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49화 (50/204)

<제49화>

“어서 오십시오. 혼자 오셨나요?”

“그렇소만.”

“어떤 걸 드릴까요? 족발이나 보쌈은 혼자 드시기에는 양이 좀 많을 것 같은데…….”

“그래도 족발집에 왔으니 족발을 먹어 봐야 하지 않겠소. 남으면 싸 갈 테니 족발 하나 주시오. 막걸리도 한 병 주시고.”

‘가리봉 왕족발’에 가볍고 상쾌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게 문에 달아 둔 작은 종이 내는 소리였다. 홀에 있던 성진과 일부 손님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문 쪽으로 향했다. 주방에 있던 유진과 드웨인의 시선은 이미 그곳을 향해 있었다.

“그러지 말고 괜찮으시면 합석하시겠어요? 괜찮죠, 아저씨?”

“한두 푼 하는 음식도 아니고 사장이 그러라는데 그리합시다, 그럼. 그리고 뭐든 같이 먹어야 맛있는 법 아니오. 족발은 여기 충분하니까 막걸리나 한잔 사시우.”

때마침 가리봉 찰떡 삼인방도 와 있던 터라 성진은 자연스레 혼자 온 백발의 손님에게 합석의사를 물었다. 두런두런 수다를 떨던 가리봉 삼인방은 흔쾌히 백발 손님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괜히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폐는 무슨. 아시다시피 우리 같은 노인네들이야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게 쉽지 않으니 이런 기회에 새로 술친구도 사귀고 하는 것 아니겠수. 여기 앉아서 같이 듭시다. 내가 이웃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 집 족발 맛이 정말 일품이우.”

“그럼 염치 불고하고 합석하겠습니다.”

쌀집 김 씨는 손수 의자까지 빼주며 백발 손님을 맞이했다. 수전증이 사라진 후 전보다 더 술자리를 즐기는 터라 새로운 술친구를 사귀게 된 것이 마냥 기쁜 표정이었다.

“아직도 이렇게 한복을 입고 다니는 분이 다 있네. 여기 분 같지는 않은데 가리봉에는 누구를 만나러 오셨수? 그러고 보니까 낯이 익은데…….”

“그러게. 탤런트신가? TV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이들도 백발 손님에게 관심을 보였다. 비슷한 연배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머리카락 색과 맞춘 듯한 새하얀 한복 차림이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아! 구로 천사를 만나러 오셨나 보네. 어이! 달수 길드장! 여기 손님 오셨어!”

“잠시만요. 제가 지금 설거지 중이라……. 제 손님이 오셨다고요? 누가 또……? 기자님은 아니신 것 같고 누구세요?”

“그 유명한 구로 천사시구먼. 반갑소.”

“저를 아세요?”

모두 기억을 더듬었다. 다들 백발 손님의 얼굴이 낯익다고 여기던 참이었다. TV에 나올 만한 유명인이라면 당연히 구로 천사를 찾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에 슈퍼 박 씨가 팽달수를 부른 것이었다.

“이거 영광이외다. 간첩도 아니고 구로 천사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난 그쪽을 찾아온 게 아닌데. 그냥 술 좋아하는 노인네가 기막힌 안주 냄새에 이끌려 온 게지.”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인상이 정말 좋으시네요. 혹시 탤런트 누구 닮았다는 말씀 자주 안 들으세요? 분명 누구 닮으셨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자네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그 누구였더라……. 아! 무명 진인(眞人)!”

주방에서 급히 나와 백발 손님과 대화 중이던 팽달수가 드디어 희미했던 기억 속 인물을 생각해냈다. 눈앞의 백발 손님은 분명 3대 길드 중 하나라는 태극 길드의 장문인 무명 진인과 판박이처럼 닮아 보였다.

“그래, 맞아! ‘도에 대해 아십니까?’ 그 양반 맞지?”

“진짜 완전 똑같은데요. 쌍둥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태극 길드는 여타 길드와는 달랐다. 길드라기보다 종교집단에 가까웠다. 통상 태극 길드라고 불렀지만, 정식 이름은 태극문이었다.

