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뭐라고 감사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선영이 덕분에 진주가 많이 밝아졌거든요. 아버님께서 선영이를 구김 없이 잘 키워주신 덕분입니다.”
학교에서의 한바탕 소동이 일단락되고 하교 시간에 맞춰 모두 ‘가리봉 왕족발’로 자리를 옮겼다. 혼자였다면 결코 설 의원과 이사장을 상대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선영 아버지는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그놈의 돈이 뭔지 바쁘다는 핑계로 자식이 점심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아빠로서는 빵점짜리 아빠죠.”
“아니야, 아빠.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아빠인데 왜.”
“선영이 말이 맞습니다.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계시잖아요.”
“제가 더 능력 있는 아빠였다면 우리 아이들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선영의 손을 쓰다듬는 선영 아버지의 모습이 짠했다. 그 누구도 감히 손가락질할 수 없는 애틋한 부정(父情)이었다.
“건축 현장에서 일하신다고요?”
“예. 예전에는 한의사였습니다. 그때는 제법 먹고살 만했었죠. 몬스터들이 출현하고 난 후에도 한동안 버텼었는데 결국 한의원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이제 마력 없이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으니까요. 애들을 굶길 수는 없어서 선택한 것이 막노동이었습니다.”
마력이 우선시되는 사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각성자를 따라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누가 이들을 게으르고 무능력하다고 욕할 수 있을까.
“음……. 한의원에 가장 많이 찾아오는 환자들은 주로 어떤 분들이었나요?”
“뭐 다양합니다만, 주로 전신의 음양평형(陰陽平衡)을 돕고 신체의 허핍(虛乏)을 달래는 보약을 지으러 오는 분들이었죠. 침술이나 뜸도 따지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몸의 균형을 찾아주기 위한 것들이죠. 다 옛날이야기네요.”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선영이가 먼저 우리 진주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듯이.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일 테니까.
“혹시 한의원을 다시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씀을 듣다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요.”
때마침 선영 아버지를 도울 적절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방법이랄까.
***
“고작 족발집 주방장 따위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박 변이 뭐래?”
“아무래도 실형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답니다. 마력을 사용해 상대방을 폭행한 건 아니라고 해도 일반인 앞에서 마력을 끌어올린 것만으로도 가중처벌 대상이라더군요. 검찰 측에서 최소 1년 형은 구형할 것 같다고…….”
학교에서 돌아온 설 의원은 현행범으로 관리국 특임 경찰에게 끌려간 아들을 빼낼 생각뿐이었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고 해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자신의 자존심과도 연관된 문제였기에 더욱 분을 삭이지 못했다.
“오전 내로 현금 좀 준비해 놔. 큰 거로 석 장만.”
“이미 언론 쪽에서도 냄새를 맡았는지 전화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 괜히 움직였다가 의원직까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 이대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을 감옥에서 썩게 하라는 거야!”
“의원님, 그래도 일단 좀 여론이 잠잠해진 후에…….”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돈의 위력은 여전했다. 게다가 설 의원은 검찰 출신. 인맥 또한 섭섭지 않게 관리해 온 그였다.
여론이야 항상 또 다른 이슈를 찾아 떠돌게 마련 아니던가. 돈만 두둑하게 챙겨주면 사람들의 이목을 돌려줄 이슈거리는 검찰 후배들이 알아서 뿌려줄 터였다.
“그 족발집 주방장 놈을 좀 손 봐줘야겠는데…….”
“어쩌시려고요?”
“솜씨 좋고 뒤탈 없는 사람들 좀 구해 봐.”
“솜씨 좋고 뒤탈 없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왜 그 있잖아.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들.”
“무적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무적자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니까 뒤탈도 없을 거 아니야.”
돈이야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었다. 설 의원이 고심하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종잇장처럼 구겨놓은 족발집 주방장 녀석을 손봐주는 일이었다.
“의원님, 무적자들이 없어진 지가 언제인데 이러십니까? 다 옛날이야기라고요.”
“좁아터진 대한민국에서야 그렇지. 중국 쪽 애들로 알아봐. 조선족도 좋고.”
“너무 과한 것 아닐까요?”
“관리국 지점장이 형님으로 모시는 놈이야. 뭔가 한가락 하는 놈이 분명해. 그리고 처리하는 김에 그 대머리 녀석까지 모조리 처리해야겠어.”
“대머리라면 팽달수 길드장 말씀입니까?”
“그래, 그 녀석. 너도 봤잖아? 내 혀를 뽑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거.”
설 의원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제 아들과 본인의 잘못은 이미 기억이 나지 않는 눈치였다. 오로지 유진과 팽달수에 대한 적개심만 남아 있었다.
“팽달수 길드장은 언론을 통해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자입니다. 모두가 주목하는 인물이라고요. 그런 자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러니까 무적자들을 써먹겠다는 거 아니야.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까 되도록 빨리 적당한 자들을 찾아보라고.”
설 의원은 그렇다고 무턱대고 덤벼들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무적자들. 그들이라면 감히 자신을 깔아뭉갠 그 오만한 것들을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바쁘신데 오시라고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비가 와서 일도 못 나갔거든요.”
다음 날 달수네 게이트. 새벽 훈련을 마치고 진주를 등교시킨 뒤 손님과 함께 다시 이곳을 찾았다. 오늘 모신 손님은 바로 선영 아버지였다.
