의혹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혈주(血珠)를 그런 싸구려 총탄에 비유하다니 실망이군.”
그러나 기대는 금세 여지없이 깨졌다. 어둠 속 상대는 마탄을 싸구려라고 비웃었다. 그러고 보니 마탄이라면 응당 들렸어야 할 총성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화약 냄새 또한 없었다.
“트… 트리스타가 두렵지 않습니까?”
“내가 왜 트리스타 따위를 두려워해야 하지?”
결국 다시 트리스타를 내세워 목숨을 구걸해보는 설 의원. 그러나 상대는 이미 트리스타에 피 맛을 보여준 후였다.
저벅저벅.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또렷해지는 어둠 속 인물의 정체. 설 의원 바로 앞에 멈춰 선 상대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굽어보았다.
“당… 당신은……!”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알아본 설 의원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납치했을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이 어디인 줄 아나?”
“당신이 어떻게 이런 짓을……!”
“백 년도 더 전에 일본인들이 세운 방직공장이지.”
“…….”
꿀꺽.
설 의원은 눈앞의 인물이 도대체 무슨 수로 자신을 납치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마탄에 못지않은 위력으로 날아드는 그 혈주라는 것들 덕분일 것이라 짐작할 뿐. 마른침이 그의 목울대를 거칠게 타고 넘었다.
“그 당시에는 말 안 듣는 조선인들의 눈과 입을 꿰매어 버렸다지, 아마?”
“도… 도대체 내게 뭘 원하는 겁니까?”
휙!
“윽!”
다시 혈주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이번에는 왼쪽 허벅지에 길게 흉터가 남았다. 조금만 더 안쪽으로 날아들었다면 허벅지를 관통하였을 것이 분명했다.
“궁금한 게 몇 가지 있거든. 그저 성의껏 답해주기만 하면 돼.”
“나를 죽일 겁니까?”
“대답이 마음에 든다면 바로 풀어주지. 그러나 만에 하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처음에는 왼쪽, 다음은 오른쪽 눈을 꿰매어버릴 거야. 그래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경우 이 혈주가 그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뚫어 줄 걸세. 직접 봤으니까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겠지?”
상대가 원하는 것은 그저 몇 마디 대답뿐. 그러나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여덟 개의 혈주는 언제라도 설 의원의 머리통으로 날아들 태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