무명 진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태극문 자체가 비밀스러운 조직이기도 했지만, 무명 진인이 좀처럼 대외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교세 확장을 위해 TV 광고에 나와 그 유명한 ‘도에 대해 아십니까?’라는 멘트를 던진 것이 사람들 뇌리에 워낙 깊이 박혀 있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그럼 진짜 그분하고 쌍둥이세요? 태극의 무명 진인하고?”

팽달수의 설레발에 백발 손님은 엷은 미소로 화답했다. 알 듯 모를 듯한 대답에 팽달수는 더 설레발을 치기 시작했다.

왈왈.

그때 아이들과 놀고 있던 백구가 갑자기 백발 손님에게 다가갔다. 장난스레 신발을 앙 깨무는 모습이 팽달수의 허벅지를 핥아대던 때와 같았다.

“오호! 원시천존이시여! 용생구자(龍生九子) 중 막내라는 ‘탐’이로구나!”

“얘는 탐이 아니라 백구예요. 제 동생이요.”

백구를 찬찬히 살피던 백발 손님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금 백구를 바라봤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백발 손님의 말에 모두 귀를 기울였다.

“백구라……. 원래 탐은 용의 머리에 개의 몸, 소의 발굽과 원숭이의 꼬리, 그리고 뱀의 비늘을 가지고 있지. 아마 원래 모습을 숨긴 모양이구나. 평소 백구가 식탐이 많지 않더냐?”

“맞아요. 고기만 보면 꼬리를 막 흔들어요. 가끔 골목길에서 숨바꼭질하는 이상한 아저씨들 볼 때도 그러지만.”

“태양까지 삼키려던 간 큰 놈이지. 그래서 이름도 ‘욕심 많은 개(犭+貪)’라는 뜻인 탐이란다.”

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평소 먹는 욕심이 많은 백구의 모습과 잘 맞아떨어졌기에 모두 흥미를 느꼈다. 다만 민우는 동생처럼 여기는 백구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노인장, 어떻게 바게스트를 알아본 거야? 기운으로 봐서는 기사는 아니고 사제 쪽인 것 같은데……. 대사제님께서 나 데리고 오라고 보내신 거 맞지?”

그때 주방에서 드웨인이 걸어 나왔다.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드웨인도 마찬가지. 그러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쯧쯧쯧. 볼 때마다 정말 안됐어.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쩌다가 저리됐을꼬.”

“얼른 정신을 차려야 가족들도 만날 텐데…….”

“가끔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안쓰러워 죽겠다니까.”

보통 드웨인 나이대의 젊은이가 노인에게 이리 다짜고짜 반말을 늘어놓으면 욕을 듣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가리봉 찰떡 삼인방의 표정은 연민 그 자체였다.

그들에게 드웨인의 말은 정신 나간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리아스 대륙이니 바게스트, 마왕과 같은 말들은 하도 많이 들어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냥 듣고 있으면 불쌍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역시 근래 파군성(破軍星)이 유독 빛난 이유가 있었구나! 이게 정말 사람의 기운이라는 말인가!”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차원의 서’는? 넉넉히 가지고 왔어?”

그러나 단 한 사람, 백발 손님만은 그런 드웨인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말투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이내 생사가 걸린 결전을 앞두고 상대방의 빈틈을 살피는 맹수의 그것처럼 변해갔다. 애써 갈무리한 틈바구니로 미세하게 삐져나오는 드웨인의 마력을 알아본 것이었다.

“드웨인, 하드리안이 보낸 사람 아니니까 가만히 있어.”

“진짜 아니야? 좀 이상하기는 해도 기운이 확실히 이쪽 세계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글쎄, 아니라니까.”

그리고 드웨인의 헛소리에 장단을 맞춰주는 또 한 사람. 유진이 등장했다.