“여기 이것 좀 보시겠습니까?”
“이…… 이건 마력삼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쉽게 보기 힘든 녀석이죠.”
그의 눈앞에 놓인 것은 바로 여기저기서 채집해 온 마력삼들. 한 뿌리만 하더라도 수억을 호가하는 마력삼이 수북했다.
“양이 엄청나군요. 이걸 왜 제게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값비싼 마력삼을 한두 뿌리도 아니고 이렇게 장작처럼 쌓아두고 있을 만한 인물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이것으로 침을 놔보시면 어떨까 해서요. 독성은 제가 제거해 드리겠습니다.”
“독성을 제거해주시겠다고요? 독성만 제거하면 이미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는 것을 왜……?”
“잘 아시다시피 마력삼은 마력 회복 포션의 주재료로 쓰이는 약재입니다. 소진된 마력을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는 데에는 이만한 약재가 없죠.”
순간 선영 아버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마력삼은 그 자체로 몬스터의 일종이다. 비록 등급으로는 C 등급에 불과하지만, 드래곤 하트와 같이 기적에 가까운 효능을 보여주는 것들을 제외하면 충분히 만병통치약이라고 불릴 만한 약재였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마력삼을 주무를 수 있는지는 일단 둘째 문제. 마력삼이라는 것이 몬스터 특유의 독성만 제거하면 사실상 부르는 것이 값인 물건이다. 그대로 차만 끓여 먹어도 효과가 있는 것이니만큼 따로 손댈 필요가 없는 약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것을 독성까지 제거해 그냥 내어주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을 터. 내 의도를 의심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마력삼을 이용해 침을 놓는다는 말은 금시초문이군요. 침술을 통해 신체 특정 부위에서만 마력이 회복된다면 후천성 마력 거부 증후군과 유사한 거부 증상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균형을 깨뜨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에게 마력삼의 약효가 담긴 침이나 뜸을 사용한다면요? 또한, 전신의 마력 균형을 흩트리지 않는 정도로 묽게 희석해 사용한다면 각성자들에게도 마력 마사지와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더 손쉽게 마력삼의 약효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
선영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제껏 마력삼은 포션 형태로만 사용해 온 것이 불문율.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아주 엉터리인 이야기도 아니었다.
게다가 각성자들에게만 허락된 마력삼의 효능을 일반인들 또한 누릴 수 있는 일이다. 병자를 살피는 의사로서 충분히 욕심을 낼 만하다는 말이었다.
“마력삼은 각성자에게만 귀한 약재가 아닙니다. 일반인이 마시면 기운을 북돋아 주는 효과가 있죠. 하지만 소화 과정에서 약효가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각성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죠. 마력삼을 그냥 마시는 것이 아니라 직접 환부에 바르거나 투여한다면 어떨까요? 침이나 뜸이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입니다. 직접 사람 몸에 사용해보지 않는 이상…….”
감탄은 이내 우려로 바뀌었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이었다. 짐작만으로 독이 될지도 모를 약재를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는 일.
“아니요. 분명 효과가 있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십니까? 아무리 좋은 약이라고 해도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람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너무 위험하군요. 직접 사용해 본 증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바로 그 증인입니다. 저를 믿고 한 번 테스트라도 해 보시죠.”
“예?”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아리아스 대륙에서 발로구스에게 허벅지가 뜯겨나가 사경을 헤맬 때 백구가 직접 잘게 씹어 상처에 발라준 것이 마력삼이었다. 그 덕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거대 악어 형태의 B 등급 몬스터 발로구스의 턱을 위아래로 찢어버리기까지 했으니까 충분히 실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
그날 밤. 구로구 외곽 역곡천변.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어둠에 파묻힌 검은 세단 두 대가 서로 불빛을 끈 채로 다가섰다.
“여기 있습니다. 이건 착수금. 잔금은 두 사람 다 깔끔하게 처리한 것을 확인한 후에 드리겠습니다.”
“좋을 대로. 떼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일만 제대로 처리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창문을 내린 채 무언가가 건네졌다. 물건을 건넨 이는 설 의원의 비서. 상대방은 인상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족발집 주방장? 훗! 이런 놈 하나 직접 처리하지 못하는 걸 보니 국회의원도 별것 아니군. 잠깐! 이 사람은 꽤 낯이 익은데?”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을 겁니다.”
돈뭉치가 든 것이 분명한 종이 가방을 옆자리에 앉은 수하에게 건넨 의문의 사내. 함께 전해 받은 파일을 뒤적이던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어허, 이러면 곤란하지. 이 정도 유명인을 처리하는데 보통 사람들과 같은 값을 받을 수는 없지. 두 배는 더 받아야겠어.”
“두 배라니요?”
“싫으면 말고. 죽일 놈들이야 넘쳐나니까.”
“잠…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의 눈동자가 파일 속 사진을 노려보았다. C 등급 마물인 빅터스크캣을 물리친 영웅, 팽달수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금세 심부름 값이 두 배로 올랐지만, 설 의원의 비서는 사내를 그냥 돌려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곧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배를 드리죠. 대신 일은 확실하게 마무리해주셔야 합니다.”
“물론. 그게 우리 화련방의 방식이니까.”
짧은 통화가 끝나고 거래는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다. 의뢰인의 의지대로.