“파군성의 기운을 받은 쪽이 이쪽이 아니라 그쪽이었나! 그럼 탐의 주인도 그쪽이겠군. 놀랍도다, 놀라워!”

경악 어린 눈으로 드웨인을 바라보던 백발 손님의 시선이 유진에게로 옮겨갔다. 마력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드웨인을 말 한마디로 압도하는 유진의 모습에 대번 그가 자신이 찾던 사람임을 알아챈 것이었다.

“와, 대박! 형님도 신기하죠? 완전 똑같아! 말씀도 진짜 무명 진인같이 무슨 무협지에 나오는 도사님처럼 하시고. 외모까지 어쩜 이리 똑같이 닮았는지…….”

“닮은 게 당연하지. 무명 진인이시죠?”

“에이, 형님도 참. 무명 진인이 어떤 양반인데 이런 가리봉 골목에 나타나겠습니까?”

“기운을 숨긴다고 나름 애썼는데 용케 알아보는군. 역시 영물 중의 영물인 탐을 부릴 만해.”

“뭐야? 그럼 어르신이 진… 진짜 무명 진인이라고요?”

유진 또한 단번에 상대방을 알아봤다. 무명 진인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무명 진인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닮은꼴이라고 해도 A 등급에 달하는 마력까지 닮았을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눈치 없는 팽달수는 그럴 리가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이내 두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 단 셋뿐인 A 등급 각성자들 중 가장 비밀스러운 인물이라는 무명 진인이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족발 드시러 오신 거 맞죠?”

“그럼 내가 파군성의 주인인 자네와 주먹 다툼이라도 하러 왔겠나? 나는 등선도 못해보고 맞아 죽고 싶지는 않네.”

“그렇다고 그냥 얼굴 구경이나 하러 오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팽달수의 질문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묘한 긴장감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모두 숨죽인 채 유진과 백발 손님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래도 모름지기 도를 깨우쳐 선인(仙人)이 되기를 꿈꾸는 나일세. 자네가 품은 파군성의 기운이 인세(人世)에 파고들어 사람들의 수명을 갉아먹는 삼시충(三尸蟲)이 된다면 설사 등선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겠나?”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이 섞여 있었지만, 경고가 분명했다. 더는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는 뜻. 아직 채 식지 않은 족발에서 피어오르는 김만이 긴장감을 잊은 듯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 족발 파는 것 말고는 아무 욕심도 없으니까.”

“여기저기서 마력삼을 가져간 게 자네 아니던가? 대림동을 박살 낸 것도 자네 짓일 테고.”

유진이 이내 백발 손님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백발 손님은 곧바로 욕심이 없다면서 마력삼을 탐한 것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물었다. 변명이나 늘어놓으며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면박이었다.

“선인이네 뭐네 하면서 결국은 밥그릇 지키러 오신 거네요? 언제부터 마력삼이 3대 길드 것이었나요? 각성자들만 마력삼 먹으라는 법 있습니까? 그것도 마치 자신들이 씨 뿌린 것처럼 돈까지 받아 가면서요.”

“천수관음 흉내라도 내려는 건가?”

“날도둑놈들보다야 낫겠죠.”

“더 큰 도둑이 되려는 건 아니고?”

둘만의 대화가 이어졌다. 다른 이들은 겨우 숨을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볼 뿐.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었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그깟 마력삼 몇 뿌리로 만족하지 않았겠죠. 그냥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대림동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고요.”

“그거야 손을 섞어보면 알 터.”

“결국 한판 붙어보자는 말씀이네요. 정말 등선 시켜 드려요?”

“만일 나를 꺾는다면 파천(破天)의 힘을 갖고 있음에도 마력삼 몇 뿌리와 족발 삶는 것에 만족해 왔다는 의미일 테니 응당 자네 말을 믿어야겠지.”

“그러세요, 그럼. 일단 족발부터 드시죠. 식으면 맛없으니까.”

서글서글하던 백발 손님의 눈빛은 이미 야차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다. 친절히 족발을 권하고 있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유진 또한 절대 물러서지 않을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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